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제32장. 이렇게라도 계속해서 함께 (1)
밤이 깊숙이 찾아오고 반월이 수풀 사이로 어스름 달빛을 비추었다.
최현걸도 딱히 어디 있는지 확신을 하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멀리 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검총궁이 있던 정상 옆 봉우리의 산길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 오르자 숲을 이루는 나무들이 점차 뜨문뜨문해지면서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명상하는 건가?”
납작한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영은성의 뒷모습을 보면서 최현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게 비스듬히 둘러 걸어가면서 옆모습을 살핀 최현걸은 달빛 아래 뜬눈으로 멍하니 있는 걸 발견했다.
“뭐 하고 있냐?”
최현걸이 잠깐 기다렸으나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그가 영은성이 앉아있던 바위 위로 올라와 옆에 따라 가부좌를 틀고 앉을 때까지도 영은성은 돌아보지 않았다.
최현걸도 가만히 두 손을 단전 앞에 모으고 영은성을 따라서 전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흐음…….”
적당한 구름 사이로 어스름한 달빛과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까지, 크게 기분 다칠 일 없던 최현걸이 느끼기에도 기분 전환이 될만한 날씨였다.
거의 일다경 동안 두 사람은 그렇게 앉은 채 바람을 쐬었다.
운기조식도, 명상도 아닌 그저 멍하니 있는 헛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영은성에겐 복잡한 머릿속과 꽉 막힌 가슴을 비워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왜 왔어?”
“저녁도 먹으러 안 내려오니까 궁금해서 찾아왔지. 충격을 받고 어디서 뛰어내린 건 아닌가 걱정도 되고.”
“잘도 농을 거네.”
영은성이 미소를 보이자 최현걸도 피식 웃었다.
“예전에 수련하다가 잘 안 풀리면 진 대형이나 나와 대련하곤 했는데, 그렇게 하면 좀 풀리지 않을까? 한 판 어때?”
“그래도 예전엔 자네와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 정도도 못 할까 봐 자신 없군.”
“진심이냐?”
“후후! 진심이었다.”
“……이었다?”
영은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엉덩이를 털었다. 체중에 꽉 눌려서 도포 자락 사이사이 끼어있던 흙먼지들이 그의 손길에 피어올라 최현걸의 눈앞을 덮었다.
“콜록콜록! ……야!”
“아하하하!”
느닷없는 봉변에 최현걸이 연신 기침을 하며 짜증을 냈다. 대신 그 모습은 영은성에게 작은 웃음을 안겼다.
최현걸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포함한 몸 여기저기를 털어대며 바위에서 내려왔다.
“정말 괜찮냐?”
툴툴대듯이 물었지만, 그 함의엔 걱정이 다분했다.
“걱정하지 마라. 그저 준비가 필요할 뿐이니까.”
“무슨 준비?”
“……마음의 준비.”
산에서 내려가는 영은성의 뒷모습을 보면서 최현걸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곧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툴툴거린다.
“갖은 자세는 다 잡고 나와서는 뭐? 고작 마음의 준비? 에라이,”
영은성은 강정학의 이야기를 듣고 깊이 생각했었다. 그리고 정말 많은 고정관념이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이 무공 사용에 대한 태도까지 전염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화산파의 정의는 악을 징벌하는 의협이다. 그것은 연화봉에 오르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시절부터 가르침으로써 이어져 내려온 가치였다. 그리고 같은 현실 속에서 매화검법의 정통을 이어받아 후대에까지 전해야 하는 마땅한 책무가 공존했다.
현학적이고 정석적인 초식의 습득은 가르치기에 좋을 수는 있어도 협을 행하기 위한 투쟁 속에선 지나치게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이는 어쩌면 사파가 가까이 두는 효율과도 연관되어 있으니 분명 구치상부터 시작해서 강정학이 지적하는 것들은 그런 그의 중심을 이루는 가치관을 흔드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거기에 타고난 정직함이 더해졌으니 전통의 계승자로서의 근본은 훌륭하나 난세의 효웅(梟雄)이 되기엔 스스로 족쇄를 채운 셈이었다.
영은성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정리하고 덜어낼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이 명확한 결과물로 당장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앞으로의 행보 위에 세워 놓을 태도 정도는 결정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다다르자 길목에서 앉아있던 제갈무문이 두 사람을 반겼다.
