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69화 (169/432)

169화 - 제32장.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함께 (3)

* * * *

서저위의 아내 양(羊)씨는 손재주가 아주 좋았다. 바늘과 실만 있으면 만들지 못하는 게 없다고 생각이 들 정도이니 천을 다뤄야 할 일이라면 검림 마을의 여인네들은 모두 그녀를 찾는다고 한다.

“어머! 멀리서 봐도 참 신기하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너무 아름답네.”

양부인은 연신 진도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눈빛을 반짝였다.

“야이 여편네야, 남사스럽게 그만 만지작거리고 생각나는 방법 있으면 좀 얘기해 봐.”

“당신도 봐봐. 햇빛에 빨갛게 반짝반짝하는 거 좀 보라고. 세상에! 머리카락에 꽃 핀 거 같아.”

“흥! 꽃은 무슨. 피 뒤집어쓴 거 같구만.”

서저위가 코웃음을 취재 일순 차갑게 얼어붙은 양부인의 눈길이 그를 향해 쏘아졌다. 무심코 눈을 돌리다가 양부인의 그 눈빛을 받은 서저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었다.

“당신 굶고 싶지?”

“……연선이네 가서 얻어먹으면 되지.”

“과연 먹여 줄까?”

“끄응…….”

“굶기 싫으면 그만 투덜대고 조용히 있으셔?”

서저위는 입술을 질끈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손가락을 입 앞에서 꼼지락거리면서 묶는 시늉도 했다.

그 모습에 천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서 검객님은 검림의 사위 중 한 사람인데 꽉 휘어잡으셨네요.”

“밖에서나 사위검총이라고 왕처럼 떠들어대도 집에선 내가 왕이니 말을 들어야지. 그렇게 밖으로 싸돌아다니면서 부인 옆자리 찬바람 들어오게 했으면 잔뜩 구박받아도 면목 없어야 하는 거야.”

“크흠!”

양부인의 면박을 주는 듯한 이야기에 서저위가 헛기침했다.

천서은이 진도건을 툭 건드렸다.

“들었죠?”

“제대로.”

“잘해줄 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잘 해줘요. 이렇게 아름다운 처자 붙잡았으면 한눈팔 생각하지 말고.”

양부인이 진도건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말했다.

여자가 양쪽에서 말로 옥죄니 진도건은 연방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양부인은 만지작거리던 붉은 머리카락을 두 손안에 잘 담아내어 돌돌 말더니 진도건의 머리 위로 올려보았다.

“상투를 트는 게 어때요? 머리 위로 상투를 틀고 망건(網巾)을 써서 정리합시다. 망건에 검은 머리카락을 함께 달아 가발(假髮)처럼 함께 상투를 틀면 붉은 모발 색을 희석할 수 있어서 괜찮을 것 같은데?”

“좋은 생각인데요?”

“온주윤(瑥周倫)이가 망건 몇 개 갖고 있을 거다.”

천서은이 호응하자 서저위가 바로 얘기를 꺼냈다.

“하나 가져와 봐요.”

“알았어.”

서저위는 냉큼 문 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와서는 양부인에게 망건을 건네주었다. 앞쪽의 이마 부분은 말총으로 엮어 반투명한 망사로 되어 바람이 잘 통하게 되었고 뒤통수 쪽에는 머리에 쓴 갓이 바람에 뒤로 넘어가지 않도록 해 주는 풍잠(風簪)도 달려있었다.

“질 좋은 놈이네. 여기다 머리카락들을 좀 꿰매어서 함께 상투를 틀면 딱이지.”

“그럼 제 머리카락을 잘라주세요.”

“서은.”

진도건이 놀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천서은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웃으면서 그를 마주 보았다.

“왜요? 머리카락엔 사람의 영혼이 깃든다고 하는데, 여기에 사용하면 왠지 계속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겠어요?”

“검은 실을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머리카락과 실은 달라서 많이 어색할 거야.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오히려 눈길이 갈 텐데, 감시자들이 있다면 금방 탄로 나지 않겠어?”

서저위의 말에도 일견 일리가 있어서 진도건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천서은은 아주 밝은 표정을 하면서 그를 되려 위로해 주고 있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머리카락이 짧으면 그것대로 편하기도 하고, 또 1, 2년 기다리면 어차피 다시 길어질 텐데요.”

