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70화 (170/432)

170화 - 제32장.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함께 (4)

* * * *

검총궁을 다시 복원하는 작업은 해가 거의 기울어 황혼에 이르자 중단되었고, 인부들은 근처에 쳐 놓은 천막으로 들어가 자기들끼리 먹을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검림에서도 그들의 요깃거리에 부족함이 없도록 재료들을 꾸준히 대어주었으니 꽤 호사를 누리는 셈이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 굽는 연기과 그 냄새가 산림 속 풀냄새를 차츰 덮어갔다.

절로 미각을 자극하는 냄새였지만, 옷에 배는 것은 싫었던 강정학이 손을 휘휘 저어 바람을 일으키면서 천막 사이를 지나갔다. 그는 인부들의 천막에서 좀 떨어진 채 뒷짐을 지고 복원 중인 검총궁을 올려다보았다.

안전과 기준점을 잡기 위한 나무 기둥들을 세우고 벽돌을 빚어 진흙과 함께 다시 쌓아 올리고 있었는데 대충 보기에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졸지에 아들 집에서 얹혀사는 꼴이 되긴 했지만, 곧 놈의 목을 치고 마교를 토벌하러 떠날 테니 다시 돌아오면 다 지어져 있겠구나.’

강정학의 시선이 문득 비스듬히 잘려나간 전각 상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몸이 가볍게 퉁! 하고 날아오르더니 그 잘린 단면에 부드럽게 착지하였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 단면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거침은 이 재질 때문이지 정말 깔끔하게 잘려나갔구나.’

시선은 잘린 단면에 머물렀지만, 그의 눈앞엔 그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피부의 솜털도 바짝 설 정도로 서슬 퍼런 감각이 오싹하게 달아올랐다.

‘……반응하지 못했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호신강기로 준비되었어도 위험했을지 모른다. 천무경 이놈… 진도건의 성장이 빨라지도록 계속 작두 위를 걷게 만드는구나.’

강정학의 검림과 금태하의 구룡문은 창천맹 가입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천무경은 금태하에게선 일찍 기대를 접은 데 반해 강정학에게는 줄곧 서신을 보내면서 관계 유지에 노력을 기울였다.

금태하와 강정학이 각각 거절한 이유는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금태하는 천무경 밑에 들어갈 수 없다는 지나친 자존심 때문이었으나 강정학은 본래 어디에 귀속되어 있는 걸 원치 않은 성격 때문이었다. 검림을 이끄는 것이 그의 최대치였고, 사패련 가입은 정파의 축이 무너진 상황에서 사파 무림의 정비를 위한 상징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었다.

정파가 마침내 부활했고 사패련은 창천맹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니 검림이 굳이 거기에 낄 이유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천무경은 자주는 아니더라도 두어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서신을 통해 중요한 내용을 전하기도 했고 잡담하듯이 시원찮은 내용을 전하기도 했다. 물론 강정학은 답장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정성이면 협력에 기꺼이 응할 마음이 들게 할 정도는 된 셈이었다.

여기서 작년 말과 올해 초에 보낸 서신에 그는 진도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서 새삼 기억이 나는 것이다.

‘진도건을 일부러 강자들에게 싸움을 붙여 재능이 썩지 않도록 자극했다고 하더니…… 천가 놈이 나까지 그런 용도로 쓸 줄이야.’

철면피처럼 그의 앞에서 당당히 웃음을 터뜨리는 천무경의 모습이 떠오르자 강정학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문득 양자성이 생각났다.

정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기에 기대도 컸다. 지금에 와서 진도건이 가진 것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강호의 역사 꼭대기에 이름 석 자 새기기에 지금 생각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남은 평생을 양자성을 가르치는 데 다 써도 좋다는 생각이 있었을 정도로 떠나버린 제자에 대한 배신감과 상실감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그 시린 마음을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정을 찾긴 했지만, 종종 이렇게 생각이 날 때면 아쉬움이 밀려오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응?’

그때 강정학의 시야에 한 사람이 잡혔다. 그가 올라오고 지나갔던 길을 따라, 냄새를 걷어내기 위해 팔을 휘휘 저으면서 검총궁 쪽으로 오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은 검총궁 위에 있는 강정학을 발견하고 포권을 취했다.

“총수님, 괜찮으시다면 감히 대련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진도건이나 양자성에 비교한다면 부족해 보이는 재능이나 그래도 그릇 자체는 충분히 크다는 느낌이 들었다.

