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제33장. 구룡문의 계획들 (3)
“확실한 것입니까?”
“하오문에게서 입수한 정보들은 그대들도 알고 있을 것이고, 수하들을 시켜 장강을 타고 넘어온 상인들의 얘기들을 취합해 본 결과도 일맥상통하다. 그리고 비혈단주 놈이 넘겨준 정보도 같더군. 이 정도 교차 검증되었으면 이젠 행동할 일만 남았지.”
“이릉에서 군선을 포섭해 두길 잘했군요. 바로 움직여서 놈들을 박살을 내버립시다!”
장이풍이 바로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 힘있게 외쳤다.
하지만, 탁민효는 바로 움직이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문주님, 건의할 것이 있습니다.”
“왜, 창천맹의 도움을 받으라는 말이냐?”
“이런 말씀을 드려서 송구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뒤를 받쳐주도록 하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수월합니다. 기일을 늦춰 창천단이 움직일 만한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주고 결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금태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탁민효를 쳐다보았다.
“네가 나 몰래 창천맹과 소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가만히 놔둔 건 네가 내 뜻을 어기는 것이 구룡문을 위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쯤 했으면 됐다. 천무경은 구룡문이 자신이 짜 놓은 판에서 움직이길 바라는 것이지 구룡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또 그 판이 제갈가의 복룡이 짜 놓은 판이라면 들을 이유가 없다. 엎드린 용(伏龍)이 어찌 구룡과 흑룡을 손바닥 안에서 갖고 놀아보려 하느냐? 용납할 수 없다.”
“문주께서 그들을 이용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정(正)의 한 획도 내 앞길에 끼어들 수 없다. 놈들이 우리가 필요하다면 알아서 발맞춰 움직일 터. 탁 계수도 더는 그들과의 소통을 끊어라. 내가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더 용납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금태하의 단호한 명령에 탁민효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반금파의 계수들은 못마땅한 감정을 힘들게 숨기고 있었다. 선출된 문주라면 계수들에게 이렇듯 명령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문주의 뜻을 우선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합의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다만 이는 엄연히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리 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 금태하를 대하는 그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사열이는 내일 날이 밝으면 먼저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군선들을 준비할 수 있도록 일러라. 구룡문 본진의 출발은 사흘 뒤가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금태하는 다른 계수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살폈다. 큰 표정 변화는 없으나 뒤로 숨겨둔 감정의 기복까지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남 원로는 내게 조언할 말이 있나?”
철저한 하대.
이미 십수 년 전과 다를 건 없으나 지금 와서 더욱 나쁜 기분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두려움에 가려진 불편함이 비로소 기어 올라왔을 뿐.
“뇌가 굳어가는 늙은이가 조언할 게 뭐가 있겠소? 하지만, 탁 계수의 이야기를 문주께서 좀 더 귀담아 들어줬으면 하오.”
“이미 결정 난 사안인데 더 할 말이 있나?”
“구룡문의 영광이 앞으로도 백 년, 천 년 이어가려면, 죽음으로써 싸워야 할 정도의 큰일을 도모하려면 생문도 열어둬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오?”
금태하는 남조양이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 금방 눈치챘다. 자신이 내걸었던 문주직 사임 즉, 후사(後事)를 결정해 놓고 움직이자는 의미임이 틀림없었다.
‘이것 봐라……? 오늘 총회에 단체로 한참을 늦은 것은 일부러 힘을 주기 위함이렷다?’
유종화를 비롯하여 노독문, 지부강, 옥진철 모두 남조양에게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는 태세에서 맥락이 드러난다. 금태하는 그들의 구체적인 요구를 들어보기로 했다.
“남 원로가 생각하는 바를 똑바로 얘기해 봐.”
“노부는 광혈종과의 항전을 문주께서 너무 가볍게 생각하시는 게 아닌가 우려스럽소. 그들은 지난날 우리에게 괴멸적인 피해를 안겨 준 적들이오. 또 광혈신마와 같은 마교의 아홉 신마는 천하오절에 비견될 만한 무공을 갖추고 있다 들었소. 그렇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창천맹의 조력을 받던가, 혹은 불상사에 대비하여 후방을 지키며 길을 열어 주도록 전력의 분할이 필요할 것이오.”
