176화 - 제33장. 구룡문의 계획들 (4)
이런 상황에서 그를 후진에 둔다면 금태하가 황사열을 차기 문주로 직접 앉히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금태하는 여기에 놀아 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참에 유종화의 기를 눌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릉무도 유 계수의 무공은 날 제외하면 팔룡 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힐 수 있겠으나, 그것은 그대들의 생각이지 내 생각과는 달라. 이 흑사왕을 제외하면 구룡문의 다음가는 무력이 바로 호도패랑 황사열이니 어찌 곁에 두고 함께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부디 유 계수는 내 제자와 더불어 날 도와 역할을 해 주길 바라네. 그래야 확실한 지지를 얻을 수 있지 않겠나?”
마지막 물음 속에, 오늘 구룡총회에서 오고 간 양립된 입장의 핵심이 함축되어 있었다.
쓸데없이 잔대가리 굴려서 간 보지 말라.
금태하 자신이 강력한 힘과 권위로 수십 년 구룡문에서 집권하였듯이 차기 구룡문주를 차지하려는 자라면 그에 걸맞은 힘과 공(公)으로서 증명하라는 이야기였다.
금태하는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
“추응계파가 경공이 뛰어나고 움직임이 기민하니 탁 계수 자네가 맡아서 지원해 주게나. 자네는 생각이 유연하니 충분히 역할을 할 거야. ……판단을 전적으로 일임하지.”
금태하의 말에 탁민효는 잠깐 고민했다. ‘판단을 전적으로 일임하지’라는 말이 그에게 어디까지 허용한다는 얘긴지 모호했기 때문이었다.
‘창천맹에게 전갈을 넣어도 된다는 얘기인가?’
탁민효는 생각이 유연하다고까지 얘기한 금태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자리에선 허락되지 않았으나 ‘유연한 생각, 판단의 일임’이라는 말이 그에게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문주의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좋아. 이 자리에서 할 말이 더 있는 사람은 지금 하게.”
아무도 더 얘기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구룡문주는 금태하였고,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없으면 이만하지. 모두 사흘 뒤 출발을 위해 준비하도록. 각 계파의 전력 구 할은 출전해야 할 것이야.”
그의 단호한 육성이 마지막으로 흑사전 안을 울리고서야 여덟 명의 계수가 차례대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다시금 휑해진 공간 속에서 금태하는 다시금 용상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버러지 같은 것들. 지금의 구룡문이 누구 덕에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자격도 없는 것들이 감히 날로 먹으려 들어? 어림도 없다.’
사흘 뒤엔 광혈신마와 광혈종을 멸하기 위해 출발한다.
백제성까지 도달해 전투를 치르기까지 일주일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광혈신마라는 대적을 상대해야 하는 당사자였으나 그에게선 조금도 긴장감에 휩싸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금태하.
그는 천하오절 장강흑룡 흑사왕 금태하였다.
구룡총회가 끝나고 반금파 계수 5인은 양염계파 문지(門地)로 함께 가서 유종화의 전각으로 들어갔다. 황사열과 장이풍, 탁민효가 보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함께 움직이는 걸 숨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친금파가 각자의 자리로 움직인 사이에 한곳에 모인 반금파는 이렇게 된 상황에 대해 성토하기 시작했다.
“하아, 이거 일이 꼬인 것 아닙니까? 졸지에 백제성까지 금 문주의 감시를 받게 생겼습니다.”
“그동안 별말 하지 않아서 저희가 방심한 것 같습니다. 막바지에 와서 이리 한 번에 터뜨릴 줄은 몰랐습니다.”
“제길! 어떻게 다시 뒤집을만한 상황이 없겠습니까? 저희가 계획했던 것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만!”
노독문과 옥진철, 지부강이 차례대로 외치는 것을 듣고 있던 유종화가 손을 들면서 말을 끊었다.
“우리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것은 오늘의 자리만 그런 것뿐이지 아직 길은 남아 있다.”
답답함과 억울함만 가득했던 세 사람이 반색하면서 유종화를 바라보았다.
유종화는 남조양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 남조양도 그를 흘끔 쳐다보니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크흠!”
