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제31장. 검을 벼리다 (3)
‘부담스럽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천서은이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구도 경시할 수 없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 천하제일검 명성을 거머쥔 화경의 고수는 오히려 몸이 풀렸는지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표정은 더욱 냉철하고 날카롭겨 벼려지고 있었다.
“고생했어.”
“역시 대단하시네요. 부담 없죠?”
“부담은 무슨.”
진도건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속마음과 달리 거짓말을 했다.
강정학의 위명을 생각한다면 마음껏 기량을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이 들다가도 적대관계가 아니니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서은과 시험이라고 볼 수 있는 비무가 무던하게 지나갔으나 왠지 자신은 또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절충할 수 있는 기준을 잡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내가 얻은 힘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아직 모른다.’
자기 자신이 어디까지인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적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강정학은 그것을 시험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상대였다. 어떤 검을 던져도 받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니까.
“긴장되네.”
지나치며 군자검을 검집에서 뽑는 진도건을 보며 천서은도 묘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팔공산 정상 검총궁 옆 넓게 마련된 공터 한가운데서 천하제일검 백령신검 강정학을 마주 보는 심경이란 압박감의 끝을 달리는 일이었다. 창천맹에 도착하여 창무대 위에서 천무경을 마주 보았을 때와 똑같은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라!”
터벅.
한 걸음.
퉁!
두 번째는 묵직하게, 그 소리가 쫓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짓쳐 들어 검을 휘둘렀다.
카앙!
흑검의 궤도가 나타났다 싶은 순간, 이미 검은 지나쳐 하늘로 뻗었고 그 중간을 강정학의 검이 막아서 있었다. 강정학은 멀쩡히 받아내긴 했으나 그의 신형은 뒤로 밀려났다.
익히 알고 있던 속도와 검력에 강정학이 씩 웃었다.
“날 염려하느냐?”
“……예.”
“허헛! 좋다. 더 해 봐라.”
“그럼.”
카캉!
검은 반월이 기울어진 십자를 그렸다. 역시나 강정학의 검에 막혔는데 이 단계부터 검림 검객들은 움찔 어깨를 털기 시작했다.
쾌검.
그 단어가 갖는 진의를 보여준다.
카카카카캉-!
외공만으로 보여 주는 검속에서, 합이 늘어갈수록 내공을 더해가며 충돌하는 검격의 박력과 뿜어져 나오는 기백에 숨이 막혀 갔다.
진도건의 공, 강정학의 방.
이걸로 만족할 수 없었는지 강정학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먼저 보여 줘야 네가 안심하고 실력 발휘를 하겠구나!”
쿠아아아-!
백양소혼신공.
공기가 하얗게 질리듯 이글거리는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영혼마저 불사를 것만 같은 기백의 불꽃이 강정학의 피부를 타고 흐른다.
카카캉!
진도건도 내공을 끌어올려 반응했기에 망정이지 잘못하다간 목이 날아갈 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식겁했다.
천서은과 격돌하는 걸 보면서 옆에서 지켜볼 때는 몰랐던 이 압박감은 천무경의 그것보다 더욱 날카롭게 벼려져 금방이라도 심장을 관통할 것만 같은 첨예함이 있었다.
사패소룡비무제에서 보았던 양자성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박력 속에서 진도건의 몸을 타고 붉은 기운이 솟구치듯 뿜어져 나왔다. 마침내 표출되기 시작한 혈마의 섬뜩함이 어떤지 느낀 강정학의 입가에 미소가 더 짙어졌다.
슈카카칵!
강정학의 검이 새하얀 빛무리를 꼬리에 물며 십수 개의 검광을 뿌렸다. 직전의 합보다 더 속도를 올린 검격 속에서 붉은 기운이 맺힌 흑검이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너무나 거칠고 단순한 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무력을 진단하기에 적합한 것은 없었다. 이쯤 되면 초식의 운용이나 강기공의 출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직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반응할 수 있는지의 문제였다.
그 목적으로 덮친 것은 강정학일 진데, 진도건의 검속은 한계를 모르는 듯 혈마진기에 탄력을 받아 더 불붙기 시작했다.
‘이놈이……!’
내력으로 신체를 강화해서 반사신경 및 움직임의 속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한계치는 사람마다 달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 한계치를 늘리는 것은 외공의 단련이고, 강정학도 그 점을 알기에 회복하는 동안 엄청난 양의 고기를 먹어치우면서 외공 단련에 힘을 썼다.
오히려 몸상태가 염황신마에게 당하기 이전보다 더 향상되었다 자평할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진도건은 벌써 그를 막다른 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의 생각은 거의 엇비슷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목이 서늘해질 정도로 눈으로는 좇을 수 없는 극한의 쾌검은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쯤에서 몇 사람은 공통으로 한 가지 가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다…….’
지켜보던 천서은은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공력을 쏟아부으면서 사생결단을 내는 수준에 한참 못 미치긴 했으나 저렇게 쾌검을 다툴 때 자칫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으면 크게 다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백령신검 강정학이었다.
생사결을 하자고 온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절륜한 무공에 진도건이 다치지 않을까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밀어붙이다 다시 밀리는 상황 속에서 강정학의 얼굴엔 보통의 여든 먹은 노인의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흥분에 찬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조바심을 마치 건드리려는 것처럼 마침내 강정학이 움직였다.
백령검법 인화부곡.
쾌검의 특징이란 아주 직선적이어서 변초와는 거리가 멀다는 특징이 있었지만, 강정학의 검은 그 쾌검 안에 작은 원을 그리는 변화를 보이면서 연속으로 찔렀다.
찰나의 시간마저 쪼개어 미세하게 조절하니 그 날카로운 궤적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꿰뚫릴 듯하다. 그것만으로도 위협적인데 검기가 그 궤적을 타고 소용돌이쳤다.
