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71화 (171/432)

171화 - 제32장.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함께 (5)

천하에 다양한 검객들이 팔공산이라는 다른 명산에 비해 높지도 않은, 평야 위에 아담하게 솟은 동산에 모였다. 이곳은 천하제일검 강정학이 사는 곳이며, 천하의 검객들이 그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숲처럼 모이니 검림이라고 불렸다.

검림을 지나가는 검객들은 바람처럼 많으니 검을 든 자 누구든 그곳에 닿으면 귀중한 한 가지 정도는 얻고 간다고 한다.

산원소매라는 시제(詩題)처럼 오늘 팔공산 정상에 매화나무 꽃이 피었으니 이곳에 온 다섯 사람 가운데 가장 큰 것을 얻어간 사람은 응당 화산파 암향소영 영은성이리라.

눈먼 검기에 다친 인부들이 없었고, 바로 옆 검총궁도 그들에게서 비롯된 생채기 하나 없이 서 있었다.

잘려나간 검총궁 상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제의 그 검기는 가히 대단하여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지만, 아마 검림의 검객들에게 이 시기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꼽아달라 묻는다면 바로 오늘이라 말할 것이다.

카앙!

강정학의 검력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놓쳐 버린 검이 하늘로 떠올랐다.

검객이 검을 놓친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지만, 당사자인 두 사람의 시선에도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전혀 그런 감정을 공유하지 않았다.

공중에서 팽그르르 돌다가 영은성 옆에 떨어져 땅에 박힌 그의 검은 벌써 칼날에 이가 다 빠질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

또 그만큼 영은성은 기진맥진해져 무릎을 손으로 짚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강정학은 자신의 검을 검집에 돌려놓고는 요대에서 풀었다. 그리고 영은성에게 내어주니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받아라. 딱히 명검은 아니지만, 그래도 백련정강으로 제련한 장검이니 쓸만하다. 네 성취를 축하하는 데 노부가 이런 식으로 기분 좀 내려고 하니 거절할 생각 말고.”

짝짝짝-!

갑자기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진도건 일행이 깜짝 놀랐음은 물론이었다.

“아버님 말씀대로 평범한 장검이지만, 참고로 여기 검림 검객들은 모두 아버님께 저렇게 검을 받은 사람들이다. 저마다 이렇게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니 아버님의 의도를 알고 축하하는 것이야.”

강도혁이 흐뭇하게 웃으면서 연유를 일러주었다.

그제야 진도건 등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따라 손뼉을 쳤다. 천하제일검에게 인정을 받은 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써 말이다.

“고맙습니다.”

영은성은 기꺼이 검을 받았다.

자루를 만져보는 순간, 백령신검 강정학의 검혼(劍魂)이 깃들기라도 하는지 조용한 맥동을 손안에서 느꼈다.

그것이 얼떨떨한 기분에 불씨를 지폈다. 귓가로 맴돌던 박수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진중한 예의를 중시하는 그에게 있어서 정말 뜻밖의 행동이라 할 수 있었다.

강정학이 준 검을 들고 두 손 높이 번쩍 들며 함박웃음과 함께 환호하는 영은성의 모습에 환호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뜻밖의 모습에 최현걸이 키득거렸다.

“대형, 쟤 정말 좋은가 본데요?”

“그러게. 후후!”

하늘은 어두워지고 달과 별이 떠오르며 공기가 서늘하게 식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마을로 돌아갔으나 검향의 매화 잔향은 찬 공기 속에 아직 검총궁 주변에 맴돌았다.

그 무렵 팔공산 다른 봉우리에선 어둠 속에서도 섬뜩하리만치 선명한 검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두 자루 만곡도를 휘돌아 볼 때마다 이 검은 바람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괴이한 궤적을 그리며 휩쓸어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거칠고 파괴적인지 가까이에 있던 바위나 나무들이 찢겨 나가며 쓰러졌다.

‘쳇.’

