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68화 (168/432)

168화 - 제32장.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함께 (2)

“한중도 어지러울 텐데 문제는 없겠습니까?”

“마교도를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당문주를 만나기 전까지 충돌은 피하는 게 좋다. 적들이 사천을 포위하는 건 내부로 고수들이 침투하는 걸 경계하기 때문이니까. 특히 진도건 자네는 머리카락을 가리고 다녀야 할 걸세.”

제갈무문의 살짝 위를 보고 내려오는 시선의 움직임에 진도건은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흐린 날이나 밤에는 그래도 티가 덜 나는 편이지만, 날이 맑아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거나 달 밝은 밤이라면 피처럼 붉은색이 고스란히 휘날렸다.

그걸 본 서저위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 아내가 바느질 등 손재주가 좋은데 한 번 상의를 해 보지.”

“알겠습니다.”

제갈무문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손에 들린 말은 두 개, 그중 하나인 검(劍)이라 새겨진 장기 말을 안휘 검림 본거지에 놓았다. 그리고 강서, 호남 경계에 녹(綠)이라 새긴 장기 말을 놓았다.

“다섯 사람이 출발하는 날, 검림은 장강을 따라 호남으로 내려가 동정호에서 개방의 비호를 받아 장가계(張家界)를 통과, 범정산으로 확인된 염황종, 염황문의 본거지를 칠 것입니다. 그리고 염황신마를 잡아내겠습니다.”

염황신마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강정학을 위시한 검림의 수장들에게서 은근한 투기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피의 복수를 결행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공유하는 것이다.

검 장기 말을 그렇게 귀주 범정산에 끌어다 놓은 제갈무문은 다음으로 녹 장기 말을 끌어 범정산 옆 귀주 지역의 산지 위에 놓았다.

“여기서 녹림은 휘하 산채 산적들을 이동시켜 귀주 전역을 포위함으로써 염황문의 퇴로를 차단할 것입니다.”

“내부 침투한 마교도들은 해결했다고 하나요? 녹림의 운용에 있어서 그게 걸림돌이었잖아요.”

매연선의 물음에 제갈무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태소가 미끼가 되어 주동자들을 소탕할 수 있었네. 끄나풀들도 색출 작업에 들어가서 정리했고. 정보가 새어나갈 일이 거의 없을 걸세.”

“주태소?”

진도건의 귀가 쫑긋하며 반응했다. 나름대로 인상 깊은 인연이었던지라 그를 포함해 천서은의 얼굴에도 꽤 반가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아, 지난번 마교도 소탕 이후로 녹림 내 신망이 두터워졌네. 그전에는 낭아도라는 무명으로 불렸다면 지금은 아랑도위(餓狼刀衛)라고 불리네. ‘굶주린 늑대, 녹림을 지키는 칼’이라고 말이야.”

“호호호호! 독특한 사람이었는데 딱 어울리는 별호를 얻었네요.”

천서은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튼 그는 이미 세력을 분산시켜 천천히 이동하고 있으니 자네들도, 검림도 기일을 잡고 이동하면 되네.”

“언제 출발하면 됩니까?”

“사흘 후. 그때까지 개인적인 준비들을 철저히 하게.”

최현걸의 물음에 제갈무문이 대답했다. 그리고 이어 강도혁이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염황종을 잡아내면 다음은 무엇이오? 구룡문의 움직임과 맹의 지원도 중요하지 않소이까?”

“광혈종과 구룡문 양쪽을 주시하고 있지만,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 쉽지 않습니다. 특히 구룡문이 맹의 지원을 거절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때맞춰 지원할 수 있도록 창천단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데 기본적인 거리도 있어서 일부러 인원을 분산시켜 인근 지역으로 움직여두라 지시를 올렸습니다.”

강도혁이 강정학을 보았다.

“아버지, 금태하는 왜 맹과 소통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사패련주씩이나 했으면 연합체의 중요성을 모르진 않을 텐데.”

“흥! 그 작자는 사패련주에 있을 때부터 철저하게 연합에 가입한 문파들을 모두 발아래로 보았던 위인입니다. 천 맹주 밑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리는 거겠죠. 오죽하면 련주직을 던지면서 사패련의 대부분 자산과 인력들을 구룡문으로 갖고 튀었겠습니까?”

