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제31장. 검을 벼리다 (1)
날씨가 금방 따뜻해지면서 쌓였던 눈은 어느새 녹아 없어지고 팔공산 곳곳에 녹음이 푸르게 꼈다. 들판을 달려서 산자락을 따라 올라오는 바람은 무척 선선하니 열기를 식히기는 딱 좋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역시 지난겨울의 차가운 바람에 비해선 부족한 느낌이었는지 검총궁 안은 제법 열기가 맴돌고 있었다.
강정학은 상체를 모두 드러낸 채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는 중이었는데 온몸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맏아들 강도혁이 문밖에서 젖은 수건을 든 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얼마간 더 기다리자 강정학은 깊은숨을 토해내면서 눈을 떴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강도혁도 다가와 그의 땀에 젖은 몸을 닦아 주었다.
“진척은 있으셨습니까?”
“나가자. 덥다.”
검총궁의 작은 내부 공간은 강정학에게서 비롯된 열기 때문에 한증막처럼 후텁지근했다. 그가 앞장서서 나가니 강도혁도 바로 뒤따라 나갔다.
“좀 낫군.”
탁 트인 훼검암 근처까지 가서 허리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들이쉬었다. 선선한 바람 정도로는 열기가 쉬이 가라앉진 않았지만, 강도혁이 젖은 수건으로 닦아 주면서 물기를 더해주니 조금은 온도가 내려가는 느낌이어서 기분은 괜찮았다.
‘외공의 회복은 이제 이전보다 나은 수준까지 도달한 것 같군.’
강도혁은 부친의 드러난 몸을 닦아 주면서 과거보다 훨씬 단단한 근육들이 채워진 걸 보면서 적잖이 감탄하고 있었다. 연세가 여든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짧은 시간 동안 이 정도를 만들어 내는 게 정말 대단했다.
염황신마에게 당하여 상체 오른쪽에 큰 화상이 새겨져 끔찍한 몰골이었다. 운기마저 어려웠던 게 불과 두 달 전 일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극복한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강정학은 한 단계 더 올라가기 위한 각고의 수행을 거치고 있었다.
“거의 된 거 같다. 놈에게 오히려 고맙다 해야 할지. ……처절한 죽음이 뭔지 맛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저희도 결행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아, 일러두어라. 어느 때보다 날을 바짝 벼려두어야 한다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손님이 온다고 했던가?”
“안 그래도 지금 아랫마을에서 짐을 풀고 있습니다. 올라오라고 전할까요?”
“그래. 데리고 오너라.”
“예, 아버님.”
강도혁은 바로 산 아랫마을로 내려갔고, 강정학은 검총궁 안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들어오긴 했지만, 내부로 그림자가 져서 조금 어두운 감이 있었기에 그는 촛불들을 켜기 시작했다. 놀라운 점은 별도의 도구도 없이 엄지와 검지로 초의 심지를 가볍게 문지르자 불꽃이 피어오른 것이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행위처럼 차분히 다니면서 십여 개의 촛불을 모두 켜자 안이 제법 밝아졌다.
검총궁은 이름이 거창하긴 했지만, 그리 크지 않은 전각이었다.
천장이 다소 높으나 단층에 구조도 단순했다. 구조적으로 강정학이 머무는 방 하나와 차를 마실 수 있는 자리 그리고 연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이 연무장은 검림 소속 검객 100인이 모두 모여 총회(總會)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강정학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침상에 펼쳐 놓은 상의를 들어 입었다. 염황신마에게 입은 화상 부위의 열기가 쉬이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관리를 위해서 오른팔과 옆구리 부분을 터놓고 망사로 덧대어 제작한 것이었다.
입어 놓고 보면 팔과 옆구리가 다소 드러나긴 하지만, 거무튀튀한 망사 색깔 덕분에 실제로 흉터는 잘 보이지 않고 대신 통풍이 좋아서 답답함을 덜어낼 수 있었다.
