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제32장.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함께 (6)
영은성은 도포는 벗고 일반 무복을 입었으며, 최현걸이나 야율균은도 비슷한 차림들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명성이나 얼굴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굳이 뭔갈 쓸 이유는 없어서 옷차림 외에는 평소와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천서은은 매연선에게서 원립을 받아 썼다.
여인네들이 쓰는 원립은 가운데가 구멍이 있어 상투를 틀 듯이 긴 머리카락을 머리 위에 세워서 거기에 걸어 쓰는 편인데, 매연선이 건네준 것은 원립 속 모자가 붙어 있어서 머리 위에 쓸 수 있었으니 단발머리인 천서은에게 딱 알맞았다.
원립을 쓰고 나니 검은색 면사가 허리까지 내려와 반투명하게 안이 비쳤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 속에 든 여인의 용모가 어떤지 궁금할 만큼, 그걸 쓰고 있어도 미모가 쉬이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강정학은 다섯 사람의 준비 상태를 대충 훑어보았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서 검객들이 말 다섯 필을 준비시켜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니 준비들은 끝난 모양이군.”
“지난 며칠 크게 신세를 졌습니다.”
“오늘 이후로 혹시 다시 본다면 다음은 사천이려나?”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청해나 서장까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강정학의 물음에 제갈무문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가? 아무튼, 조심히 가고 죽지들이나 말게나. 그래도 이 팔공산을 거쳐 간 이들이 이제는 이 노부보다는 다들 오래 살았으면 좋겠군.”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강정학의 염려에 감읍한 다섯 사람은 그에게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곧 하나둘씩 말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제갈무문은 진도건에게 다가와 그가 탄 말을 쓰다듬으면서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계획하고 움직이듯, 저들도 마찬가지겠지. 어쩌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날 복룡이라고 칭찬하지만, 제갈가도 결국 무림의 가문일세. 내가 책을 읽었다고 해 봐야 얼마나 읽고, 또 봉문을 해제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세상 경험을 얼마나 했겠는가? 촉한의 제갈무후(諸葛武侯)와 비교하면 나는 새 발의 피.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자네는 마교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분명 급변하는 현장에서 바른 판단을 내려줄 거라는 걸세.”
“제가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
“북부전쟁에 대한 보고를 받았네. 조태상의 판단도 주효했지만, 자네가 자처한 역할과 그 사이의 판단들은 그 순간에 아주 적절했네. 자네의 생각과 판단이 창천맹과 강호 무림의 승리를 끌어내고 또 동료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을 믿고 망설이지 말게나.”
“……제갈 가주님을 믿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갈무문이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좋네. 내 말이 부담스러울 텐데, 오히려 나를 띄워주는군. 그 또한 여유라 할 수 있으니 더 믿음이 가는군. 모두 조심히들 가게나.”
제갈무문은 말과 눈을 마주치며 쓰다듬고는 발길을 돌렸다.
강정학, 강도혁, 제갈무문 그리고 검림의 검객들과 그 가족들도 모두 둘러 모여서는 마침내 떠나는 다섯 사람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몹시 무거워 보였는데, 짧은 인연의 아쉬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다가올 전쟁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그들 사이에 흐르는 침묵의 적막은 마치 폭풍전야(暴風前夜)와 같은 느낌이었다.
* * * *
3년 전, 금태하는 구룡문의 전력 5할에 이르는 이천여 명을 홍천환 탈환을 위해 섬서 종남산을 향해 보냈다. 그러나 방현에서 천마신교 광혈마종과 광혈신마의 포위 공격을 받아 삼분지 이가 죽거나 다치며 지리멸렬(支離滅裂)한다.
금태하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였는데, 그가 가장 분노한 일은 바로 그나마 부하들이 생존한 이유가 무당파와 소요자의 구함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금태하에게 있어서 사파라는 명칭은 실용적인 측면과 그러한 철학에 따른 게 아니라 정파에 적대하는 위치라는 부분에 더 중한 가치를 두고 있었다. 즉, 무당파의 개입은 숙적에게 도움을 받은 셈이니 그에겐 이만큼 치욕적인 일이 없었다.
