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74화 (174/432)

174화 - 제33장. 구룡문의 계획들 (2)

* * * *

구룡문.

과거 혈마로 인해 중원에 피바람이 불어 정파의 지위가 한풀 꺾이고 사파의 지위가 격상될 때, 장강이북과 이남에선 9개의 문파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께 각광 받기 시작했다. 특히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떨어지자 그들은 힘을 합쳐 제일 세력으로 발돋움하기로 뜻을 모으니 이것이 구룡문의 전신이었다.

문파들의 연합체였기에 10년에 한 번꼴로 문주직을 돌아가면서 맡기로 하였고 이후로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면서 강호에 그 명성을 날렸다. 그리고 수십 년 후, 결정적으로 흑사계파에서 금태하라는 천재가 나타나면서 구룡문의 위상은 크게 날아올랐다.

응성의 북동부에는 구룡문에 속해 있는 아홉 계파가 각자의 전각 등을 가지고 벽을 세워 영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각 계파의 배치는 구궁(九宮)의 형식을 따르고 있어서 구룡문주가 된 계파가 중궁(中宮)에 해당하는 중앙 전각을 차지하는 식이었다.

물론 지금은 금태하의 선대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거의 50여 년 동안 중궁 현판과 흑사계파의 현판이 한 몸처럼 달려 있었다. 그리고 이런 관성으로 인해서 흑사계파의 제자들은 중궁이 자신들만의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인식이 갈등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던 것은 오직 금태하라는 절대자 때문이었으나 최근 구룡문에 맴도는 어떤 심리적 흐름은 금태하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다른 일부 계수들이 부하들, 제자들의 불만을 일부러 통제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연유에서인지 금태하는 이를 방관하는 상황이었다.

구룡문 중궁 흑사전(黑邪殿).

전각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반대편에는 크고 넓은 용상(龍床)이 보였고 이 용상을 마주 보는 위치에서 원형으로 배치된 여덟 개의 용좌(龍座)들이 있었다.

여덟 개의 빈 용좌들, 거대한 용상만이 제 주인을 받들어 모신 채 무거운 침묵을 흘리고 있다.

“흐음…….”

금태하는 넓은 용상에 옆으로 드러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자는 것은 아니었다.

흑사왕이라는 그의 별명은 수십 년간 거머쥔 구룡문의 패권과 사패련주로서의 위상, 그리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거침없는 성정과 맞물려 얻어진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련주직을 던지고 구룡문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예전과 같이 떠들썩한 패기를 보여 주지 않고 있었다.

거친 성정은 여전하긴 했지만, 모든 사안에 대해서 무거운 태도로 받아들였고 때로는 오히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묵으로 일관할 때도 있어서 상당히 낯선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계파들이나 제자들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긴장과 불안이 동시에 흐르고 있었다.

뚜벅뚜벅뚜벅…….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었으나, 익숙한 박자감이 섞여 있는 거로 보아 한 사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잠시 기다리자 곧 흑사전 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왔다.

금태하는 감았던 눈 중 오른쪽 눈을 살짝 뜨고서 들어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았다.

‘……예상대로군.’

현재 구룡문의 아홉 계파는 사실상 둘로 쪼개져 있었다.

흑사계파를 포함하여 구룡문주 금태하를 따르는 계파들과 차기 문주의 권력을 가져오고자 하는 계파들.

백호계수가 된 황사열과 사패련직을 맡을 때 따라 쫓아와서 일을 해 주었던 창월계수 장이풍 그리고 몰래 창천맹과 접촉하고 있는 추응계수 탁민효가 지금 들어오는 세 사람이자 이른바 금태하를 따르는 친금파(親金派)였다.

“구룡총회(九龍總會)의 부름을 받아 왔습니다. 문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문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문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금태하는 손만 까닥하면서 세 사람의 인사를 받아넘기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의 이런 무심한 반응은 이미 충분히 적응하였는지 세 사람은 알아서 용상에 가까운 용석으로 찾아가 앉았다.

그 후로 시간이 다시 흘렀다.

금태하를 포함한 세 사람은 이젠 나머지 다섯 계수를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앉아 있는 계수들도 그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재밌지 않으냐?”

그런 침묵을 깬 것은 금태하였다.

세 사람의 눈길이 그에게 향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치 천장을 바라보듯 얼굴을 살짝 위로 둔 채 알 수 없는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무엇이 재밌으십니까?”

“지난 40여 년 가까운 세월 속에서 이 금태하가 용상을 쥐고 놓지 않을 땐 한 마디 찍소리도 못하다가 이제 곧 자리를 내놓는다고 하니 사장된 옛 문규(門規)를 꺼내어 선출하자는 시위를 하는구나. 크크크!”

황사열은 팔짱을 낀 채 굳은 표정이 되었다.

금태하는 문주직을 내놓겠다고 했으나, 다시 선출하는 절차를 하겠다고 선포하진 않았다. 그것이 계파는 달라도 자신의 제자에게 문주직을 물려 주겠다는 의지임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었다.

친금파와 반금파로 갈라진 것은 바로 이 구룡문주라는 자리는 선출제라는 옛 문규에 대한 입장 차에 기인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황사열은 그 중심에 선 당사자였기 때문에 이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벅저벅…….

“크흐흐흐…….”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다수의 걸음 소리가 금태하의 조소와 섞이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다소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긴장감 속에서 흑사전 안으로 다섯 사람이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고, 세 사람은 비교적 젊은 4, 50대의 중년인이었다.