천무경이 다짜고짜 찾아왔을 때는 어쩔 수 없었지만, 보통 손님이 온다면 그는 품위를 갖추는 것을 중시했다. 의복을 갖추고 수염과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나니 그 고고한 기상이 다시금 살아나는 듯했다.
오른쪽 눈 근처의 화상 흉터가 유일한 흠이긴 했지만, 한층 날카로워진 인생에서 그것은 문신 같은 느낌이 되었다.
강정학이 방에서 나와 연무장의 총수석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밖에서도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강도혁이 다섯 사람을 데리고 검총궁에 도착했다.
진도건과 천서은, 영은성과 최현걸 그리고 야율균은이 안으로 들어와 강정학을 보며 예의를 갖추었다.
“검림의 총수님께 인사 올립니다.”
강정학은 실눈을 뜨며 다섯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픽 실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재밌는 조합이군. 사파 둘, 정파 둘 그리고 마교 한 사람.”
강도혁은 움찔 놀라면서 마찬가지로 움찔거리는 야율균은을 돌아보았다. 함께 왔을 때는 조금 독특한 외모적 특징 때문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마교인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강정학은 화경의 고수로 어지간한 수준 안에서는 어떤 수준의 무공을 가졌는지 또 가진 내공의 특질이 어떤 것인지 간파할 수 있는 눈을 가졌기에 야율균은이 마교인인 걸 꿰뚫어 보았다.
야율균은은 강정학을 물끄러미 보았다.
“백령신검께서는 마공에 당하셨군요.”
“아아, 고생했지.”
야율균은의 직설적인 말에 강정학은 대수롭지 않게 답변했다.
둘 다 이미 서로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강정학이 다섯 사람을 보고 재밌는 조합이라고 한 건 다섯 사람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반면 야율균은은 그의 오른팔 부분에서 마공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염황신마와 싸워 상처를 얻었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네. 역시 천하오절인가?’
강정학에 대한 인상을 감상하던 야율균은은 문득 옆을 보았다.
강도혁은 그녀를 아니꼬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으니 마교에 대한 원한이 상당히 강한 것이 느껴졌다.
“도혁아, 엉뚱한 데 화 풀 생각이라면 나가 있거라.”
“죄송합니다, 아버님.”
강도혁은 바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푹 숙였다.
강정학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모두를 바라보았다.
곧 강도혁은 그들에게 앉을 방석을 나눠주었다. 하인들을 시킬 법도 하지만, 강도혁은 익숙한 듯 방석을 가져왔었다. 백령검왕이라는 별호에 어울리지 않아 배려받은 사람이 되려 어색해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이군. 천무경의 딸아이에 호위무사. 비무제에서의 실력은 꽤 인상 깊었지.”
“진도건이라고 합니다.”
“천서은이에요.”
“자넨 인상이 정말 많이 변했군. 속에 든 것도 심상치 않고 말이야.”
강정학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진도건을 보았다. 그는 진도건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강력한 기운의 고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중단전의 혈마단이었으니 진도건에게 지난 3년간 어떤 일이 있었을지 아주 흥미로웠다.
옆에 있던 강도혁도 그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적발적안의 모습을 한 그의 외형은 정말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을의 그늘진 곳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 색이 눈에 띄지 않았지만, 햇빛을 받자 금방 드러나 절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이쪽 세 사람의 소개도 들어볼까?”
“화산파의 영은성이라고 합니다.”
“개방의 소개 최현걸입니다.”
“야율균은이에요.”
“다들 훌륭한 자질들이 있어 보이는군. 야율균은, 그대는 이제 마교를 따르지 않을 생각인가 보지?”
“맞아요.”
야율균은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어색한 공기가 잠깐 감돌긴 했지만, 강정학도 그녀에 대해선 크게 궁금한 점이 없었기에 금방 시선이 옮겨졌다. 그녀에게선 염황종이라면 느껴져야 할 극양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직접 전할 서신이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 있습니다.”
