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66화 (166/432)

166화 - 제31장. 검을 벼리다 (6)

“마도의 마공은 사파가 추구하는 방향과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른 것 같구나. 매우 불균형하여 주화입마 같은 큰 부작용을 낳음에도 이를 감수하면서 자기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 가지 않나 싶다. 겉으로는 멀쩡한 듯해 보여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 같은. 그렇기에 그만한 힘을 손에 넣는 것일 테지. 현탁이 자네가 막상막하라고 했으나, 놈의 마공은 파괴력만큼은 정말 대단했어도 결코 화경과 같은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네.”

강정학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자신의 싸움을 포장하기 위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면 이 또한 놀라운 얘기였다.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검림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지옥 같았다’라고 회상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염황신마와 직접 싸운 강정학이 가장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다른 검객들도 그 불길에 당하지 않은 자가 드물었다. 강정학이 모든 시선을 끌어줬기에 망정이라 그 상처들이 크지 않을 뿐, 증상이 심한 사람은 여전히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게 느껴지던가요?”

“아아! 느껴지지. 그자의 마공 특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어렵지 않게 목을 쳤을 것이다. 그땐 노부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둘째 제자 마산호가 염황신마 손에 허무하게 죽자 그만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그 대가로 격렬히 타오르는 화마를 뒤집어썼으니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전투가 끝나고 돌아와 회복에 집중하면서 그때 일을 복기하고 보니 너무 허망하여 원통했었다.

“어찌 됐든 마공은 부작용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런 위험성을 감수할 수 있는 배경에는 남모르는 이유가 있겠지. 야율균은이라고 했나? 자넨 얘기해 줄 수 있는 게 있는가?”

야율균은은 강정학의 물음을 듣고도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런 현학적인 부분까지 공부하면서 마공을 익혔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는 게 없다.’라고 얘기하려 했었다.

그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더니 갑자기 두 손을 어깨 뒤로 뻗어 옷자락을 붙잡고는 확 잡아당겼다.

“까, 깜짝이야!”

상의를 그대로 탈의하는 듯했지만, 그렇게 끌어당겨 가슴 앞을 가리고 있었기에 설마 했던 노출은 없었다. 그러나 가슴을 동여매기 위해 등을 가로지르는 흰 천의 위아래로 검은 줄처럼 보이는 것이 사람 눈에 들어왔다.

“우리 흑풍마종은 대부분 척추를 따라 이렇게 변해요. 무공의 경지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길어지죠. 흑풍신마 야율재는 목부터 꼬리뼈까지 이렇고 아마 만지면 단단하게 잡힐 거에요.”

흑풍명천마공의 초입에선 명치 반대쪽의 등 부분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것은 척추를 따라 번져 나간다. 이는 결국 경질화되는데 그렇다고 움직임이 불편해지는 건 아니었다.

야율균은은 척추 중심에서 위아래 절반을 차지하는 수준이었고, 야율신은 위로는 목에 근접하고 아래는 허리에 닿았었다. 그리고 야율재는 위로 뒷머리까지 지나가고 아래로 꼬리뼈, 척추 끝까지 닿았다.

“그게 무엇인가?”

아율균은은 다시 상의를 제대로 입고 앉았다.

“몰라요, 저도. 그냥 이게 자연스러운 거로 생각했을 뿐이라. 주화입마 얘기는 들어보긴 했으나 대마의께서 만드신 명현단이나 명천단을 복용하면 마성을 제어할 수 있어서 안전한 거로 알고 있어요.”

“대마의?”

제갈무문이 되묻자 야율균은은 진도건을 가리켰다.

“네가 먹은 홍천환이 바로 그분 작품이야.”

진도건도 이미 조강선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를 알고 있던 강정학도 짐작이 가는 자가 있었다.

“잠깐. 혹시 그 대마의란 자의 이름이 유변인가?”

“맞아요.”

“악의사 유변. 주백자와 함께 과거 혈마를 만들었던 주범. 그자도 살아 있었구나.”

강정학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제갈무문이 눈을 빛내며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진도건은 큰 동요 없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갈무문은 그가 내심 상당한 책임 의식이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 다 선대의 괴물들과 혈마라는 이름에 있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일련의 흐름 속에서 중요한 물줄기를 담당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자네의 행보가 앞으로 무림의 역사에 중요한 변곡을 만들어 낼 걸세. 난 장담한다네.’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그의 시선이 뜨거웠던 탓인지 제갈무문과 진도건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치 함의를 전달하려는 듯 제갈무문이 눈빛을 거두지 않고 씩 웃자 오히려 머쓱해진 진도건이 고개를 휙 돌렸다.