진도건과 양자성이 장작과 공기를 먹이 삼아 폭발적으로 피어오르려는 불꽃이라면, 저 아래에서 차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영은성은 긴 시간 동안 비바람 아래 천천히 줄기를 세우고 가지를 뻗어 마침내 돋아난 꽃봉오리를 터뜨릴 매화꽃이었다.

고지식한 성격은 그와 차이가 있었으나 태도에 기품이 있고 명성에 주눅 들지 않아 기꺼이 물어올 수 있는 용기는 강정학 자신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도 천가 네놈이 의도한 것이냐?’

강정학은 검총궁에서 뛰어내려 영은성 앞에 떨어졌다. 영은성이 포권과 함께 고개를 숙여 다시 예의를 갖추자 강정학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고작 하루만인데 내게 뭘 보여 줄 게 있느냐?”

“……당장은 없지만, 모든 걸 쏟아내고 나면 절 옥죄는 안 좋은 것들을 한 꺼풀 정도는 벗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굳게 다문 채 크기만 키워가던 꽃봉오리가 마침내 꽃잎 한 장을 열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좋다. 따라와라.”

먼저 움직이는 강정학을 좇아 두 사람이 다시 선 곳은 바로 어제 검총궁 옆에서 강정학을 상대로 검법을 펼쳤던 그 자리였다.

“오너라.”

“여기서 말입니까?”

영은성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인부들의 천막이 있었고 지금도 돌아다니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정말 전력을 다해볼 생각이기에 자칫 파장이 저들에게 미쳐 다치는 자가 나올 위험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강정학이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네가 저들을 등지고 있고, 상대할 사람은 오직 나뿐인데 저들이 다칠 거라고 염려하는 게 어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더냐?”

영은성은 거기서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이곳에 올라왔으나 그것이 헛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정파는 그것을 일종의 규율이라고 얘기하고, 사파의 것은 사특하다고 깔본다. 그러나 사파는 그것을 일종의 효율이라고 얘기하고, 정파의 것을 겉멋이라고 무시한다.

옳고 그름의 차이에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기준이란 상대적이고 여러 가지 상황에 맞게 시시각각 변해야 한다.

매화검법.

정파의 관점에서 그들은 뿌리부터 단단하고 사방으로 힘차게 가지를 뻗어내어 흐드러지게 꽃이 핀 매화나무를 그린다. 그리고 사파의 관점에선 그저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고, 나비와 벌을 꾀어내고 사람을 홀릴 정도로 진한 향기를 흘리는 매화 한 송이면 족한 것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을 따질 이유는 없다.

개인 수련을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시연을 하거나, 혹은 다수의 적을 상대한다면 단단한 뿌리가 필요하다. 든든한 줄기가 필요하다. 힘차게 사방으로 뻗는 가지도 필요하고, 수많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야 한다.

하지만, 한 명을 상대하거나 소수를 상대할 일이라면 그리고 그 가운데 주변에 다쳐선 안 될 사람이 그득하다면 지금은 그저 아름답고 향기 진한 한 떨기 매화 한 송이만 제대로 피워내도 충분한 것이다.

아아! 이 쉬운 이치를 정사의 치우친 기준에서만 생각했으니 그동안 얼마나 한심했을까?

“가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뽑는 영은성의 눈빛이 형형하다.

강정학은 그가 진실로 준비가 되었음을 깨닫고 기꺼이 검을 들었다. 그리고 오로지 영은성만을 향해 거대한 투기를 뿜어내었다.

찌릿찌릿!

삽시간에 온몸을 옥죄어오는 그 투기의 바늘들 속에서 영은성이 의연하게 검을 떨친다.

매화검법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폭발적으로 솟구치는 자하신공의 기운이 일검에 집중하며 선명한 분홍빛 검기와 함께 일어난다. 본래 따르던 여기저기 찔러보는 초식의 동작들을 버리고 오로지 강정학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정신을 집중한다.

그의 온몸을 타고 매화꽃들이 피어나며 휘몰아치나 그것은 오직 강정학을 향해 날아들 뿐이다.

본능적인 반응이 그의 온몸에 깃들고 검에 깃든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강정학의 검영에 아랑곳하지 않고 피할 것, 취할 것 냉정하게 구분 지어 위험 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한 그루 매화나무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양만을 바라보고 모든 가지와 모든 꽃을 뻗어내는 춤을 추는 듯하다. 그 풍성한 꽃다발이 모이고 더 모여 시야를 꽉 채울 만큼 선명하고 거대한 한 송이 꽃을 피워내니 이를 마주 보는 강정학도 감회가 새롭다.