“내가 창천맹의 조력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 테니 이것은 의미 없는 얘기일 테고. 요점은 후자로군. 하지만, 원로의 얘기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나 본문에 괴멸적인 피해를 준 놈들과 싸우는 일이라면 더더욱 우리의 전력으로 맞붙어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군선을 이용해서 빠르게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백제성을 타격하겠다는 문주의 의견에는 속전속결(速戰速決)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소이까? 놈들도 사천 분지에 전력을 분산시켜 놓은 이상, 작전 수행에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오. 더군다나 문주의 경천동지할 무공이라면 광혈신마를 충분히 꺾을 수 있지 않겠소이까?”
“클클클! 내가 세운 작전에 대해 아직 상세하게 말한 적이 없는데 원로께선 따로 세워 놓으신 작전이 있나 보군?”
“그렇……소.”
대답을 하면서 남조양은 대화의 흐름이 엇나감을 느꼈다. 금태하의 만면에 가득 머금은 조소만 봐도 그렇다.
“원로의 작전이 무엇인지 내가 몹시 궁금해지는군. 원로의 선견지명이라면 분명 내가 배울만한 점이 있을 거 같군. 어서 말해 봐.”
답변을 재촉하는 금태하의 다시 지음에 남조양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성급했구나.’
남조양은 유종화를 흘끔 돌아보았다.
유종화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금태하의 부정적인 반응이 나올 걸 예상한 상황에서 굳이 말 돌릴 이유는 없다 봤기 때문이다.
“크흠! 노부의 소견이지만, 병법에서도 전력 모두를 한 곳에 밀어 넣는 건 하책이라 들었소. 적을 타격할 전군(前軍)이 있으면 뒷받침하여 지원할 후군(後軍)도 있어야 하며 거점을 지켜야 할 본군(本軍)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다행히 전장이 될 백제성과 이곳 응성은 거리가 매우 머니까 최소 전력만 남겨 두어도 충분하겠지만, 언제든 지원과 탈출을 모색해 줄 후군으로 전력을 양분하는 방안은 꼭 필요할 것으로 사료되오.”
“구체적인 안을 말해 봐.”
거두절미(去頭截尾), 짤막한 말로 하는 요구가 부담스럽다. 거기다 하대의 명령조라 더더욱 그렇다.
“흠, 흠! 문주께서 선봉에서 광혈신마를 쓰러뜨리는 동안에 뒤에서 상황을 보고 지원을 하던, 퇴로를 열던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경험 많은 사람이 후진(後陣)을 맡아 이끄는 게 좋지 않겠소?”
“그럼 남 원로가 후진을 맡아 이끌겠다?”
“노부는 나이가 너무 들어 머리 회전이 빠르지 않으니 적합하지는 않은 것 같소. 오히려 문주 옆에서 싸우는 게 더 좋겠소. 노부보다는 유 계수가 실력과 경험 모두 출중하니 안정적으로 후진을 지휘할 수 있을 것이오. 어쨌든 광혈종의 기습에서 우리를 이끌어 본 경험이 있으니 이번엔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오.”
금태하가 시선을 돌려 유종화를 쳐다보았다.
유종화는 자신의 의지를 말로써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금태하의 눈을 마주 보고만 있었다. 사실 그것만으로 의사 표명은 충분했다.
금태하는 피식 웃었다.
“크흐흐! 남 원로의 제안은 타당하고 이치에 맞으니 듣지 않을 이유는 없지.”
“고맙소, 문주…….”
“…그러나!”
금태하는 남조양의 말을 끊으며 눈에 힘을 주고 그를 직시했다.
“원로가 얘기한 것처럼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면 후진보다 선봉에 전력을 집중하는 것이 맞을 터. 유 계수는 이 안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이니 뒤에 둘 수 없어. 오히려 내 옆에서 싸우는 게 맞겠지.”
“하지만, 경험 있는 사람이…….”
“후진은 옥 계수가 맡는 게 좋겠군. 금벽계파의 금벽강신공(金璧剛身功)의 방어력은 구룡의 무공 중 으뜸이니 불상 시에 버티기도 좋고 말이야.”