남조양이 헛기침을 하자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상황이 안 좋게 되었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금 문주는 본래 지모도 뛰어난 자였으니 확실히 최근의 침묵이 의아하긴 했어.”
“방도가 있으십니까?”
“있긴 하지. 이런 수까지 쓰지 않길 바랐지만 말이야.”
“그게 무엇입니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
다른 사람의 칼을 빌려 적을 죽인다. 그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다른 사람’은 누구고, ‘적’은 누군지가 모호했다.
아니,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들 말을 잇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이미 그 방안을 따로 논의한 적 있던 유종화는 냉정한 눈으로 입을 뗐다.
“어차피 백제성으로 향해야 한다면 금 문주가 문주직을 여생과 함께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야지.”
죽은 선대 계수를 이어 후대를 이은 세 사람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이내 표정에 두려움이 드리워졌다.
금태하를 죽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여부를 떠나서 자신이 소속된 구룡문의 수장을 구룡문의 적을 통해 죽인다는 이 계획이 얼마나 상식의 기준을 벗어난 일인가?
“하……하하… 하하하하!”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웃음소리에 지부강과 옥진철이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노독문에게 일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그는 마치 실성한 듯한 표정으로 웃음을 흘리면서 어깨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중간에 희번덕거리는 눈빛이 소름 끼쳤다.
어느 순간 웃음소리가 끊어졌다. 그러나 불현듯 떠오른 생각 때문에 노독문의 떨리는 어깨는 쉬이 멈추지 않았다.
그가 조소 띈 얼굴로 유종화를 보며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유 계수님.”
“노독문!”
옥진철이 놀라 그를 불렀다. 그는 사문의 문주를 사문의 적을 이용해서 죽인다는 이 계책을 쉽게 이해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노독문은 되려 그의 멱살을 붙잡고 다그치고 있었다.
“자네야말로 정신 차려. 어차피 한 몸이 되어 백제성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 거기서 결판을 지어야지. 금 문주 뜻대로 흘러가면 여기 누구도 쉬이 살아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어. 금 문주가 황사열이 자신의 제자라고 제멋대로 차기 문주직을 넘겨주려고 하는데 이 해악을 지켜봐야만 하냐? 그만큼 해 처먹었으면 충분하지. 후임까지 뜻대로 하려 한다면 구룡문을 세우신 개파조사(開派祖師)께 예의가 아니겠냐?”
옥진철은 노독문의 억지 명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백제성에 가서 누구도 쉽게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은 현실적으로 들렸다.
옥진철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부강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광혈신마가 남기고 간 공포 때문이었다.
금태하의 천하오절이라는 위명은 범접할 수 없었지만, 그의 무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은 이십여 년 전의 아득히 오래전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광혈신마와 광혈종의 그 광기 어린 폭력은 불과 3년 전의 기억이었다.
게다가 금태하는 마치 자신이 이길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나 광혈신마는 그렇게 쉽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소요자에게 쫓겨 패주했지만, 그것이 무공의 상성 때문이라는 강호의 평가를 생각한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만약 광혈신마가 다시금 화경의 고수와 맞붙기 위해 스스로 준비를 마쳤다면, 혹은 그에게 구룡문이 쳐들어갈 것이라는 언질을 미리 줄 수 있다면 결과는 어찌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유 계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옥진철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부강과 노독문의 대답이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다소간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유종화와 남조양도 반색하며 반겼다.
“좋아. 우리는 동지다. 모든 일은 내게 맡기고 지금은 금태하의 지시에 순순히 따라들 주게나. 내 중요한 사안들은 틈을 봐 별도로 일러 주겠네.”
유종화와 남조양은 세 계수들을 안아 주며 격려했다. 다시 떨어지자 노독문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떤 수를 쓰실 것인지 대충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대충이라면 어려울 건 없지.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곳 응성의 외곽 지역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빈민촌, 폐촌으로 바뀐 지 오래네. 이것도 금 문주가 힘을 모은다고 벌인 짓 때문이지만, 아무튼! 자연스럽게 우리를 지켜보는 정보 꾼들이 숨어 지내기에 딱 좋은 환경이 되었네. 그리고 오늘 정오가 조금 지났을 때, 거기서 개방과 하오문 놈들이 숨어있는 걸 발견했네.”