그는 검총궁 때 검객 무리 속에서 모두 구경하고 있었으므로 왜 영은성이 그동안 보이지 않았는지 알고 있었다.
“제갈무문 가주님이셔.”
영은성이 그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최현걸이 대신 소개해주었다.
“화산파의 영은성입니다. 제갈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네. 반가워. 그래, 고민은 좀 해결이 되었나?”
“조금 덜어낸 수준입니다.”
“하하하! 그것 또한 성과라 할 수 있지. 착실하게 한 계단씩 밟아 올라가는 것이 우리 정파 무인의 모습이 아닌가? 그렇다고 사파인들이 얘기하는 실용, 효율 등을 배척해선 안 되겠으나 뚜렷한 철학 위에 그런 걸 더해낸다면 더 큰 것을 이룰 수 있는 셈이니 의연하게 굴게나.”
“……알겠습니다.”
영은성의 대답은 조금 늦었지만, 정파 무림의 선배로서 하는 진심 어린 조언은 충분한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후후! 자네가 하도 안 보이는 바람에 향후 논의는 내일 하기로 했네. 뭐 그건 상관은 없다만, 내일 다시 모일 때 처음 보는 듯이 인사하면 어색할 거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른 길로 지나치지 않아서 다행이군.”
“아아, 죄송합니다. 일찍 왔어야 했는데.”
“됐네. 덕분에 강 총수로부터 새로운 얘기들도 들을 수 있는 계기가 있어서 괜찮은 시간을 보냈네.”
세 사람은 제갈무문이 머무는 가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거기서 제갈무문은 영은성이 간단하게 요기할 수 있는 음식들과 차를 내어놓고 둘러앉았다.
“자네들은 진도건을 믿고 따른다지?”
“그렇습니다.”
“2, 3년 된 거로 아는데, 어떤가? 그의 무공은?”
“가주님도 보셨지 않습니까? 검총궁까지 썰어 버리는…….”
“그건 우연히 나타난 잠재력에 불과할 걸세.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걸 인정 안 하는 건 아니네만, 나는 창천맹이 마교를 상대로 승리하기 위한 계획을 꾸리는 사람. 진도건을 비롯하여 천서은이 과연 신마급 마두를 홀로 쓰러뜨릴 수 있는지가 궁금하네.”
“음……, 두 사람이라면 확실히 가능할 거 같기도 한데 혼자서는 힘들지 않을까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최현걸과 영은성의 이야기에 제갈무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간은 살짝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고심할 거리가 있는 듯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뭔가 생각이 있었던 제갈무문은 잠깐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리면서 고요함을 깨뜨렸다.
“두 사람은 특별한 인물들이지. 여전히 절대고수 수적으로 마교보다 우리가 불리하다고 했을 때, 그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사람들이네. 특히 진도건은 마교와 연관성이 묘하게 높으면서도 확실하게 우리 편이라는 게 참 뭐랄까? 놀랍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배신한다면 천 낭자가 아마 태워 죽일 겁니다.”
“풋!”
최현걸의 얘기에 영은성도 웃음을 터뜨렸다.
명확하게 얘기하기 모호했던 제갈무문은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진도건, 천서은과 이 두 사람의 관계가 그래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끈끈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파의 선배로서 자네들에게 이런 말 하기 미안하네만…….”
제갈무문의 말에 두 사람이 웃음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미안하네만, 진도건과 천서은 두 사람이 앞으로 마주할 수 있는 신마급 대마두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도록 궂은 역할을 해 줘야 하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자네들도 반드시 무사해야 하네. 자네들도 사문의 옛 명성을 되찾고 후대를 짊어질 후기지수들이 아닌가? 자네들을 믿고 보낸 것은 부족한 정파 선배들보다 실력이 더 낫고 빠르게 발전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네. 물론 혹독한 위험 속으로 앞세우는 죄책감이 있네만, 적들의 의표를 찌를 수 있는 복검(腹劍)으로서 자네들만 한 사람이 없으니 역할의 중함을 이해해 주게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주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고맙네. 내일 설명을 하겠지만, 나도 어떻게든 이 판을 흔들어 보겠네.”