못마땅했다.

강호의 자유와 모험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진도건 등을 따라다니고 있긴 했는데 그들이 보여 주고 있는 무공의 성취들을 보고 있으니 죽여 놓았던 경쟁의식이 묘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애초에 그녀보다 더 위에 있던 고수라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꾸준히 성장세가 보이는 최현걸은 물론이고 고지식함에 지지부진하던 영은성이 뜻밖의 깨달음을 얻어내자 쫓기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녀가 두 정파의 후기지수보다 훨씬 강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상 전투에서만큼은 둘 모두를 감당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너무 허송세월을 보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야말로 남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있었고 이게 길어지다 보니 뭔가 뺏긴 느낌이 들기도 했다.

푸푹!

두 손에 든 만곡도를 아래로 던져 그대로 땅에 박았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찌 됐든 그녀도 무인이었기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버린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공의 속성상 일상처럼 하는 호흡법만으로도 축기는 계속 이어가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막막하기만 하고 그 의지를 공유하지도 않으니 일행에서 소외된 느낌도 들었다.

‘하긴 원래 소외된 존재긴 하지, 내가.’

야율재와 야율신을 죽인 자를 쫓아다니는 형편에서 더 많은 것을 바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아, 지겹다. 지겨워.”

검림에 와서도 흥미를 끄는 일은 없었다. 고수들의 대결을 보는 일은 그녀도 무인이기에 즐거운 일이긴 했으나 그녀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킬 종류는 아니었다. 바로 외롭고 쓸쓸한 감정을 채워 줄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검림에 와서도 대부분의 검객은 나이 지긋한 노중년의 사내들이었고 젊은 사람들도 성에 차는 인물이 없었다. 특히나 예의도, 부드러운 면모도 없이 검에 미친 자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잘생긴 사람 없나…….”

문득 초저녁 매화의 검향을 흘리던 영은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외모로는 그녀의 취향에 가까운 편이긴 했으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특히 도사라는 신분은 아무리 생각해도 재미가 없었다.

딱히 꼬셔 볼 의지가 생기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 이동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이틀이 더 흐른 오전, 진도건과 천서은은 떠날 채비를 마치고는 마지막 한 가지를 받기 위하여 서저위의 집을 찾아갔다.

양부인은 때마침 완성된 망건을 들고 흔들어 보이며 집에 들어오는 두 사람을 맞이했다.

“완성되었군요.”

“어제 자기 전에 딱 완성했지.”

그녀가 망건을 흔들 때마다 매달린 천서은의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양부인은 망건 윗부분의 내측에 천서은의 머리카락이 밖으로 빠져나오도록 꿰매었다. 그리고 다시 착용감을 보조하기 위하여 천을 덧대어 불편한 느낌을 줄여주었다.

망건을 본 진도건은 다시 천서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이 다시 눈길에 잡혔지만, 그것을 치우듯 얼굴을 그에게 돌리며 미소 짓는 모습에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서 착용해 봐요.”

진도건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천서은은 직접 착용시켜 주기 위하여 그의 뒤에 앉았다.

천서은은 진도건의 붉은 머리카락을 잘 모아 빗질까지 하면서 정수리 위로 올린 다음에 가볍게 묶었다. 그리고 매달린 머리카락을 신경 쓰면서 망건을 진도건의 이마에 둘렀다.

“원래 머리카락의 바깥으로 감싸듯이 섞은 다음에 상투를 틀면 돼.”

천서은은 양부인의 조언을 따라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묶었던 머리카락을 푼 다음에 망건에 연결된 머리카락까지 끌어올리면서 머리카락 뭉치의 바깥쪽으로 잘 섞이도록 하였다. 그렇게 꼼꼼히 모아서 상투를 세우고 모양을 정리하니 금방 완성되었다.