“그래서 늦으셨군요?”
금태하가 구룡총회의 소집을 알려 왔을 때, 유종화는 은밀히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반금파 다섯 사람이 구룡총회에 늦은 이유는 사실 남조양 때문이 아니라 바깥을 돌고 있던 유종화를 찾아오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래.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쓰잘데기 없는 것들이었지만, 쓸만한 정보도 얻었네. 아니, 쓸만하다기엔 모호한 것들이 많긴 해.”
“그게 무엇입니까?”
“확실한 거 하나만 얘기해 주겠네. 이곳 응성엔 마교의 끄나풀도 있네.”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옥진철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로 대단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독문의 표정은 좀 달랐다. 그는 여전히 흥미로운 심정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혹시 그 끄나풀들의 은거지도 알고 있답니까?”
딱!
유종화가 눈을 빛내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옥진철이 되묻자 노독문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신 대답해 주었다.
“은거지를 알고 있다면 거길 마교와의 접선지로 쓸 수 있다는 말이네, 이 사람아.”
“아아!”
옥진철이 그제야 불안한 기색을 거두면서 감탄했다.
남조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신 말을 이어갔다.
“마교의 감시자들과 접선해서 우리의 이동을 사전에 알릴 수 있다면 아무리 사천 분지 그 넓은 전역에 전력을 펼쳐놨다고 해도 우리가 백제성에 도착할 때쯤에는 상당 부분 끌어모을 수 있을 걸세. 금태하가 광혈신마와의 전투에 돌입하면 우리는 바로 빠질 수 있도록 놈들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하면 될 게야. 금태하를 쫓아온 무인들이 각 계파에 모두 퍼져 있긴 하지만, 이놈들은 계수들보다 금태하를 따르는 놈들이니 우리가 이탈 명령을 내려도 아마 자리에 남을 가능성이 있지. 그럼 우리는 구룡문의 순혈(純血)만을 남기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거야.”
“탁월한 계략이십니다.”
“놈들도 금태하를 죽이는 일만큼 중요시하는 건 없을 테니 우리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자네들은 조용히 아무렇지 않은 척 만반의 준비를 해두게. 아, 계파별로 수하들의 충성맹세 정도는 해두시게. 아마 금태하를 쫓아 입문한 놈들은 자연스럽게 반감을 갖고 백제성에서 우리의 이탈 명령을 적극적으로 거부할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것 또한 묘수십니다.”
세 사람은 남조양과 유종화의 지모에 감탄했다. 그들은 금태하가 아무리 계략이 뛰어나도 자신들의 수를 읽지 못할 거라 자신했다. 그의 끝없는 자신감은 분명 자만심의 경계를 넘어서 있으니까 말이다.
유종화는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득 하오문의 성종오라는 자를 붙들고 들었던 정보들이 떠올랐다. 몰랐던 것들이 더 있었지만, 직접 쓸만한 것들은 딱히 없어서 아쉬움이 있었다.
‘염황종이 귀주에 있을 줄은 몰랐지. 검림이 염황종과 한 판 붙으면 양측 다 지리멸렬하겠어. 천무방이 창천맹과 함께 마교와 싸우는 동안 우리는 후방에서 힘을 기른다면 분명 다시 사파제일문으로 우뚝 설 기회를 잡을 것이야. 또 뭐가 있더라…… 진도건이란 놈이 무당산 쪽을 지나서 한중으로 간다고 했나? ……쳇! 방현에서 광혈종에게 기습당한 게 떠오르는군.’
지부강과 옥진철, 노독문을 돌려보내고 남조양이 마지막으로 남게 되자 그에게 유종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은거지…… 아니, 접선지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끌끌! 그래, 접선지. 수고하시게.”
남조양은 유종화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전각을 떠났다. 그리고 바깥의 기척이 사라졌을 때, 유종화는 은밀히 병풍 뒤에 마련한 뒷문의 그늘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접선지가 될 마교 끄나풀의 은거지에서 금태하를 죽일 칼을 빌리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