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제33장. 구룡문의 계획들 (1)
닭 여섯 마리를 대충 넣고 한솥을 삶은 것도 여섯 사람이 한 마리씩 먹고 나니까 금방 깨끗하게 비워졌다.
표개는 닭뼈를 부러뜨려 뾰족하게 만든 거로 이빨 사이의 음식물들을 긁어 뺐다. 다른 사람들도 따라 치아를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개방 두 거지뿐만 아니라 하오문의 세 사람도 따라서 했다. 한동안 계속 같이 지내다 보니 잡다한 습관들이 닮아가고 있었다.
“자, 이제 얘기들 해 봅시다. 광혈종은 어떻소?”
“여전허요. 한중을 거쳐서 주로 사천분지의 산지와 수계(水系)들을 점거하는 모양인데, 그 수를 헤아리기 정말 어렵다고 합디다. 추산이긴 하지만, 5, 6천여 명이 유입되었다 그러던데.”
“육천?”
“일반 병사로만 보면 택도 없는 행위지만, 하나같이 일류고수 이상의 무리가 조를 이루면서 주요 길목들을 감시하고 있다 하니 파고들기가 참 어렵지유.”
“원래 예상했던 숫자보다 훨씬 많은데?”
“미친놈들이잖소. 약쟁이들이고.”
방원도가 중얼거리면서 대꾸했다. 그리고 이것은 광혈종의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단어들이었다.
광혈종의 마인들은 하나같이 광인이 되어 버리는 홍문단이라는 약을 사용하는데, 이걸 이용하여 일시적으로 무공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약만 조달할 수 있다면 일류고수 수준만 되더라도 약을 통해 절정고수급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니 인력 수급에 사실상 한계가 없는 셈이었다.
물론 이런 약에는 부작용도 있었으니 첩보에 따르면 내공이 약한 자들은 50세를 거의 넘기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절명하고야 말았다.
“더 유입될까?”
“각지에서 올라오는 정보들이 시차가 있어서 당장 판단하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거의 다 들어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천 내부 정보는 여전히 막혀 있나?”
“간간이 들어오는 건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죠. 그래도 장강의 감시는 느슨한지 물길 따라 왕래하는 인편을 통해서 어느 정도는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혈주가 여전히 견제하고 있고, 광혈종도 종종 나타나 마을들을 약탈도 하는데 이 때문에 청성파가 제대로 화가 난 모양입니다. 조금만 의심스러운 구석이 보여도 검을 휘둘러대서 가뜩이나 흉흉한 민심이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광혈종이 사천 안으로도 모습을 비춘다라……. 어쨌든 안으로 들어가려면 장강 만한 길이 없나 보군.”
“대규모 이동은 어렵고, 분할로 이동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이니 확실히 뚫어내긴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구룡문의 움직임이 중요하잖아. 하오문에서 보기엔 어떻소?”
표개가 단문열을 돌아보며 물었다.
“조용하지만, 또 그렇지도 않은 움직임도 있어서 어렵소. 확실히 광혈종이 계속 사천 분지 쪽에 출몰하고 있다 보니까 구룡문도 이를 포착했는지 꾸준히 인원들을 보내어 경로를 탐색하고 있는 모양이오만…….”
“……이오만?”
“이릉(夷陵)에 인원들을 보내는 일이 부쩍 많아진 것 같소이다. 아무래도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군선이라도 알아보고 있다는 말인가?”
“전력 상황과는 다르게 재력은 풍성한 시기이니까 알아볼 만하군요. 황군은 대부분 난주성 전쟁 지원을 위해 이동하고 있는 터라 어느 지역이든 사실상 치안 유지만 간신히 할 인원밖에 남지 않았잖습니까? 구룡문 같은 거대 방파가 적당히 금을 쥐여 주면서 으름장을 놓으면 움직이지 못할 관은 없을 것입니다.”
성종오가 동의하는 사이에 고훈은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겉으론 게을러 보여도 머리 회전이 빠른 인물이었고 그는 이내 앞에 놓인 젓가락을 들고 탁자를 쳤다.
탁!