“추가로 더 배치해야…….”
“아니, 옥 계수면 충분해. 그렇지 않나, 옥진철? 죽은 아비의 지위를 이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불혹을 넘겼는데 남 원로가 애 취급하는 것도 우습지 않나? 하하하!”
확정 짓듯 얘기하는 금태하의 말에 유종화나 남조양은 이 결정을 돌리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말을 끊으면서까지 이렇게 지시한 이상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희만 담당하기엔 너무 수적으로 부족하지 않습니까? 세 계파 정도는 후진을 형성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옥진철이 다른 방향으로 계획을 틀어보려고 다시 물어보았다. 하지만, 금태하는 이미 머릿속에 어떻게 이들을 다룰지 구상을 끝내 놓은 상황이었다. 단지 남조양의 얘기를 조금은 들어주는 척 금벽계파만을 후진에 놓겠다는 얘기를 한 것이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우리가 같이 공감하고 있는 속전속결의 전략이라면 전력을 다해 치고 빠지는 것이 맞다. 그러기 위해선 전력을 허투루 낭비할 수는 없지. 특히 그대들은 광혈종에게 직접 당했던 만큼 이때를 이용해 그 복수심을 분출해야 할 거 아닌가?”
다섯 사람의 눈빛이 일제히 흔들렸다. 금태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그리고 씩 웃으면서 마지막 종지부를 찍는다.
“크하하하! 이거 내가 실수할 뻔했구먼. 옥 계수, 자네도 부친인 옥청동(玉靑銅) 전 계수가 광혈신마의 손에 죽었지 않은가? 이 몸이 광혈신마를 쳐 죽이는 걸 자네는 현장에서 볼 자격이 있지. 암! 그렇고말고. 우리 유 계수와 남 원로, 옥 계수, 지 계수, 노 계수는 모두 나와 붙어 움직이세. 내 친히 그대들 앞에서 광혈신마를 찢어 죽여 보일 터이니! 하하하핫!”
금태하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다섯 사람의 표정이 이젠 눈에 띄게 굳어 버렸다.
타당한 이치로 설명하여 명분을 쥐려 했던 말들이 고스란히 되돌아와 오히려 명분마저 내어주고 휘어 잡힌 꼴이 되어 버렸다.
친금파와 반금파는 광혈종의 기습을 직접 겪었느냐의 여부로 입장이 갈리기도 했다. 즉, 반금파로 돌아선 다섯 사람이 오히려 광혈종과 싸움에 더 기세를 올려야 함이 마땅했고, 이 전제에서 벗어날 만한 더 좋은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연방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그들을 내리깔아 보는 금태하의 눈빛은 그들에게 강력히 묻고 있었다.
‘너희가 고작 자기들의 안위와 구룡문주 자리를 탐내어 지난날의 참패에 대한 복수의 의지를 저버리려 하느냐?’
선출 규정의 부활이 가져올 이익이란 기실 계수들의 몫이 큰 것이지, 구룡문 소속 제자들의 몫은 아니었다.
지난날 방현에서 광혈종의 기습을 받아 살아남은 구룡문의 본래 제자들 대부분은 이번 싸움을 크게 고대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들의 수장인 천하오절 흑사왕 금태하가 함께하는 싸움이 아니던가?
아무리 그때의 기억이 끔찍하다 하더라도 지금에서 패배를 그리는 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또 사패련에서 구룡문으로 가입시킨 자들도 그의 위세와 구룡문의 무공을 믿고 들어와 지금까지 남아 있기에 금태하의 지배력이 강하게 미쳤다. 아홉 개 계파로 갈라지긴 했어도 계수보다 금태하를 따르는 것이 실상이었다.
한 번 전장에 서면 분명 금태하의 지시를 우선해서 따를 것이므로 아예 후진에 빠져 있지 않은 이상 쉽게 통제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마교를 처단하려는 명분만큼 중요한 건 없었다.
여기 있는 수뇌부들은 뺀다면.
“그럼…… 후진엔 누구를 세울 것이오? 설마 제자인 황사열 계수에게 맡길 셈이오?”
크게 한 방 먹어 착잡한 표정이었던 유종화가 굳은 표정을 한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