“미안해서 그렇지.”

진도건의 표정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천서은이 머리카락을 한 번도 자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길이를 조절하기 위해 다듬는 수준일 뿐으로 언제나 아름다운 긴 머리를 고수해왔었다. 또 중원의 여인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기 괜찮겠어?”

“괜찮아요, 정말. 말 나온 김에 지금 잘라볼까요?”

“후우……!”

천서은의 너무나도 시원스러운 대답에 진도건은 미안한 마음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천서은은 웃으며 그의 무릎을 손으로 탁탁 두드렸다.

양부인은 거울과 단도, 머리끈을 가져왔다. 천서은이 거울을 들어 얼굴을 비추자 양부인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 감싸 쥐어 천천히 끌어올렸다. 아래로 길게 늘어졌던 머리카락들이 굴곡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굴곡의 가장 아랫단이 어깨보다 조금 위에 이르렀을 때, 양부인은 올리던 걸 멈추었다.

“이 정도 길이가 올 수 있게 자르자고 그럼. 조금 어색하긴 하겠지만, 잘 정리하면 자기 미모가 받쳐 주니까 그래도 이쁠 거야.”

“호호! 정말요?”

“그럼. 내가 또 솜씨가 좋잖아. 이 양세화(羊細華) 한번 믿어 보라고?”

“후후! 잘 부탁드려요.”

천서은이 바로 대답하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고 진도건은 착잡한 표정으로 이를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양부인은 머리카락 길이를 가늠하고는 그것보다 조금 길게 붙잡아 머리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그 윗부분을 단도로 조금씩 잘라내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땐, 차마 못 보겠는지 진도건이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릴 정도였다. 물론 손가락 틈을 벌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오른쪽에서부터 가운데, 왼쪽까지 차례대로 잘려나가면서 묶음에서 풀려난 머리카락이 찰랑거려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리가 덜 되긴 했지만, 그런 단발머리를 해도 그녀의 미모는 오히려 죽기는커녕 더욱 활기를 얻으며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오오……!”

남의 일처럼 지켜보던 서저위도 생각보다 아름다워 감탄할 정도였다. 물론 양부인의 눈총을 받고 깨갱 하여 금방 시선을 돌리긴 했지만 말이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던 천서은이 흡족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바로 진도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짧아진 머리카락이 힘차게 흔들렸다.

“어때요?”

“이뻐. 이뻐서 더 슬프네.”

“이뻐서 기쁘다고 하는 게 더 듣기 좋을 거 같은데요?”

“응. 이뻐서 기뻐.”

천서은이 싱긋 미소를 지으니 진도건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양부인은 조심스럽게 단도를 들어 천서은의 머리카락 끝부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풀어내었을 때 더러워 보이지 않도록 머리카락 끝단의 길이를 맞추고 나니까 더욱 미모가 살아났다.

“마음에 들어요, 언니.”

“솜씨 괜찮지?”

“감각 있으세요.”

양부인은 한쪽에 잘라내었던 긴 머리카락과 망건을 잘 모아놓고, 바닥에 떨어진 잔 머리카락들을 쓸어 정리했다.

“사흘 뒤에 떠난다고 했지? 그 전에 충분히 완성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나가서 바람 좀 쐬어.”

“고마워요.”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서저위 부부에게 인사를 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내리쬐는 봄의 햇살과 시원한 바람에 찰랑이는 짧은 머리카락은 진도건뿐만 아니라 뭇 사람들의 시선을 한꺼번에 받았다.

천서은에게 나타난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목봉을 들고 비무를 하며 초식을 겨루던 최현걸도 시선을 빼앗기는 바람에 맹주태가 휘두른 목검에 엉덩이를 얻어맞을 정도였다.

“아오! 아파라.”

최현걸은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 엉거주춤 진도건과 천서은에게 다가왔다. 그는 천서은을 보면서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와! 이게 무슨 일이래요?”

“어때?”

최현걸은 눈동자를 돌리며 진도건과 천서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엄지를 척 내밀었다.

“형수 미모가 가히 미쳐 버렸네요.”

“가벼운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은 것 같아.”

“대형은 별로입니까?”

“미안해서 그렇다.”