채채챙-!
패앵!
진도건의 흑검이 격렬하게 움직이며 쳐냈지만, 기어이 마지막 검격 하나가 위협적으로 파고들었다. 반사적으로 허리가 젖혀졌고 검광은 그의 잔상을 꿰뚫었지만, 이미 강정학은 검을 회수하고 다음 초식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백령검법 백무풍호.
기운이 의지에 반응하여 절로 일어난다. 검을 휘두르자 검기의 가닥들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피어오르며 진도건의 움직임을 쫓아 날아 들어갔다. 일초에 수십 개의 검격을 상대해야 하기 이전, 진도건은 첫 일격을 쳐내면서 몸을 띄웠다.
캉, 카카카카캉-!
공중에서 휘돌며 검영이 휘몰아친다. 팽팽 도는 시야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진도건의 검영이 신기에 가깝게 반응하며 강정학의 검기들을 모두 쳐내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모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느새 진도건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강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천서은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 했으나 그녀의 조바심을 눈치챈 강도혁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믿어라.”
강도혁의 말에 천서은이 긴장감에 이를 악무는 사이, 검강이 그대로 진도건에게 내리꽂혔다.
꽈앙!
굉음에 군중들 모두가 화들짝 놀랐지만, 강정학만큼은 흥미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몸을 날려 자신이 내리꽂은 검강에 검을 찔러넣었다. 바로 옆에서 급히 몸을 굴리는 진도건을 보면서.
강정학의 검이 검강을 찌르는 순간, 검강이 분해되면서 다시 십수 가닥의 작은 검강으로 갈라졌다. 그것은 그대로 진도건을 향해 짓쳐 들었으니 그 기이한 광경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새로이 검강을 형성하여 직접 검격을 휘둘러 빈틈을 파고드니 누가 봐도 꼼짝없이 당하리라 생각했다.
푸아아아아!
진도건의 전신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사방으로 가시 돋치듯 쏘아져 나간 혈강기가 강정학의 검강들을 모조리 물리쳤다.
오히려 진도건의 시선은 강정학이 직접 휘두르는 검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니 그의 연속된 검격이 재차 강정학을 몰아붙였다.
카카카캉-!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가시처럼 뻗어 나갔던 혈강기가 순식간에 검으로 빨려 들어와 검강을 형성하고 있었다. 진도건의 형형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 보면서 비로소 그를 자극했다고 느낀 강정학은 일보 크게 후퇴하면서 다음 절초를 준비했다.
‘으음……!’
그때 오른팔과 오른쪽 몸통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염황신마가 남긴 깊은 상흔이 다시 요동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완벽하게 집중된 눈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아직 아니다…….’
터득한 비기를 지금 꺼내 들 수는 없는 일.
백령검법 백화요리.
전개되는 참격의 검세 속에서 진도건의 검이 춤을 추며 완벽하게 방어해 낸다. 그리고 잠깐의 틈을 발견한 강정학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찔러넣었다. 이마저도 아슬아슬하게 몸을 회전시키며 흘려내는 진도건의 모습에 내심 감탄했다, 그리고 스치듯 돌아나가는 시선과 마주치는 그 잠깐의 순간 속에서 강정학은 섬뜩함을 느꼈다.
‘위험……!’
정말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급히 검을 당겨 세우면서도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고개부터 허리까지 크게 젖혔다.
정말 잔상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순간적으로 나온 움직임이었는데, 바로 그 직전에 있던 위치로 붉은 검광이 관통하여 지나갔다.
사람들이 공통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던 ‘가정’이란,
모순(矛盾)이라는 서로 무조건 뚫을 수 있고, 막을 수 있다는 양립할 수 없는 가정을 설명하는 말이지만, 결국 움직이는 건 사람이라는 핵심이 빠진 가정이었다. 만약 절대적인 기준으로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을 진도건의 손에 쥐여 줄 수 있다면 이 세상 누구도 그의 앞에선 죽음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검은 강성과 탄성을 고루 갖춘 좋은 재료로 대장장이가 열심히 두드리고 갈아내면 그 날카로움을 벼릴 수 있다. 그리고 검기는 날카로움의 정의를 물리적인 영역에서 더 확장된 공간으로 끌어낸다. 검강은 이를 다시 응축하여 쇠조차 자를 수 있는 날카로움을 갖춘다.
호신강기의 방어력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기력이 쇠하지 않는 한, 이 둘의 관계는 모순과도 같다. 그러나 경지에 오르고 강기에 응축되는 기운의 밀집도를 더 높일 수 있다면 더 강한 강성과 절단력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상대적인 법이다.
그마저도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단순한 날카로움이 아닌 다른 특성, 특질을 심어낼 운기 방법을 연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동등한 수준의 적을 죽음으로 이끌기 위한 사실상 비효율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강호 무림에서 강함이란 것은 언제나 모순의 가치를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 어떻게 효율성을 갖추느냐에 따라 진정한 강자라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서컥! 콰콰콱!
검에 덧씌운 백양소혼신공의 검강에 막혀 발생할만한 파열음도 없이 쇠가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틈도 없이 이어서 조금 떨어진 높은 곳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갈려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이었을까?
몸을 좌로 크게 꺾은 채 하늘을 향한 그의 시야로 어느 것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으나 신경을 자극하는 붉고 희미한 음영이 착시처럼 어른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 중간을 가로지르는 선을 따라 미끄러져 떨어지는 조각 난 검의 파편을 보면서 그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우르르릉-!
“뭐, 뭐야……!”
굉음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강정학은 애써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몸을 바로 세우고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낮은 자세로 검을 비스듬히 세운 채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모르는지 멍하니 풀린 눈빛으로 굳어 버린 진도건의 상태가 강정학으로서는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