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 제31장. 검을 벼리다 (5)
천서은은 강정학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파천신공을 수련하면서 공력 분출에 벽력의 기운이 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비무제에 출전하기 약 1년 전쯤부터였다. 그리고 화산에서 천무경이 보여준 신화적인 무공을 보면서 뇌리에 각인된 인상은 지난 3년여 폐관 수련 기간에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배운 것, 주어진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도 이 신공이 가진 능력을 사용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수 있겠으나 강력한 집중을 통해 의식 속 사념을 걸러내고 창의적인 상상력을 더할 수 있다면 이 신공이란 개념에 한계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 네게 명상을 더 신경 쓰라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요, 자네도 이를 인지하고 있어야 만이 천무경이 걸었던 길을 앞당길 수 있고 또 그 이상까지 바라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으음…….”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사실상 지난 3년 동안 그런 과정을 거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감에 넘쳐흘렀지만, 흑풍신마와 싸웠을 때는 여전히 실력이 부족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천무경이 화산에서 보여 주었던 신위는 그녀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니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강정학이 피식 웃었다.
“네 아비는 천하에 둘도 없는 괴물이니 신경 쓰지 않는 게 좋다만, 언제나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마음에 여유를 두고 머릿속의 잡념은 상시 덜어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네, 저도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마공은 어떻습니까? 제 힘도 그렇고, 중원의 무공과는 확실히 다른데.”
“흐음.”
천서은의 말이 끝나자마자 진도건이 던진 질문에 강정학은 고민이 필요한지 미간을 좁히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눈까지 감으면서 골몰하는 듯하더니 입을 반쯤 벌리면서 진도건을 흘겨보았다.
“좋은 질문이다. 마공의 본질이야 이 노부도 모르지만, 정파와 사파의 무공을 빗대어 풀이해 볼 수는 있겠지.”
강정학은 나무작대기를 하나 들어 흙바닥에 글자와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익히 알고 있는 것임에도 그저 액면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걸 이어지는 강정학의 설명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다.
“정파 놈들은 무학을 철학적으로 접근하길 좋아하지. 태허(太虛)와 무극(無極)으로 감히 엿볼 수 없는 우주(宇宙)를 추정해 보려 하고, 태극양의(太極兩儀), 삼재(三才), 오행(五行) 등으로 자연을 이해해 보려 한다. 이들은 복합적으론 모두 하나로 귀결되기에 실로 제대로 이해하는 인간들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되지만, 어쨌든 그 노력은 대단하고 추구하는 목표는 지고(至高)하니 사서 고생하는 용기는 가상하다.”
“후후후!”
칭찬하는 듯하지만, 온갖 비꼬는 말투나 어휘가 뒤섞여 있는 게 재밌었는지 천서은이 웃음을 흘렸다.
강정학도 천서은의 웃음을 듣고 절로 씩 웃었다.
“총수님, 너무 비꼬시는 것 같습니다.”
“껄껄껄! 이 몸이 틀린 말을 했느냐?”
근처로 다가오던 제갈무문이 듣고는 다가와 지적하자 강정학이 웃음을 터뜨리며 반문했다. 제갈무문도 생각이나 태도 면에서 열려 있는 사람이었기에 강정학의 비꼬는 투가 기분은 조금 나빠도 시원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럼 저도 한 수 배울 겸 옆에 껴서 들어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거 뭐 있느냐? 숨어서 듣는 녀석들도 나와 있거라. 기척이 거슬린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숨어 있던 자들도, 멀찌감치 서서 귀만 기울이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다가와 강정학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최현걸과 야율균은도 있었고 검림의 젊은 검객들도 왔으니 그 수가 이십여 명에 달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서저위가 그 광경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옛날 생각이 납니다, 총수님.”
천하 검객들이 숭상하는 자이자 스승인 자.
검림의 조직은 그렇게 탄생했기에 굳이 검을 섞으면서 훈련하는 일뿐만 아니라 이렇게 모여서 강정학의 생각과 철학을 듣는 일도 원래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게 끊어진 것은 염황종과의 충돌 이후였으니 새롭게 검림에 합류한 젊은 검객들이 이런 문화를 모르고 서성이던 것은 당연했다.