“장강을 따라 이동하려는 게 맞을 것 같수다. 어쨌든 사천 분지의 광활한 산지 속에서 광혈종이 산개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엔 어딘가 중심을 두고 움직일만한 거점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겠수? 만약 장강을 낀 지점에 거점을 두고 있는 거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이지 않수?”
표개는 일리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의 물살이 거센 편이긴 하지만, 이릉을 통해서 배로 운항하여 진입하면 육로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특히 훈련된 노꾼들을 기용하는 군선이라면 장강 중류의 물살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결국엔 거점이 중요하겠군. 그렇다면 후보군은 몇 개 없네.”
고훈이 씨익 웃었다.
“왜 웃어?”
“촉이 왔수.”
“어디?”
“백제성(白帝城).”
“……소열제(昭烈帝)가 뒤진 곳 말이오?”
방원도의 물음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장강 삼협 중 구당협(瞿唐峽) 백제산(白帝山)에 세워진 산성인데 나라들이 망하고 다시 세워지면서 지금은 사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고성으로 남아 있는 거로 알고 있수다. 아시다시피 구당협은 장강의 상류에 해당하는 곳이라 보통 물살이 아니라우. 수로와 육로 모두 접근이 어려운 곳이니 놈들이 거점으로 삼기엔 최적의 장소지.”
촉한 소열제 유비(劉備)는 의제(義弟) 관운장(關雲長)의 복수를 명분으로 동오(東吳)를 침략하기 위해 진군했다가 이릉에서 대패하였다. 그 이후 물러나 성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승하한 곳이 바로 백제성이었다. 동오의 육손(陸遜)도 이곳까지 닿지 못해 평안함을 유지하니 영안(永安)이라 이름 짓기도 한 곳이었다.
“하하하하!”
규지방이 몸을 앞으로 들이밀면서 웃음과 함께 탁자를 두드려댔다.
“왜 웃어?”
“아니, 이거 좋은 신호 아니겠습니까? 백제성에 정말 광혈신마가 있다면 유비가 죽은 것처럼 그놈도 결국 그곳에서 죽을 거라는 암시 아니겠습니까?”
“구도가 다르지 않으냐? 그런 거에 아직 헛심 쓸 때는 아니다.”
표개의 지적에 규지방이 입맛을 다시면서 몸을 뒤로 뺐다.
“어쨌든 구룡문의 전개 방향이 장강과 맞닿아 있다면 이릉은 확실히 목이 될 수 있어. 잘 주시하자고. ……구룡문 내부 분위기는 아는 사람 없나?”
“잘은 모르겠지만, 역시 상당히 긴장한 상태라고 합니다. 사실 광혈종에게 그 피해를 입었을 때는 구룡문이 쪼개져서 사룡문, 오룡문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말이죠.”
“금태하가 이기적인 짓을 했지만, 결과적으론 구룡문을 다시 살려 놓은 셈이었지.”
“아, 그리고 이번 광혈종 토벌 이후에 금태하가 문주직을 내려놓는다고 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차기 문주를 어떻게 선출할 것이냐에는 입을 다물고 있어서 황사열에게 넘겨주려 하는 게 아니냐 하는 얘기가 돌고 있습니다.”
“뭐?”
단문열의 말에 표개가 깜짝 놀랐다.
“그것 때문에 시끌시끌하기도 합니다. 광혈종 때문에 몇몇 계수들이 죽긴 했지만, 아직 건재함을 과시하는 자들이 있는데 왜 다른 계파에게 이양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황사열은 금태하와 계파가 달라서 이양한다는 측면에서 어긋나지는 않을 텐데. 역시 아직 연배 때문인가?”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금태하는 다른 여덟 계수를 모두 감당할만한 괴물이지만, 황사열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요.”
“어리다고 무시할 건 아니지. 금태하의 진전까지 제대로 이었다면 계수 한둘로 황사열을 꺾지는 못할 것이오.”
“어쨌든 구룡문으로서는 풀기 어려운 난제에 직면한 것 같소.”
“쳇, 한심한 것들 아니유? 이런 식으로 분열하면 어디 광혈종 토벌이 가능하겠수?”