금태하는 구룡문의 복원을 위하여 사패련 련주직을 천무경에게 떠넘기면서도 사패련이 가진 많은 자산과 보물 대부분 그리고 4개 무력집단에 소속된 자들 가운데 자기 사문에 소속감이 적은 자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구룡문으로 편입시켰다.
덕분에 천무경은 창천맹을 세우기 위하여 바닥부터 다져야 했지만, 금태하는 광혈종에게 잃어버린 전력 이상의 숫자를 확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금태하에게도 좋은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천무경이 빠르게 창천맹의 위세를 중원 전역으로 확대함으로 인해서 구룡문의 지위는 자연스럽게 하락했다. 이권을 위하여 구룡문에 합류했던 자들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떠나가는 데다가 금태하 자체도 폭군처럼 지위를 휘두르니 신망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떠날 사람들이 떠나니 작금에 이르러서 구룡문의 세력은 3년 전보다 삼분지 이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구룡문은 여전히 3천 명이 넘는 무림의 최대방파로서 위세가 있었기에 창천맹으로서는 쉽게 무시할 수 없었다.
창천맹은 구룡문이 지난 패배의 수치를 갚기 위해 광혈종의 행적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금태하가 독자적인 행보를 통하여 구룡문의 위세를 떨치길 원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구룡문이나 그곳을 출입하는 인사들의 행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호북 응성(應城).
호북 지역을 굽이쳐 가로지르는 장강과 이곳으로 합류하는 최대 지류 한수(漢水) 그리고 동호(東湖) 근처엔 성을 쌓고 도시를 이룬 세 성이 있다.
무창(武昌), 한구(漢口), 한양(漢陽)의 성들이 바로 그곳이며 이들이 교역 도시로서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으니 이를 한데 묶어 무한(武漢)이라 불렀다. 응성은 바로 이 무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성이다.
작은 성이라고는 하나 호광평야(湖廣平野)의 평평한 토지 위에 세워져 8천 가구(家口)를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약 삼천 가구는 오로지 응성 중심지에 있는 구룡문이 보유한 전답과 전각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바로 사패련에서 회수한 보물들을 팔아 사들였으니 이는 새롭게 구룡문에 가입한 자들이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유혹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응성이라는 작은 천하에서 구룡문은 황궁과 다를 바 없는 권세가 있었다. 관도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으니 자연히 성 내에 발생하는 징세나 기타 권익이 구룡문에 집중되었다.
당연히 민심은 별로 좋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떠나는 백성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나 부패한 관료들이나 구룡문도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니 지난 3년간 응성은 비옥한 땅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황량해져만 가고 있었다.
구룡문과 관청이 있는 중심 시가지는 그래도 여전히 번화한 편이었지만, 성벽에 가까운 외곽으로 빠져나갈수록 빈민가가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거지나 도적들도 설치기 시작했는데 환경이 이렇다 보니 개방과 하오문이 여러모로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은거지를 마련하기에는 적당한 곳이었다.
응성에서도 서쪽 외곽 끝자락에 있는 응명객잔(應命客棧)은 바로 개방, 하오문이 공동 관리하는 집합 처였다. 이미 간판들은 쓰러지거나 부러진 채로 널브러져 있고 잡기들이 바깥에 쌓여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으니 한눈에 보기에도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었다.
사람이 지나가는 일 없이 황량한 바람만 불었지만, 한 사람만큼은 그곳에 목적이 있는 것인지 시선을 똑바로 두고 걸어가고 있었다.
마른 체형과 남루한 행색이 딱 봐도 거지였는데 등에는 여섯 자루의 마대를 짊어지고 있어서 여간 거추장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양어깨가 결리는지 틈나는 대로 어깨를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근육이 뭉치지 않게 풀어주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거지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객잔 앞에 이르렀을 때, 바로 들어가지 않고 멈춰 섰다. 그는 이내 콧구멍을 벌리면서 킁킁거리더니 즉각 문을 발로 걷어찼다.
쾅!
“이것들이 나만 빼놓고 벌써 닭을 뜯고 있어?”
요란을 떨면서 들어가자 안에는 다섯 사람이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솥을 가운데 두고서 닭고기를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막 들어온 그와 같이 거지꼴을 하고 있었고, 세 사람은 남루하긴 하나 꽤 깔끔한 행색이었다.
