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62화 (162/432)

162화 - 제31장. 검을 벼리다 (2)

“구치상이 그런 말을 했다고?”

“그렇습니다.”

“한번 보자.”

검총궁 밖에서 강도혁, 진도건, 천서은이 보는 앞에서 영은성은 자하신공을 운용하면서 매화검법을 펼쳤다.

영은성은 정말 욕심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전력을 다해 검법을 펼쳤다. 24개의 초식을 모두 펼치기까지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은 데다가 매화 꽃잎으로 발현되는 자색 검기가 연신 휘몰아쳤다.

그 기세가 대단하여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던 이들도 내심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순식간에 휘몰아친 검기(劍技)의 향연이 끝나고 영은성은 차분히 호흡을 고르며 강정학을 바라보았다.

흰 수염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형형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강정학에게서 영은성은 절로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영은성은 점차 긴장감에 휩싸였다.

강정학은 영은성과 조금의 거리를 두고 다가온 다음 검총궁 쪽을 바라보았다.

검총궁 벽면에 널브러진 목검들이 있었는데 강정학이 팔을 뻗자 한 자루가 빨려 들어가듯 손에 들어왔다.

“그 기세 그대로 덤벼 보아라.”

“예?”

영은성은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그러나 강정학의 얼굴엔 표정 변화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훗, 네가 감히 내 걱정을 하느냐?”

영은성이 머뭇거리자 강정학이 피식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영은성은 정말 당혹스러웠다.

목검은 내기를 담아내기에 한계가 명확하여 일정 이상의 강도를 갖기 어려웠고 한계치를 넘어가면 터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목검 비무에서는 내공을 크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도대체 천하제일검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상식마저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인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영은성이 계속 머뭇거리자 강정학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진도건이 한 마디 던진다.

“한심하다. 네 마음가짐이 그것밖에 안 된다면 화산으로 돌아가라.”

영은성이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마음의 상처를 줄 만한 말이었지만, 진도건이 한 말이었기 때문에 더 뼈아프게 들려왔다.

진도건은 영은성의 고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그에게 해답을 제시해 줄 만한 경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연습 상대로는 얼마든지 가능해도 스승으로서의 혜안을 보여줄 만큼 화산파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히려 그런 문파의 벽을 넘어선 화경 고수의 조언이 좋은 길이 될 수 있었다.

구치상도 엄연히 천하오절이라는 무림의 가장 명망높은 원로였으나 엄밀히 얘기해서 훌륭한 스승으로 보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구치상은 자신의 부족한 재능을 늦게나마 노력으로 극복하여 만개한 경우이니 축적된 지도력이란 강정학과 비교하면 분명 천양지차였다. 소요자는 같은 정파 화경의 고수였으나 무당파의 검학과 화산파의 검학은 결이 다르고 그도 다른 사문의 제자를 가르칠만한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강정학은 상대적으로 더 이른 시기에 천하제일검의 명성을 얻었고 자신에게 가르침을 구하고자 하는 천하의 검객을 받아들여 검림이라는 조직까지 일구었다. 검림의 역사 자체는 짧지만, 강정학 개인이 쌓아 올린 지도력이란 검에 관하여 논하지 못할 범주가 없다 할 수 있었다.

영은성은 진도건에게 깊이 허리 숙였다. 그리고 다시 강정학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사과를 표했다.

“추태를 보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영은성은 검을 다잡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망설임을 뛰어넘어 검을 휘둘렀다.

휙!

휘휙! ……후욱!

영은성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강정학과의 거리가 크게 벌어지거나 하진 않았지만, 그는 가볍게 몸을 틀면서 검격을 피했고 간혹 절묘하게 파고들 때는 목검으로 검신이나 손목을 가볍게 툭 밀어 빗나가도록 만들었다.

쏟아지는 검기도 강정학에게 닿지 않았다.

꽃잎으로 형상화된 검기가 요란하게 펼쳐지며 사위를 덮었지만, 그때마다 직접 짓쳐 드는 위협적인 검기만 영은성의 검로를 틀어버림으로써 피해내고는 나머지 주변은 허초로 보고 무시했다. 간혹 몇 개가 닿을 뻔해서 기를 발산하여 소멸시키긴 했으나 영은성이 만족할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퍽!