최현걸이 피식 웃고는 코웃음까지 치며 뒤돌아섰다.

“배부른 소리 하십니다그려. 안 그렇습니까, 맹 선배?”

“아아! 배가 디비져 쳐 불렀지.”

맹주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도 터져 나오고 야유소리도 들려왔다. 마을 사람들과 검림 검객들의 반응에 진도건이 멋쩍게 웃고 천서은도 방긋 웃었다.

그녀가 목을 긁적거리자 힐끔 쳐다본 진도건이 그녀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좁쌀만 한 머리카락들이 조금 목에 묻어 있었는데 그게 간질거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진도건이 그것들을 털어내니 천서은이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진도건도 계속 착잡한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는데 줄곧 미소만을 보여 주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이 달릴까요?”

“그래.”

천서은과 진도건은 함께 경공을 펼쳐 마을을 벗어나 팔공산에 올랐다. 검총궁이 있는 봉우리는 인부들이 들어와 시끄럽게 작업 중에 있었으니 두 사람은 다른 봉우리에 올라갔다.

가끔 천서은의 뒷모습을 좇아서 경공을 펼칠 때면 맞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이 마치 검은 융단이 찰랑거리는 듯하여 참 보기 아름다웠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 정도로 머리카락이 짧았던 적이 없었을 터라 분명 상실감 같은 것이 없을 수 없었다.

마침내 봉우리 정상에 올라 탁 트인 풍경을 맞이하자 그 가운데서 천서은이 눈을 감고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시원하게 부는 산바람을 기대했는데 의외로 고요하자 천서은이 울상을 지으며 진도건을 돌아보았다.

“흐잉! 시원한 바람을 기대했는데 안 부네요. 또 달려야 되나?”

진도건은 잠시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리고 손을 가볍게 위로 들어 올리니 선인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적당한 세기로 불어오는 바람에 천서은은 다시 눈을 감고 시원한 기분을 만끽했다.

“맞아요. 저라고 어떻게 아쉽지 않겠어요? 어릴 때부터 정성 들여 관리해 온 머리카락인데. 하지만, 도건도 느끼고 있죠?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려야 할 일들 속에서 같이 싸우지 못할 일들도 분명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천서은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 회전에 맞추어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면서 햇빛에 반짝거렸다.

싱그러운 미소와 어울려 한 떨기 백합꽃이 핀 느낌이다.

“도건도 그렇겠지만, 지난 3년간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조금도 떨어지기 싫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그랬어요.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면 머리카락을 자른 아쉬움보다 더 힘이 되지 않겠어요?”

진도건은 착잡했던 표정을 거두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진심 어린 사랑을 불필요한 감정으로 어찌 어질러 놓을 수 있겠는가?

천서은의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진도건의 염력에 그녀의 몸이 지면에서 살짝 뜨더니 그대로 천천히 날아와 팔 벌린 그의 품에 안겼다.

“후후! 이거 신기한 기분이네요.”

염력에 떠오른 기분이 좋았는지 천서은이 더 밝게 웃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꼭 안으면서 앞에 내려놓은 진도건은 그녀의 이마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나도 뭘 하나 주고 싶은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머리카락을 자를까?”

진도건의 말에 천서은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손을 허리띠 쪽에 가져가 거기에 달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다시 꺼낸 그녀의 손에는 작은 손수건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진도건의 눈앞에 펼쳐보았다.

조금은 색이 바랬긴 했으나 초록의 수풀, 하얀 꽃들과 그 위로 날고 있는 노란 새까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겨 놓은 유일한 유품.

천서은에게 맡겨 놓았던 그것.

“전 이게 있어서 괜찮아요. 머리카락보다 이게 더 끈끈한 느낌이 들거든요.”

천서은은 그것을 줄곧 소중히 간직해 오고 있던 것이다.

진도건은 손수건을 쥔 그녀의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잠깐 거기에 시선이 머무르니 뭉클해진 감정에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줄곧 착잡함에 쌓여갔던 슬픈 감정이 어머니의 손수건으로 인해 조금 터져 나온 것이었다.

천서은은 손수건으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목을 끌어안으며 다시 입 맞추었다.

두 사람의 입맞춤이 조금 전보다는 더 길게 이어지며 위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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