일흔아홉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백발백염의 비쩍 마른 청의(靑衣) 노인은 청교계파(靑蛟系派) 계수 남조양(南早暘)으로 구룡문에서 가장 원로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보조를 맞춰주는 선두의 노인은 양염계파(陽炎系派)의 계수 화릉무도 유종화였다.

유종화는 반금파가 밀어 올리고자 하는 차기 문주 후보이자 구룡문에서 금태하 다음의 강자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개인으로서 금태하와의 격차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물러난다면 황사열은 충분히 자신이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스스로 무력에 자신이 있는 자였다.

뒤따라온 중년인들도 모두 계수였는데, 이들의 나이가 한 세대 가까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모두 3년 전에 계수 자리를 물려받은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즉, 선대 계수들은 모두 광혈신마와 광혈종에 죽었다는 얘기였다.

녹의(綠衣)의 중년인은 녹주계파(綠蛛系派) 계수 노독문(老毒吻)으로 독공의 고수였다. 육 척이 안 되는 것 같은 땅딸보에 다부진 체격의 주인은 전토계파(轉土系派) 계수 지부강(地剖江)이다. 황토반요공(黃土反妖功)이라는 사술에 가까운 무공을 계승하는 계파였다. 유종화에 미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에 준하는 키와 체격, 다부진 팔 근육을 드러낸 자는 금벽계파(金璧系派) 계수 옥진철(玉眞鐵)이었다.

“문주님의 부름을 받아 구룡총회 참석을 보고 드립니다.”

“좀 늦었군.”

“문주께 송구하오. 이 삐거덕거리는 노구를 모셔오겠다고 씨름을 하는 통에 늦었소이다.”

원로 계수 남조양이 유종화 앞으로 나서 사과를 하였다. 그는 자신을 힘없는 노인으로 묘사했지만, 여전히 기운이 정정한 노인네인 건 이곳에 있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금태하보다 자신이 한참 높은 연배이니만큼 이해하라는 요구였다.

금태하가 문주직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한 것은 두 달 전.

가끔 이렇게 구룡총회를 열었을 때, 이들이 간혹 늦게 올 때가 있었으나 금태하는 어떤 질책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지나갈 거라 모두 예상을 했었다.

“클클클……!”

각자의 용석으로 가서 앉으려던 계수들이 그 웃음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구룡문 패주(霸主)의 공포가 다시금 떠올랐다.

“…큭큭! 영감탱이가 여전히 어린 계집들을 희롱할 정도로 정정하다는 건 문 내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데 감히 농지거리를 늘어놓는가?”

남조양의 얼굴에 당혹감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여색을 밝히는 건 금태하도 마찬가지니 단순 비교로 도덕적 우위를 가져가려는 게 아니었다. 예전부터 남조양이 금태하의 여성 편력으로 그의 명성을 깎아내리는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노독문이 발끈했다.

“무, 무례하십니다! 그래도 구룡문의 원로이신데……!”

“말 같잖은 핑계로 구룡총회에 번번이 늦는 그대들의 행동은 말이 되고?”

노독문을 비롯해 다섯 사람은 자신들이 지금 마주하는 사람이 노쇠한 문주가 아니라 여전히 변함없는 공포의 장강흑룡(長江黑龍) 흑사왕 금태하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히 금태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사죄를 표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침묵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했던 거였어……!’

다섯 사람은 진실을 깨닫고는 다시금 금태하를 향한 두려움을 상기했다.

계파별로 문주 직을 이양하는 구룡문의 전통은 금태하의 대에 이르러 깨졌다.

아홉 개 문파가 모여 구룡문의 깃발을 내걸었을 때, 사실 호북 최대 방파라 불리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그것은 무당파와 제갈세가의 위세가 크게 떨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봉문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호북 지역에서 쌓아온 덕망이라는 것은 민심 아래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룡문의 이권 개입은 번번이 마찰을 빚기 일쑤였는데 그렇다고 마음대로 학살을 자행하면 관의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그 위세가 쉽게 퍼져나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수십 년 반복되던 중에 금태하가 문주가 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금태하는 무공을 익힌 자들에게 있어서 무림의 폭군이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을 포괄한 강호 속에서 그는 권모에도 능한 지략가였다. 구룡문은 그의 능력에 힘입어 그 위세가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차지하는 이권도 커짐에 따라 당연히 다른 계파도 문주직에 욕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폭군 금태하 앞에선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으니 사실상 선출규율은 명리(名利)만 남은 채 사장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리만 남은 선출규율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선 지금만큼 적기도 없었다.

다섯 사람은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누구도 내심 이를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서야 모두 모인 팔룡이 각자의 용석에 앉고 나서야 금태하는 모두를 한 번 흘겨보고는 비로소 몸을 바로 세우며 용상 한가운데 앉았다. 다리를 쩍 벌린 채 허리를 곧추세우니 일흔두 살의 노쇠함은 찾아볼 수 없이 여전히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는 노룡(老龍)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마침내 모였으니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문주님의 분부를 기다립니다.”

황사열의 대답에 금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마침내 본문이 움직일 때가 되었다. 오랫동안 정보를 취합한 결과 광혈종의 세력은 사천 분지 전체에 넓게 퍼져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지만, 그중 삼분지 일이 집합된 곳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곳에 광혈신마가 주로 나타난다는 정보도 검증까지 완료했다. 예상대로 초점은 장강이니 그곳은 바로 백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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