사파를 상징하는 세 문파 중 한 곳 검림의 마을에서 유일한 정파였던 세 사람은 조용히 서로의 손을 맞잡고 의기투합하였다.
* * * *
이른 아침, 인근 마을에서 인부들을 불러 팔공산 검총궁을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어 뚝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옥마다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올랐고 지어진 음식들로 식사를 모두 마쳤을 때쯤, 마을 내에서 가장 큰 강도혁의 가옥으로 사람들이 일부 모이기 시작했다.
강정학 부자, 사위검총 가운데 남은 두 사람인 서저위와 매연선, 새롭게 임명된 이현탁까지 검림의 중심이 모였다. 이외에는 제갈무문을 포함한 진도건 일행의 외부인들이었다. 굳이 참석할 의사가 없었으나 제갈무문의 요청으로 야율균은도 따분한 표정으로 들어와 있었다.
방이 제법 넓었음에도 건장한 체격의 11인이 모두 들어서니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부터 창천맹에서 세운 방향에 대해서 공유하겠습니다.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질문을 주시면 궁금한 부분을 해소해드리겠습니다.”
“좋아, 시작하지.”
강정학의 허락에 제갈무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사천의 상황이 절대 녹록지 않습니다. 마교의 구주마종 가운데 세 곳이 사천을 둘러싸기 시작하여 사실상 사천삼정으로 불리는 아미파, 청성파, 당문은 고립되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바로 바깥의 인접 지역에는 창천맹을 포함하여 소림사, 무당파, 구룡문이 있고 개방 등이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만, 산악지대에 놈들이 숨어 있어서 정보의 흐름이 원활하지는 않습니다.”
제갈무문은 이야기하면서 큼지막한 지역 지도를 바닥에 펼쳤다.
대륙 전 지형을 개략적으로 표시해놓은 것으로서 지도 크기가 상당했는데, 넓은 지역을 한꺼번에 담아내다 보니 뭔가 금방이라도 종이에서 그림들이 넘쳐흐를 것만 같았다.
제갈무문은 아(峨), 청(靑), 당(唐)이라고 음각한 세 개의 장기 말 같은 것을 사천 성도 지역에 뭉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세 개의 말을 쥐고는 말을 이어가면서 하나씩 놓았다.
“현재 파악된 구주마종 가운데 세 세력은 운남의 사혈종, 귀주의 염황종, 사천의 광혈종입니다. 그러나 3년 전 홍천환 사태 때 일월신마가 독단적인 움직임을 가졌던 걸 돌이켜 보면 그와 같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세력이나 신마급 인물이 추가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 짚어야 할 점은 신마급 인물은 천하오절에 버금가는 수준이니 쉬이 보아서는 안 되고, 마공은 속성으로 힘을 갖출 수 있으니 검림처럼 소수 정예화된 문파가 아니라면 일반 제자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겁니다.”
“염황종과 맞붙었을 때, 화염마공이 버겁긴 했어도 놈들의 피해가 더 컸었지.”
“검림이 절치부심했듯, 그들도 가만히 있진 않았을 것이니 유의하셔야 합니다.”
이현탁이 으쓱거리며 중얼거리자 제갈무문은 칼같이 지적했다. 강정학도 듣기에 일리 있는 말이기에 인정하며 눈치를 주자 이현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보시다시피 사천삼정이 지역을 수성하고 있으나 포위망이 완전히 굳어지면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염황종과 사혈종이 운남, 귀주를 틀어막고 있는 사이에 가장 세력이 큰 광혈종이 산맥을 광활하게 통제하기 위해 퍼지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 우리도 이제 움직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 갈래로 움직일 것입니다. 첫 번째는 진도건, 천서은, 영은성, 최현걸, 야율균은 이 다섯 사람을 사천의 북단을 통해 들여보낼 계획입니다.”
제갈무문은 진(進)이란 말을 들어 지도 위에 놓았다. 그 위치는 바로 한중(漢中)이었다.
“전쟁 중이라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유동인구가 많습니다. 전장이 감숙 난주성에서 펼쳐져 수성중에 있으니 진령산맥에 가려진 한중을 통하여 사천에 진입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 없을 겁니다. 이 다섯 사람은 당문에 합류하여 당혁수를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혹시 신마들의 협공을 받을 때를 대비하여 감춰둔 복검(腹劍)이 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