강정학이 답하기에 앞서 이현탁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검림을 대표하여 사패련 소속으로 일했던 한 사람으로서 금태하가 사패련에 끼친 해악을 가까이서 지켜본 장본인이었다. 그는 이른바 폭군(暴君)이라 불릴 만했으니 사실상 그의 대에서 사파의 결속이 무너졌다고 볼 수 있었다.

강정학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금태하가 확실히 안하무인이긴 하지. 그도 젊은 나이에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 자기보다 어린 천무경이 더 강호의 주목을 받으면서 열등감이나 자격지심 같은 걸 갖게 되었을 거야. 나이를 먹고 나서는 각자 세력의 수장이 되면서 책임 때문에 충돌을 피하긴 했으나 젊을 때는 둘이 곧잘 싸우기도 했네. 금태하가 나이가 몇 살 더 많고 똑같이 천재 소리를 들었는데도 팽팽하거나 나중에는 천무경에게 밀린 감이 있었으니 자존심에 상처가 많았겠지.”

“그래도 천하오절 안에서 세 번째로 평가받는 자이니 어떤 상황이 되었든 돌발적으로 움직이더라도 광혈신마를 잡아준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광혈신마는 소요자에게 쫓겨 달아났었으니 금태하라면 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갈무문은 당연한 논리라고 생각하여 편한 얼굴로 물었지만, 강정학은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제갈무문은 조금 불안해져 다시 묻는다.

“총수께선 불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내가 답하지 않아 자네를 불안하게 했나 보군.”

“가뜩이나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모르는 자인데, 실력이 불확실하다면 조금 곤란해서 말이지요. 물론 제가 감히 화경의 고수들 수준을 뭐라 평가할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강정학이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금태하의 무공은 확실히 고강하네. 오절로서 같은 지위로 평가받는 구치상도 그에겐 한 수 접어줄 정도니까. 그에게 막대할 수 있는 사람은 중원 무림에선 나와 천 맹주 정도일 게야.”

“그렇다면 다행이구요.”

“다만 이런 건 있지. 소요자는 태극검선이라는 별호답게 무당의 전설적인 무공인 태극혜검을 성취해냈다고 알고 있네. 태극혜검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 위력을 갖고 있지만, 특히 사마(邪魔)를 멸하는 공능은 절대적이라고 들었네. 만약 광혈신마가 마공의 사특함에 의존하는 자라면 상성 상 불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네.”

“흐음…….”

제갈무문의 신음이 길어졌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건 구 단주에게 미리 얘기를 해 두어야겠습니다.”

“차라리 소요자를 움직이게 하는 게 어떤가? 무당파는 구룡문과 같은 호북 지역의 문파이니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텐데.”

“금태하는 그를 적으로 여길 겁니다.”

“하긴 그렇지. 쯧쯧!”

강정학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혀를 찼다.

제갈무문은 장기 말 두 개를 집어 사천과 호북 접경 지역에 놓았다. 하나는 구룡문을 뜻하는 용(龍)의 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창천맹과 창천단을 뜻하는 창(蒼)의 말이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염황종과 광혈종 사이 고리를 끊고 유사시를 대비할 수 있는 자를 이동시키도록 하죠.”

제갈무문은 장기 말 하나를 귀주와 호북으로 나누어진 두 묶음 사이에 놓았다. 중(中)이라 새겨진 장기 말이었다.

“중천. 철권왕, 철갑권왕이라고 불리는 안효철의 낭인단입니다. 은밀히 이동시키기 좋지요.”

“적당하군.”

강정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안효철이란 사람도 만나보셨나요?”

천서은이 중천의 장기 말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 번 만나봤지. 박투술의 파괴력은 천무방의 백두기와 비견될 만하네. 다만 안효철이 백두기보다 조금 더 평가를 받는 건, 어쨌든 낭인이라는 역부족한 배경에서 늦게라도 홀로 화경 초입에 진입한 데다가, 그는 신물(神物)이라 할만한 걸 갖고 있어서 이 나라도 그를 어떻게 제압은 할 수 있어도 쉽게 벨 수는 없다.”

“신물이요?”

“천자철갑. 재질 자체는 운철(隕鐵)과 현철의 합금으로 알려졌는데 어떻게 만든 물건인지 자체적으로 반탄력까지 보유하고 있어서 뚫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탄의 충격까지 감내해야 하네. 게다가 그 반탄력이 제 주인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으니 신물이라고 할 수밖에.”