강정학도 서저위의 말을 듣고는 옛 생각이 나면서 가까이 모여든 젊은 검객들의 면면을 보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다.
“아무튼, 정파 무공의 철학은 그러한 것들을 목표로 두고 있기에 깊은 깨달음을 동반하지 않으면 경지를 이루기에 대단히 어렵다. 반면 사파의 무공들은 좀 더 실용적인 측면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뚜렷한 상징을 추구하거나 혹은 정파에서 멀리하는 것들을 오히려 더 가까이함으로써 ‘쟁취’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강하다.”
강정학은 바닥 한쪽을 가리켰다.
큼지막하게 그린 원에다가 다섯 방향으로 오행에 해당하는 글자들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강정학은 작대기를 들어 각 글자 사이를 잇는 원의 테두리를 끊어놓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오행을 정파는 조화의 수단으로서 본다면 사파는 개별적으로 접근하여 그 상징물을 추구하고 그것과 같은 힘을 탐하는 것이야.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로 상징하는 힘을 따로 취하고자 하니 이런 속성의 무공들은 쉽게 힘을 얻어내지만, 결국 체내 기운의 조화가 깨져 자멸하는 경우도 많지. 또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는 물론 상극인 관계도 있으니 장단점이 뚜렷하지. 그래서 길게 본다면 정파의 접근은 옳지만, ……역시 재미가 없어, 재미가.”
“하하하하하!”
강정학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선을 긋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갈무문이나 최현걸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등장한 무당파의 소요자란 인물이 정말 대단한 게다. 아직 노부에 미칠 수준은 아니겠지만, 그 어려운 길을 걸어 화경에 이르렀다면 응당 칭찬해야 마땅한 일이지.”
그 말을 들은 최현걸은 동문도 아니었지만, 정파인으로서 내심 뿌듯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당문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독과 암기를 다루는 가문인데.”
“실용주의자. 실상 사파라고 봐도 무방할 족속들이지.”
“당문주께서 들으시면 성을 내시겠군요.”
“뭔 상관이더냐? 끌!”
제갈무문의 얘기들에도 거리낌 없던 강정학이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그러나 제갈무문은 오히려 씩 웃었다.
“주백자 어른은 어떻습니까? 그분으로 인해 사실상 천하오절의 구도나 천하제일의 기준이 달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흥!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것이다.”
“오, 총수께선 자신이 있으신가 보군요.”
“……네 쓸데없는 소리에 얘기가 삼천포로 빠졌지 않느냐?”
“하하하하! 죄송합니다. 입 다물지요.”
강정학은 자신의 실력에 당당한 인물이었기에 거짓과 기만은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다. 그가 버럭 성을 내니 제갈무문도 웃으면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현걸은 제갈무문의 지적으로 그래도 사파 무림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어깨가 절로 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강정학보다 두 배 이상 인생을 더 산 주백자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반칙이지만,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상황에서 천하제일고수는 분명 그의 몫이라 보는 것도 일견 틀린 지적은 아닌 셈이다.
강정학은 제갈무문을 쏘아보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가기 위해 작대기를 들고 오행의 원 한가운데에 뢰(雷)를 적었다. 그리고는 작대기로 다시 천서은을 가리켰다.
“천무경의 파천신공은 하늘을 무너뜨릴 듯한 천둥번개를 상징화하고 그로써 힘을 추구하여 만든 무공이라면 노부의 백양소혼신공은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빛나는 저 태양처럼 스스로 불사르겠다는 의미를 담아낸 것이지. 모두 강함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의 방편이고 가고자 하는 길이 뚜렷하기 때문에 정파보다 길이 빠를 수밖에 없다.”
이번엔 작대기로 ‘뢰’와 다른 오행들을 번갈아 가리켰다.