“표개 어른 왔수? 딱 오실 줄 알고 여섯 마리를 삶았지. 어여 오셔서 뜯으시구랴.”
씩씩거리면서 들어왔던 표개는 그 소리를 듣고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성난 표정을 거두지 않은 채 그들을 흘겨보았다.
“대충 한 마리 더 삶아놨다가 오면 주고 늦으면 너희들끼리 먹으려고 한 걸 내 모를까 봐?”
“대충 그렇게 넘어가 주슈. 좋은 게 좋은 거지. 켈켈켈!”
뚱뚱한 거지가 웃으면서 표개의 심정을 달랬다. 그의 이름은 고훈(考勳)이었고 표개를 먼저 맞이했던 거지는 규지방(圭地彷)이었다.
표개는 서둘러 등에 짊어진 마대를 풀기 시작했다. 마대 끈이 엉켜 있어서 쉽게 안 풀려 낑낑대자 고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표개가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에이씨, 계급 높아진 건 좋은데 마대를 하나씩 더 짊어지라고 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고거 사치스러운 불평이유. 나와 지방이는 몇 년째 네 개 밖에 못 드는데 말이오. 장 형은 표개라는 별칭도 받으시고 마대도 받으시고…… 내년이면 마대 한 자루 더 받을 거라는 말도 있습디다.”
개방 거지들은 특수 임무를 띨 때를 제외하면 보통 길에 나설 때는 마대 자루를 짊어지고 다녔다. 대부분 몸을 가볍게 하려고 빈 자루로 다니곤 하지만, 한두 자루 정도 메고 다니는 낮은 계급의 개방 제자들은 구걸하면서 먹을 것을 넣어 다니기도 했다.
“잠입하고 다닐 때가 좋았지. 아무것도 안 매고 다녔으니까. 이제 맹에 왔다 갔다 하려니까 홍 방주가 행색은 갖추고 다니라고 핀잔을 주더라고.”
“하긴 네 개도 귀찮은데 여섯 개를 매는 건 얼마나 더 귀찮을까?”
표개는 마침내 마대를 모두 풀어서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의자에 함께 앉았다. 그는 빈 그릇을 들어 손으로 대충 닦고는 아직 뜨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솥 안의 남은 닭 한 마리를 꺼내 그릇에 담았다. 그걸 고훈이 흘끔거리면서 아쉬운 입맛을 다신 건 다행히 보지 못했다.
맞은편의 세 사람은 하오문도들이었다.
각각 성종오(成鐘五), 단문열(單門烈), 방원도(方元道)라고 했는데 고훈, 규지방과 함께 작년부터 합을 맞추어 구룡문을 감시하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더 있었지만, 이들이 중간 계급의 관리자로서 말단 제자들의 역할을 조정해 주곤 했다.
성종오가 닭 날개의 뼈 사이에 있는 고기를 혓바닥으로 발라 먹으면서 표개 뒤에 있는 마대 자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훈과 규지방 옆에도 여덟 개의 마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는데 딱 봐도 불편해 보이긴 했다.
“쩝쩝……. 크흠! 그러지 말고 체계를 바꿔보자고 건의해 보시오. 개방이 정파라 고지식한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거추장스러워야 되겠소?”
“왜, 좋은 생각이 있나?”
성종오는 28세로 가장 젊었는데 그래서인지 불혹을 넘긴 다른 하오문의 두 선배나 고훈, 규지방보다 참신한 생각들을 종종 얘기해주곤 했었다.
“우리가 친해진 게 오래되지 않아서…… 그동안 말을 안 하긴 했는데, 생각난 김에 얘기해드리겠소. 귀찮게 마대 개수 늘리지 말고, 하나만 멘 다음에 마대 끈에다가 계급을 표시하면 간단할 것 같은데. 어떻소?”
“괜찮은데? 근데 어떻게 표시하는데?”
“뭐…… 매듭을 짓는다거나 하면 될 일 아니오?”
표개는 닭 다리를 통째로 입안에 넣고 호로록거리며 살을 발랐다. 그러면서 잠시 고개를 돌려 메고 온 마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개가 다시 성종오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괜찮은 생각인데,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