“윽!”

매화만개로 펼쳐진 눈앞을 덮는 검기 속에서 강정학은 불쑥 목검을 집어넣었다. 거의 보이지 않은 틈바구니를 관통하여 어깨를 쳤으니 영은성은 그 충격에 나동그라졌다. 눈앞을 덮었던 검기는 장포를 펄럭이는 손짓에 휘몰아치는 경풍으로 흩어져 버렸다.

“기초가 무척 탄탄하지만, 창의성이 없군. 목적의식도 부족하고.”

어깨를 찌르는 통증에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나던 영은성은 그 말을 듣고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구치상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정학은 뒷짐을 지며 뒤돌아섰다.

바람이 불면서 그의 투명한 백발이 휘날리자 햇빛 아래 반짝거렸다.

“만발한 꽃은 눈길을 사로잡을 수는 있지만, 결국 벌이든 사람이든 꾀어내는 건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한 송이. 그 한 송이에 집중하면 주변에 아무리 꽃이 많아도 시야에 들어오는 건 고작 몇 송이뿐. 그마저도 뿌옇게 보여 무슨 꽃인지 알아볼 수 없게 되겠지. 향기에 취해 눈앞의 꽃만 바라보겠지.”

“한송…이 ……꽃?”

“정파는 초식명을 철학적으로 짓기 좋아하지. 결국은 상대를 제압하거나 죽이는 것이 목적인데 말이지. 자하신공이 패도적이라지? 하지만, 너의 검기는 그저 색깔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건 없어. 그저 정해진 예식대로 추는 춤사위일 뿐.”

“아……!”

영은성은 작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멍한 눈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으론 생각이 복잡해지는 모양이었다.

잠깐 그렇게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강정학의 뒷모습을 보았다.

“검법이란…… 무엇입니까?”

강정학은 반쯤 몸을 돌려 영은성을 내려다보았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지.”

“…검은…….”

영은성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에 탁 떠오르는 간단명료한 명제였음에도 마음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강정학은 그 준비를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검은 흉기(凶器)일 뿐이다.”

“……그렇군요.”

영은성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검집에 돌려놓고는 강정학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걸로 됐더냐?”

영은성은 돌아서서 일행이 지켜보고 있는 쪽이 아닌 그보다 옆의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걸 보면서 강정학은 다시 물었고, 그 목소리에 다시 한번 멈춰 섰다.

“……예.”

“훗. 좋다.”

강정학의 반응을 들으면서 영은성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짧은 시간임에도 깨닫는 것이 있다면 분명 훌륭한 재능이라는 소리였다.

그 모습을 힐끔 보던 강도혁이 강정학에게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검은 흉기다. 고작 이거 못 받아들인 게 문제였습니까? 정파란 다 그런 겁니까?”

“그거 너무 무례한 소리 아닙니까?”

강도혁의 말을 들고 최현걸이 발끈했다. 갑자기 왜 이러나 하는 표정을 짓는 강도혁의 모습까지 지켜본 강정학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파에게 무공은 ‘협’을 행하기 위한 힘이다. 그들은 좀 더 철학적이길 원하고 도덕적이길 원한다. 활검이라는 가치를 믿는 자들이고 좀 더 나은 방안을 찾기 위한 노력도 하곤 하지. 그게 그들의 무공에도 녹아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정파 무공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성장 속도가 느리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무공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이거늘. 개방의 소개는 바로 쏘아붙일 정도의 직관이 있으니 화산파 아이보다 더 빠른 진전을 보고 있는 것이고.”

강정학의 말에 최현걸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면서 강정학은 목검을 원래 있던 자리로 던졌다.

“활검은 강자만이 논할 수 있는 사치스러운 주제일 뿐. 중요한 것은 검의 역할이란 내 적을 죽이기 위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협을 위해서든, 복수를 위해서든, 돈을 위해서든 혹은 또 다른 강한 목적의식을 갖고서든 말이다. 그 속에서 검은 치장할 가치 없는 흉기에 불과해.”