진도건도 그냥 듣기만 하지 않고 기억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야율균은의 등의 척추를 따라 생긴 검은 줄을 보고 나니 야율재가 그에게 던진 마지막 일격과 그것에서 벗어나 최후의 일격을 선서한 것도 모두 바로 저것 때문이었음을 떠올렸다. 그때 들려왔던 혈마의 의식 속 음성이 불현듯 떠올랐다.

“……마정. 그렇게 부르더군요.”

“내단 같은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는군요.”

“인체 기관에 깃든다는 소리인가? 참으로 괴이하군. 허허…….”

강정학은 허허로이 웃음을 흘렸고 다른 사람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제갈무문만이 진도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길 때문에 다시 눈이 마주쳤는데 제갈무문이 기다렸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진도건의 얼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네의 눈과 머리카락의 색이 변한 것도 마정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생각을 못 해 본 건 아니지만, 아닐 겁니다. 전 내단술로 혈마단을 형성하였습니다.”

진도건이 자신의 명치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하지만, 대답하면서도 스스로 의아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기운이 응집되어 뭔가 변화를 느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색이 변해버릴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는 건 현재 가진 지식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쨌든 그런 게 약점이라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살상력이 높기에 처음부터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자신의 실력에 믿음을 가지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두 사람은 흑풍신마를 쓰러뜨린 주역이었으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구나.”

천서은이 검지를 세우면서 손을 번쩍 들었다.

“특징이 어쩌고 위험성이 저쩌고 해도 센 사람이 이긴다는 건 만고의 진리 아닌가요?”

“으하하핫! 맞는 말이다.”

“전황이 결코 여유롭지 않으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지만, 전공이 있으신 두 사람은 특히 시간을 잘게 쪼개어서 정진해야 할 겁니다.”

“너무 압박하시는 거 아닙니까, 가주님?”

“평화로운 시대에 무(武)는 중요하지 않은 가치이나, 치열한 난세에서 역경은 성장의 밑거름인 법. 게으르다면 적의 칼 아래 한 줌 흙으로 돌아갈 것이요, 부지런하면 환란의 종결자가 될 수도 있는 법이지. 너도 개방의 적통을 이었으니 구시렁댈 일이 아니다.”

최현걸이 가볍게 웃으며 끼어들었다가 제갈무문의 진지한 일침에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이 설교를 왜 나만 듣고 있는 거야? 영은성, 이 자식은 아직도 안 오고 말이야…….’

* * * *

‘혈마’ 구마진의 충격적인 등장과 더불어 교주 단지운까지 나타나는 폭풍을 한바탕 겪고 난 대통현과 청의향 두 마을은 아직도 진통을 겪고 있었다.

구마진의 행패로 느닷없이 생겨 버린 이백여 명의 부상자가 두 마을에 나누어져 끙끙 앓는 소리도 시끄럽고 거슬렸지만, 앞으로 혈마종이 구마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이 뒤바뀔 수 없는 사실이 너무 불편한 일이었다.

청의향 마원당에 기거하는 유변을 대신하여 대통현 현령인 부양호가 혈마종을 관리하지만, 실질적으론 두 명의 간부가 부양호를 보조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혈마종의 간부 혁진국(赫振國)과 조항(曺恒)이 바로 그들이니 오늘도 부양호와 함께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과 수염을 나부끼면서 혈마종 내부에 흐르는 민심을 전하기 위해 마원당을 찾아왔다.

세 사람은 사마월을 만나 익숙하게 마원당 뒤뜰의 정자로 향했다.

예나 지금이나 유변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으나 달라진 점 하나가 있다면 그의 혈색이 다소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미 천수를 훌쩍 뛰어넘은 세월을 살아오긴 했지만, 구마진에게 흡성대법을 당한 이후로 사술이 흔들리는 바람에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해진 상황이었다.

“왔는가?”

“예, 대마의 어르신.”

정자가 크지 않아서 네 사람이 들어서자 금방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이미 기별을 받았기에 다반에 올려진 찻잔은 모두 다섯 잔이었고, 유변은 미리 따뜻한 찻물을 따라놓고 있었다.

“건강은 어떠십니까?”

“교주께서 도움을 주시고 가셔서 지금은 괜찮네. 자네들은 어떤가?”