진도건은 천무경이 주었던 서신을 바로 품에서 꺼내었다. 두 사람이 거리가 있어서 진도건은 막 일어나려고 했지만, 강정학이 허공섭물로 서신을 낚아채 가 버렸다.
그는 서신을 펼쳐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곧 표정은 진중하게 가라앉았다. 몇 번이고 내용을 반복해서 읽은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무거운 표정 때문에 다른 사람은 덩달아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도혁아.”
강정학은 눈을 감은 채 입을 뗐다.
“예.”
“자성이가 마교에 귀의한 모양이구나.”
“이 자식이 기어코…….”
강도혁이 이를 빠득 갈았다. 강정학이 아들인 자신보다 더 아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질투는커녕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양자성의 재능을 무척 아꼈다. 검림의 명성을 드높일 줄 알았던 기대감이 배신당한 순간 느낄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짐작하고 있던 결과라 하더라도 현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쓰린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내 셋째는 적의 편이 되었는데 천무경 이 자는 딸려 보낸 녀석들을 봐달라니. 날 조롱하는 건 아닐 테고…….’
강정학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젊은 무인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임무를 받아 사천에 간다고?”
“그렇습니다.”
“좌 단주가 얘기하기로 마교와 창천맹의 대치에서 가장 핵심이 될 지역이라고 하던데. 부담스럽겠군.”
“어떻게든 되겠지요.”
진도건의 대답에 강정학이 피식 웃었다.
“태평한 소리를 하는구나.”
“하하하.”
진도건은 웃기만 했으나 강정학은 그걸 자신감으로 받아들였다.
내공 수준이 변변찮았던 지난 기억을 돌이켜 본다면 지금의 진도건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어림잡아도 백령검왕으로 이름 높은 자기 아들과 실력을 겨뤄도 왠지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문득 비무제에서 보았던 그 절륜한 쾌검을 떠올리자 생각을 뒤집고야 말았다.
게다가 바로 옆의 천서은도 이미 떡잎부터 남달랐음을 알았는데 이젠 무림의 강자다운 기백이 은연중에 풍기고 있었다.
정파의 두 제자도 한눈에 뛰어난 재능들임을 알아보았다.
개방의 최현걸은 그 후계자답게 차근차근 완성되어가는 느낌이었고, 화산파의 영은성도 매화검수로서의 기개가 바로 느껴져서 명문정파의 제자다운 면모가 보였다.
그들을 살펴보니 천무경이 서신에 적은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왜 이들을 봐달라고 했는지 진의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이 먼저 영은성에게 닿았다. 얼굴에 드리워진 고민을 읽은 탓이었다.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어느 수준인지, 닫힌 문을 열고 세상에 나온 그들이 다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필요할 터. 정사의 은원이 사라진 건 아니라 서로 간 껄끄러움은 있겠으나 혹여 물어볼 것이 있다면 물어봐라. 도와주마.”
“아! 가, 감사합니다.”
영은성은 놀라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자타공인 천하제일검이 도움을 준다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으랴.
그는 최현걸에게는 검림의 검객들과 비무를 권하였다. 천무경의 서신에는 수련에 큰 뜻이 없는 야율균은을 제외하면 네 사람에게 필요한 점을 하나씩 짚어 주었으니 강정학은 그에 따라 진단하여 방안을 주는 것이었다.
최현걸은 타구봉법의 난해한 초식에 숙달할 필요가 있었으니 검림의 검객들과 비무를 하도록 하였다. 천하의 다양한 특징의 검객들이 모여 있는 검림인 만큼 경험을 높여 주기에 충분한 환경이 될 수 있었다.
강정학은 마지막으로 진도건과 천서은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너희는 화산파 아이와의 면담이 끝나면 이 노부를 상대해야 할 것이다.”
강정학의 웃음기 곁든 으름장에 진도건과 천서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