채채채채챙!

연신 맞부딪치는 금속성은 희한하게도 귀를 날카롭게 찌르지 않고 마치 금(琴)의 현(絃)을 튕겨 나오는 운율의 악곡(樂曲)처럼 들려온다. 그리고 청송만이 그득한 이 팔공산 정상 검총궁 부근엔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는 매화향(梅花香)이 은은하게 퍼진다.

그 향기에 무의식적으로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영은성과 강정학이 어울리는 검무를 무리 지어 바라보는 평범한 인부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림 고수들이 검기를 일으키며 격렬하게 부딪치고 있었으나, 한낱 범부(凡夫)들의 시선엔 그저 아름다운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풍류를 즐기는 검선의 모습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인부들이 떠나지 않은 팔공산 정상 검총궁에서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놀라 올라온 사람들은 범부들 뒤에서 멍하니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함께 온 진도건, 천서은, 최현걸, 야율균은은 모두 한마음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검림의 검객들은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름답게 피워 낸 매화꽃들 사이로 영은성이 흘린 땀방울이 흐르는 황혼의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면서 진한 분홍 매화 물결을 화려하게 꾸민다.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도혁도 술에 취한 듯 검향(劍香)에 취해 기분이 달아오르니 그의 입에서 시가 줄줄 흘러나온다.

衆芳搖落獨暄姸(중방요락독훤연) 뭇꽃들이 모두 졌는데도 홀로 곱게 피어나서

占盡風情向小園(점진풍정향소원) 작은 동산의 아름다운 풍광 독차지하였구나.

疏影橫斜水淸淺(소영횡사수청천) 성긴 매화 가지를 물속에 비스듬히 드리우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그윽한 매화 향기 흐릿한 달빛 속에 퍼져나네.

霜禽欲下先偸眼(상금욕하선투안) 겨울새는 내려앉으려고 눈길 먼저 슬쩍 주고

粉蝶如知合斷魂(분접여지합단혼) 나비들도 매화를 안다면 넋을 놓고 말겠구나.

幸有微吟可相狎(행유미음가상압) 다행히 나직이 시 읊조리며 친할 수 있으니

不須檀板共金尊(불수단판공금존) 멋진 장단과 좋은 술이 없어도 상관치 않으리.

“시 구절이 참 아름다워요. 무슨 시인가요?”

“매화를 아내처럼 좋아했다는 군복(君復) 임포(林逋) 선생의 시, 산원소매(山園小梅)다. 깨달음을 얻은 영 도사를 보고 있으니 임포 선생을 향해 소동파(蘇東坡)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구나. 아마…… ‘정신이 맑고 기개는 냉정하여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라고 했다지?”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은성에게도 정말 딱 어울리는 말이에요.”

“녀석은 강호의 명예도 혹은 어떤 실리도 원하지 않죠. 그저 화산파의 기상만을 생각하는 고지식한 놈이지만, 또 보고 있으면 심원한 취향을 추구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영은성과 가장 사이가 가까운 최현걸이 진심이 담긴 말을 내뱉었다.

강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시에서 드러나는 임포 선생의 철학과 맞닿아 있구나. 이건 마치 임포 선생이 이 시대로 돌아와 검객으로서 환생한 게 아닌 거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천서은이 최현걸을 쿡쿡 찔렀다.

“개방의 정보망을 이용해 오늘의 이 감상을 천하에 퍼뜨리는 게 어때?”

“좋은 생각입니다, 형수님. 뭐라고 뿌릴까요?”

강도혁이 옆에서 거들었다.

“임포 선생이 이 시를 쓰고나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구절에 들어간 소영(疏影)과 암향(暗香)은 매화를 상징하는 시어(詩語)가 되었다. 오늘의 일을 기리면서 이참에 영 도사의 별호를 암향소영(暗香疏影)이라 짓는 것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진도건, 천서은, 최현걸, 야율균은이 기막히게도 뜻이 맞아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은 검객들이 없었다.

가까이 있던 어느 한 검객은 이리 소리쳤다.

“키야! 지금도 검향의 풋향기에 이리 기분이 취하는데, 세월에 농익으면 대체 얼마나 더 취하게 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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