양부인은 진도건의 손에 거울을 쥐게 했다. 그리고 진도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망건으로 머리카락의 모양새가 깔끔하게 정돈되고 위로 보이는 상투 튼 머리는 과연 예상대로 천서은의 머리카락 때문에 붉은 기가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천서은의 머리카락 양이 진도건만큼은 아니더라도 두 사람 몫이므로 상투도 생각보다 묵직하고 길었다.

“괜찮은데요?”

“음, 그런가?”

“밖에 나가봅시다. 색이 얼마나 비치나.”

양부인이 문을 열자 진도건과 천서은이 밖으로 나갔다. 햇살 아래 피처럼 붉게 찰랑거렸던 머리카락이 상투로 정리하고 천서은의 머리카락을 섞어 놓으니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가까이서 유심히 봐야 보일락말락 했다.

“오오, 괜찮은데요?”

최현걸이 감탄하면서 다가왔다.

언제나 치렁치렁 머리카락을 길게 늘여놓고 다니거나 정리를 하더라도 한 번 정도 묶고 내려놓은 게 전부라서 상투 튼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의복을 색이 들어간 걸 좀 입고 머리카락에 상투관과 비녀까지 꼽으면 영락없는 귀공자처럼 보일 텐데,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너무 칙칙하다.”

최현걸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천서은은 조금 멀리 떨어져서 진도건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칙칙하고 단조로운 옷차림에 풀어헤친 머리카락인 모습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긴 했지만, 뭔가 멋진 품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투로 정리한 머리카락에 왠지 언젠가 보았던 고풍스러운 의복이 생각나 머릿속으로 덧입혀보니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좋아.”

“뭐가요? 설마 저게요?”

“후후! 그런 게 있어.”

최현걸의 물음에 천서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읍.”

최현걸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진도건에게 다가가 뒷짐을 진 채로 갖고 있던 삿갓을 내밀면서 그의 머리에 씌웠다.

“이게 낫다면 이해하겠수다.”

오죽(烏竹)을 갈라놓고 이를 엮어 만든 흑삿갓이 희미한 붉은 머리카락까지 모두 가리고 그늘로써 붉은 눈동자까지 가렸다. 검은 무복에 허리춤의 흑검까지 한 몸같이 어울리니 칙칙했던 차림새에 분위기라는 게 생겼다.

천서은도 최현걸의 선택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풍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고독한 검객 같은 느낌이 사는 것이 봐줄 만했다.

“어디서 났어?”

“노군도(盧群桃) 검객과 비무하고 나니 건량 좀 얻어먹는데 집 안에 삿갓이 그렇게 많더라고요. 진 대형이 상투 튼다는 말이 생각나서 하나 달라고 했지요. 구걸이 제 전문 아닙니까?”

노군도는 언제나 삿갓을 즐겨쓰면서 다닌 탓에 방립검사(方笠劍士)라는 별호가 있었다. 그는 삿갓의 원주인으로서 멀찍이 진도건의 차림새를 지켜보며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도건은 삿갓 앞춤을 살짝 들어 천서은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나쁘지 않네요.”

그때 매연선이 천서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 면사(面紗)가 달린 원립(圓笠)이 들려 있었다.

“자기도 이걸 써.”

“저도요?”

“굳이 숨기고 다닐 건 없지만, 예쁜 얼굴 너무 대놓고 드러내면 오히려 이목을 끌게 될 테니까. 적당히 감추면 귀족 가문의 여인처럼 보일 테니 저 친구를 호위무사로 삼고 나머지도 그런 수행원 삼아 일행을 구성하면 크게 눈에 띄지 않을 거야.”

“흐음,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천에 진입하기 전까지만 쓰시게. 중간에 괜히 정체가 드러나면 골치가 아프니 모두 평범하게 다니는 게 좋아.”

이야기가 길어지는 사이 어느새 훈수를 두는 제갈무문부터 강정학 등도 다섯 사람을 마중하기 위해 자리에 등장했다.

천서은은 그들을 흘끔 보고는 일행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