“파천신공이 추구하는 힘의 가치를 풀이해 보자꾸나. 오행은 서로 상생과 상극이 있고 단독으로 존재하면 자연의 균형을 깨뜨리므로 불합리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뢰는 아주 간결하면서도 파괴적이고 또 반응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빠르다. 어떠냐? 그 길을 제대로만 따른다면 완벽한 무공이 되지 않겠더냐?”
강정학의 말에 대다수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이라도 천무경의 무공을 보았다면, 그리고 검총궁 옆에서 천서은과 강정학이 충돌하면서 보여 준 그 위력만 보더라도 완벽한 무공이라는 찬사에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정학은 극찬으로 끝낼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천서은을 힐끔 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완벽한 무공이란 없지. 결국엔 천무경이나 그 선대의 인물들도 뢰를 추구하고 하늘을 부수겠다는 포부까지 보여 주긴 했으나 아까 말했듯이 정파의 그것은 자연을 이야기하고 우주를 이야기하기에 진실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셈이다. 만약 무공의 모든 것을 끌어내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정파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단지 사파가 지금 앞서 있는 것은 ‘힘’을 갖기 위한 순수한 욕심을 추구했기 때문임을 잊어선 안 된다. 물론 이를 편법으로써 편취하려는 자들은 절대 경지에 이를 수도 없는 법이고.”
강정학의 말로 인해 모두 다시금 주백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주백자는 자연의 섭리와 우주의 진리에 그 누구보다 근접해있는 자이기에 과거엔 파문 제자로서, 혈마의 원흉으로서 지탄을 받았음에도 이제는 정파의 모든 존경을 두루 받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 천하오절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강정학은 그렇게 말하고는 일부러 제갈무문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제갈무문은 미소와 함께 합장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제는 서로 익숙해져 버린 정파와 사파의 소통 방법인 것이다.
서로 가는 길은 달라도 인정할 것을 인정한다면 충분히 협력할 수 있는 작금의 시대 현실을 대변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염황신마의 그 지옥 같은 화염공(火焰功)은…… 정말 비상식적인 일이군요.”
근처에서 듣고 있던 이현탁이 불쑥 말을 꺼냈다.
진도건과 천서은도 비무제에서 판관으로 본 적이 있던 백포적화 이현탁, 검림의 검객이었다.
이제 마공을 설명할 차례였으니 알맞은 순서이긴 했으나 대범하게도 검림의 아픈 상처를 들춘 셈이었다.
듣는 강정학도, 묻는 이현탁도 가슴이 쓰린 것은 매한가지였다.
강정학은 오른팔의 망사로 된 소매를 걷어붙였다. 여든을 바라보는 노인의 팔치고는 탄탄하고 꽤 두꺼워 감탄하면서도 흉측한 화상의 흉터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현탁이 자네가 보았을 때, 노부와 염황신마의 대결은 어땠나?”
“막상막하. 용호상박. 패주한 건 놈이었으나 상처는 저희가 더 깊으니 총수께 죄송하지만, 이겼다고도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크크! 매정한 녀석.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강정학은 왼손으로 오른팔의 흉터를 쓰다듬었다.
죽을 때까지 계속 가져가야 할 화상의 흔적.
단순한 불이 아닌 마공에 당한 게 원인인지 쓰다듬기만 해도 그 열기가 손바닥을 뜨끈하게 했고, 쓰다듬어지는 팔의 피부를 타고 쓰린 통증이 감돌았다.
“확실히 오행의 ‘화’를 단독으로 취한 만큼 놈의 마공은 노부의 신공보다 훨씬 극치의 극양공일 것이다. 노부의 검기가 놈의 불길을 쉬이 뚫지 못하고 애먹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겠지. 불길이 작은 불을 만나면 집어삼켜 더 기승을 부리는 것처럼…….”
강정학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를 향해 주목하던 사람들은 문득 그의 눈빛이 아련해지는 걸 보았다. 함께 지켜보던 진도건은 노검객의 저 흔들리는 동공 너머로 어쩌면 염황신마와의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던 격돌을 다시금 상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