하나같이 맞는 말들이라 표개의 표정이 조금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구룡문과 광혈종의 충돌은 창천맹의 계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지만, 통제하기 어렵다는 위험과 우려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룡문의 체계까지 흔들리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건 창천맹으로서는 민감하게 인식하여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이러면 다른 쪽도 위험해지는데…….”
“검림은 이미 떠났겠죠? 거기서 염황신마를 잡아주면 그래도 좀 상황이 나아질 것 같은데요.”
“그것도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게 필요한데, 만약 구룡문이 제 역할을 못 하면 문제 발생 소지가 크다.”
“어쨌든 마교도 우리 측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거라고 한다면 그들의 사천 진입에는 문제가 없겠군요. 숫자도 적고 하니까.”
“진도건 일행?”
“예.”
“그렇긴 하겠지. 어디로 움직일까? 어찌됐든 한중으로 가는 길이 너무 험해서 경로에 제약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을 텐데 말이야.”
“관중 장안쪽에서 진령산맥의 잔도를 타고 남하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도 있고요.”
“한중으로 이어진 한수의 수계는 구불구불한 정도가 극심해서 장강삼협의 격류 이상으로 거칠 것이오. 일부 구간을 빼면 배를 타고 이동하기 어려워서 차라리 강을 따라 육로로 이동하는 게 낫지요.”
“……금주(金州) 안강(安康)인가? 그들이 안휘 검림에서부터 출발할 테니 이쪽을 경로로 잡는 게 적절한 것 같군. 진령산맥의 잔도에 비하면 길도 안전하니까, ……그렇게 되면 무당산 근처를 지나가겠는데?”
“그렇겠군요. 무당산 북쪽에 있는 훈양부(勳陽府)로 가면 한수 중류를 오가는 선박편이 있을 테니 빠르게 이동할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엔 표국도 있으니 배를 얻어 타면 안강까지는 하루 이틀 사이면 당도할 겁니다. 그 이후론 육로가 괜찮고 산지도 어느 정도 완만해지니 문제가 없겠지요.”
표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거기라도 무탈하게 도달했으면 좋겠군.”
“껄껄껄! 어떻게든 되지 않겠수?”
고훈이 웃어넘겼지만, 표개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들고 온 마대 자루 중 하나에 손을 집어넣더니 종이뭉치와 붓, 벼루, 먹물통을 꺼내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 그것들을 펼쳐 놓고는 취합된 내용을 정리하여 쓰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다섯 사람은 표개를 위해 이런저런 얘기들을 꺼내놓았다. 잡다한 정보들이지만, 참고할만한 사항들도 있어서 표개는 적절한 기준 아래에 선별하여 추가로 작성하였다. 그렇게 석 장을 작성하고 마무리한 그는 다시 낑낑대며 마대들을 등에 메기 시작했다.
“고생들 하시게. 난 맹에 전달해서 창천단이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네.”
“필요하면 기별 주시구려.”
“그러지.”
표개가 응명객잔을 떠나자 다른 다섯 사람도 내부를 정리하고는 곧장 하나둘씩 시간 차이를 두고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단문열이 떠나고 마지막 남은 사람은 이들 가운데 막내였던 성종오였다.
그도 시차를 두고 떠나기 위해서 잠시 기다려야만 했고, 이 무료함을 달랠만한 놀이가 필요했다. 의자에 앉은 채 비스듬히 기울였다가 발로 땅을 살짝 밀자 다리 하나를 축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면서 동시에 숫자를 세어 떠날 시기를 헤아리고 있었다.
끼익…….
우당탕탕!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란 나머지 그대로 나자빠져 버렸다. 성종오는 기겁하며 급히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사자 수염을 한 노인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올려다보아도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육중한 체격으로 거대해 보이는 인물은 햇빛을 등짐으로 인해서 전면에 음영이 졌다고 하더라도 성종오가 생각하기엔 단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클클클! 웬 놈들이 어슬렁거려서 뒤쫓아 와 봤는데 재밌는 얘기들을 나눈 것 같더구나. 어디 주둥이 좀 털어보아라.”
“유, 유종화(柳終火)!”
사자 수염의 노인은 바로 구룡문 양염계파(陽炎系派)의 계수 화릉무도(火陵無道) 유종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