“세상에! 그런 것도 존재한답니까?”

“하하하. 놀랍긴 하지. 더 높은 강도의 금속을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지 않는다면 뚫을 수 없을 것이요, 안효철 본인도 강기를 다루니 평범한 검강으로는 그를 꺾기 힘들어.”

천자철갑의 소문은 사실 여러 가지 과장되었다고 여길 만한 이야기가 많았다. 강정학도 외견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현실적인 소문만 취합해서 판단하는 편으로 그 실체에 대해선 잘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중천은 개방뿐만 아니라 하오문과도 긴밀히 소통하고 있으니 대응할 수 있다면 안효철에게 그 임무를 맡기겠습니다. 다만 이것도 비상시의 움직임으로 만약 상황이 저희의 뜻대로 정리되었거나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그들은 예정대로 사천으로 이동할 겁니다. 즉, 저희와 구룡문이 마교의 시선을 끌어주는 사이에 진도건 일행이 북에서 침투하듯 그들도 동에서 침투하는 것입니다.”

“구룡문이란 변수만 어떻게든 해결하면 문제는 없겠군.”

“그다음은 적룡마종이 벌이는 군세의 예봉을 꺾고 저희가 놈들을 토벌하여 서진하는 것입니다.”

“두근거리는군요.”

“전장을 중원 바깥으로 두어야 민관의 피해가 덜할 테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중원에서 뭔가 터지진 않겠지요?”

제갈무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동안 창천맹이 가장 노력을 기울여 온 부분이 바로 그것이네. 맹이 중심이 되어 정사 모든 문파를 연결하여 대응하고 안효철로 하여금 중천을 조직한 것. 다시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한 개방을 이용하여 중원 내에 스며든 마교도들을 꾸준히 소탕해왔다네. 이제 가장 취약점인 사천 지역을 해결해야만, 집중된 전력으로 새외의 마교 놈들과 싸울 수 있게 되는 거라네.”

3년이란 시간 동안 진도건과 천서은이 각자의 싸움을 해왔다면, 천무경이 맹주를 맡은 창천맹과 정파, 사파의 강호 무림은 중원 전역에서 많은 싸움을 해왔다.

많은 견제를 받던 사천의 세 문파를 제외한다면 중원의 정파들은 대개 다시금 세력을 구축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개방과 하오문의 정보력을 동원하여 중원에 스며든 마교도들을 정리하기 위한 작업을 거쳐왔는데 여기에 많은 사파 문파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였다. 정파들이 안정적으로 힘을 키울 수 있도록 대신 희생한 것이었다.

사패련의 주축을 이루었던 두 문파인 칠성파와 서호항가는 지리적으로 마교와 가장 정반대에 있는 만큼 이런 일에 가장 많은 힘을 보탠 문파들이었다.

칠성파 문주 구치소는 갖은 불만을 쏟아냈지만, 자신보다 강한 동생 구치상이 천무경에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지원한 우스운 상황도 있었다. 서호항가 가주 항연은 무가로서의 입지까지 구축하기 위해 아들 항수를 천무방 입방시키는 대가를 얻어내었다. 그리고 항수는 적멸당에까지 들어가면서 백두기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런 이해관계까지 동원되면서 꾸준히 일을 처리해 왔으니 현시점에 이르러서 줄곧 웅크려있던 창천맹은 마침내 마교와 제대로 전쟁을 치르기 위한 기지개를 켜는 셈이었다.

‘흐음……!’

조용히 제갈무문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도건은 묘한 두근거림과 긴장감을 느끼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는 걸 느끼기도 했는데 그만큼 본능적으로 그에게 있어 중요한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는 것이다.

상상 이상의 대적(大敵)들, 자비 없는 생사(生死)의 기로, 헤아리기 어려운 계략(計略)의 파도와 보이지 않는 심연 속 잠재하여 끊어낼 수 없는 인과의 필연(必然)이 등골을 타고 올라와 그의 영혼에 문을 두드린다.

팔과 옆구리 사이로 들어오는 손길이 느껴졌고 이윽고 손깍지를 끼며 맞잡았다. 그 손부터 시작하여 시선을 돌린 곳에는 바로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봐 주는 천서은이 있다.

잠깐의 눈 마주침 속에서 진도건은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을 남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