강정학은 목검이 제 있던 자리에 나동그라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작게 손짓했다. 그러자 강도혁의 허리춤에 있던 검이 검집에서 뽑혀 나가며 강정학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강정학이 씩 웃으며 천서은을 쳐다보았다.

“자, 그럼 천가의 딸 실력 좀 볼까?”

“실례 좀 할게요.”

천서은이 숙녀검을 뽑자 흑검의 검은 칼날이 햇빛 아래 광택으로 번들거렸다.

우르르릉!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팔공산 정상에서 울려 퍼졌다. 격렬한 파열음과 천둥벼락의 굉음은 어느덧 검총궁으로 검림의 검객들을 계속해서 올려보냈다. 그렇게 모인 검객들 눈에 강정학과 천서은은 얼핏 청룡백호(靑龍白虎)가 어우러져 싸우는 듯 보였다.

“맹주의 딸이라 대단하긴 하군.”

“비무는 아니군요.”

“어울릴 급은 아니죠.”

사위검총의 한 사람인 서저위가 격돌을 지켜보면서 중얼거리자 맹주태와 매연선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진도건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힐끔 보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맹주태의 말처럼 비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천서은의 공세를 강정학이 받아주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도로 천서은도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력이 아님에도 검림 검객들을 긴장시키는 그녀가 대단하다고 볼 수 있었다.

서저위는 다른 검객들과도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가 진도건을 흘끔 바라보았다.

‘적발적안의 혈마라……, 제 모습 그대로 드러내놓고 잘도 돌아다녔군.’

정말 눈에 확 띄는 외견이었기 때문에 진도건의 무딘 감각에 혀를 내둘렀다.

“저 빨간 머리가 진도건이요?”

“그렇네.”

“양 도령을 이겼다는 실력이 궁금하구만.”

“왜? 붙어보고 싶은가?”

서저위의 물음에 맹주태가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강정학 쪽을 보았다.

“총수께서 침 발라놨으니 구경이나 해야지요.”

“자네보단 매 검사가 더 겨뤄보고 싶어 할걸?”

“왜요?”

“저자의 쾌검이 천무방의 그 이혁성과 버금갈 정도라고 하네. 아니, 혈마가 되었으니 더 빠를지도 모르는데. 한번 시험해 보고 싶지 않겠어?”

서저위가 매연선을 돌아보며 묻자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눈에서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긴 했지만, 금방 식는 눈치였다.

“이혁성도 이길 자신이 없는데 그보다 빠르면…… 저도 구경하는 거로 만족할게요.”

“쩝.”

매연선의 완곡한 거절에 서저위가 입맛을 다시면서 미소를 지었다.

쩌엉!

거친 파열음이 터져 나오며 두 사람의 신형이 붙었다가 떨어졌다. 강정학이 가만히 손바닥을 들어 보이면서 마무리하고자 하려는 의사를 내비치자 천서은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겸손한 인사에 강정학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뭘 또 배운다고 하느냐? 사패련에서 봤을 때는 설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완전히 농익었구나. 천무경은 완성된 무인이라 평가하곤 하는데 과연 그의 딸이다. 아비의 위상이 높아서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이렇게 실력을 보니 천무경 젊었을 적 모습이 생각나는구나.”

“과찬이세요. 예상은 했지만,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기분을 총수께 또 느꼈으니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느껴집니다.”

“젊음이란 무기가 있으니 조급할 것 없다. 아니, 이런 조언도 필요 없이 어련히 잘 알아서 하겠지.”

강정학의 평가를 들은 강도혁은 내심 놀랐다. 천서은이 보여 준 무공도 정말 대단해서 자신과 겨뤄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 재능이 두려울 정도긴 하나 강정학의 입에서 이런 극찬은 세 제자 모두 받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도건의 곁으로 돌아가는 천서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강정학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강호의 대선배로서 후학의 재능 넘치는 모습은 그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즐거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진미(眞味)를 맛볼 차례인가……?’

하지만, 넘쳐나는 재능보다 더 궁금한 것이 바로 천서은을 토닥이며 격려하고 있는 진도건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천서은의 어깨너머로 진도건과 강정학의 눈이 곧장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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