“저희야 뭐 치료하면 그만이지만, 어르신의 건강은 같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세 사람의 몸 상태도 구마진에게 얻어맞는 바람에 썩 좋지 않았다. 그나마 내공이 깊어서 부상 정도가 심하지 않아 크게 다친 다른 식구들처럼 시름시름 앓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데도 볼 때마다 몸 상태를 물어보는 유변의 배려에 감격스럽기도 하면서 구마진의 행패를 막아서지 못한 무력감에 안타까운 마음들이 컸다.

“껄껄껄! 이젠 이 노인네를 혼내시는구만.”

유변이 웃으면서 농담조로 받아치자 조금 성을 내보았던 조항은 안타까움에 한숨을 쉬었다.

“이 노구 걱정일랑 말고, 아이들은 어떤가? 아니, 노인네들이 더 완강할 테지?”

유변의 물음에 부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의 조항도 바로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어린 만큼 혈기왕성하니 다들 드디어 싸울 수 있겠다고 사기를 불태우고 있어서 의견 통일은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녀석들은 저희와 다르게 어르신보다 교주님을 더 숭상하지 않겠습니까?”

“구마진이 정말 혈마와 같은 특징을 갖게 된 것이 영향이 컸습니다. 저희가 기억하는 원건 공과 그자는 완전 다른 인물인데 말이죠.”

“오히려 녀석들은 갈팡질팡하는 저희를 다그치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신교를 위해 공을 세워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냐며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았다면 이제는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서 보답해야 한다고 얘기들 합니다. 이젠 정말 명분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유변은 차분한 태도로 세 사람의 목소리들을 귀담아들으면서 찻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렇게 세 모금 정도 마시면서 계속 듣고 있던 그는 마지막 부양호의 말이 끝나자 다반에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구마진이 다시 신강으로 넘어가 형벌을 마치고 돌아오려면 두 달. 교주께서는 자네들이 심적 정리를 할 수 있도록 그만한 시간을 주신 것이네. 어차피 늙은것들이 고집을 피워 봐야, 되려 피해 보는 건 젊은 아이들이니 일찍 입장들 정리하고 구마진의 명령을 따를 준비들 하는 게 좋을 걸세.”

“하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게 어찌 쉬운 일입니까?”

“저희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위풍당당하고 풍운아 같은 혈마의 모습과 구마진의 포악함은 너무 대치되어 있습니다.”

“껄껄껄껄! 이 녀석들아.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그리 상상을 했더냐?”

“대마의께서 저희에게 옛날얘기 많이 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랬나? 으허허허! ……하아! 이보게들. 자네들도 늙을 대로 늙었는데 꿈은 그만 젊은 후학들에게 양보하게나. 제아무리 포악하고 무도한 구마진이라도 자네들이 달라진 태도로 맞이하면 충분히 기뻐할 걸세. 이 노구도 가거든 그리될 수 있도록 얘기해두겠네.”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설마 신강에 가신다고요?”

유변은 차를 다시 한 모금 마시면서 차분히 호흡했다.

주름진 눈꺼풀 아래로 네 사람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엔 이미 결심을 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이곳에서 내 역할은 끝났네. 이렇게 된 마당에 아쉬움도 없네. 하지만, 왜인지 단 태상은 한 번 보고 떠나야 할 것 같으이. 지금의 교주는 자신만의 대의와 포부를 함께 품고 있으나 단 태상은 제 부친인 단용후와 뜻이 항상 같았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고 가고는 싶네.”

“어르신! 어찌 저희를 버리고 떠나시렵니까!?”

부양호가 깜짝 놀라 물었다. 혁진국과 조항도 놀라서 같이 큰 목소리로 묻는 건 매한가지였는데 이미 언질을 들었는지 사마월은 그저 안타까운 표정만 지을 뿐 옆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껄껄껄! 이미 무덤에 들어가 썩어 문드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징그럽게 살았는데, 남사스럽게 이 노구에게 무슨 그리 애정을 보이느냐? 개의치 말아라. 언제가 마주했어야 할 작별이 그저 오늘이었을 뿐. 노부의 욕심과 꿈을 격려하던 자네들과 자네 선친들께 진심으로 고마웠다네. 다른 아이들에게도 직접 인사를 전하지 못해 미안해했다고 전해주게나.”

“설마 지금 떠나시는 겁니까?”

“언제 다할지도 모르는 내 수명을 생각하면 결심이 선 날에 바로 움직여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유변은 미소와 함께 담담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혈마종의 세 간부를 좀 더 격려하고는 사마월과 함께 미리 채비해 둔 행낭을 매고 청의향을 떠났다.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세 사람이 펑펑 울었음을 물론이거니와 이 소식이 전해진 청의향의 의원들과 대통현의 혈마종 무인들, 가족들 모두 이날 하루는 쉬이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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