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제30장. 마성본색(魔性本色) (6)
구마진은 절대자의 강림을 외치는 그 함성과 함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대마의에게서 손 떼라.”
맑고 투명하며 또 그 속에서 기품과 중후함이 느껴지는 음성 그것은 분명 천마신교 교주 단지운의 목소리였다.
흡성대법을 펼친 지 몇 분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기실 흡수한 양은 기대보다 적었다. 아직도 넘쳐나는 유변의 하단전 속 내공이 눈에 훤히 보이는데도 그는 군말 없이 자신의 강렬한 탐욕을 거둬야만 했다.
본능적인 감각이 생존의 경종을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옥죄었던 기운들이 소멸하고 손목을 붙잡혔던 것도 풀리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유변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사마월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으나 흡성대법을 통해 강제적으로 기운이 빨려 나가면서 기혈이 들끓고 있었다.
구마진은 급히 돌아서서 무릎을 꿇었다.
“광명대천! 천마군림! 신교의 종자 구마진이 교주님을 뵙습니다.”
무릎을 꿇으며 잠깐 스치듯 봤지만, 건장한 체격과 귀공자의 풍모가 느껴졌다. 황룡(黃龍) 자수는 보이지 않았으나 남색 바탕의 복색은 분명 천마 단지운의 취향이 맞았다.
“끄으…….”
유변이 흡성대법을 당한 후유증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마진은 단지운이 그의 인사를 받았는지는 모르나 그를 지나쳐 유변에게 걸어가는 발을 흘끔 보았다. 유변의 내상을 다스리는지 들려오던 신음이 점차 줄어들었다.
때마침 마을에 들어선 모홍도가 단지운을 발견하고 무릎을 꿇었다.
“광명대천! 천마군림! 청의향의 모홍도가 교주님을 뵙습니다.”
“모홍도는 사마월의 상처를 돌보고 혈마종의 종자들은 청의향에서 의원들을 모셔와 부상자들을 수습하라.”
“존명(尊命)!”
“존명!”
일사불란한 외침과 움직임의 기척들이 들려왔음에도 설매화와 11인 흑각수, 구마진 그들 누구 하나 엎드린 채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단지운이 이곳에 나타난 순간, 그들은 출발할 때를 상기할 수밖에 없었다.
“구마진, 내가 너에게 내린 명령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쿵!
구마진은 이마를 땅에 세게 찧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구마진은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통현의 혈마종과 유변, 사마월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었지만, 단지운은 여전히 두려운 존재였다.
“흐음……!”
유변도 차츰 고통이 가라앉으면서 상태가 괜찮아지자 짧은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괜찮습니까?”
“…교주시군.”
“일이 이렇게 되어 송구합니다.”
“쿨럭, 쿨럭! …아닐세. ……교주령을 거역한 노구의 잘못이지. ……뜻대로 하시게.”
유변은 힘없이 중얼거렸다.
단지운의 등장으로 다행히 위험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직접 모습을 드러내면서 구해 준 이상 유변도 계속 고집 피우면서까지 교주령을 거부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단지운은 유변 모르게 만든 홍천환으로 구마진을 혈마로 만들어버렸다. 거기다 이렇게 구마진을 보내고도 뒤쫓아와 직접 나타난 것을 보니 어쩌면 그의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실제로 그의 예상이 정확했다.
천마조사와 태상교주 2대에 걸쳐 가까운 관계를 이룬 유변을 단지운이 직접 위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혈마로 만든 구마진을 이용한 것이었다. 원하던 힘을 얻은 구마진은 흥분해서 사고 칠 게 분명했고 그런 상황을 보다가 적절한 순간에 개입하여 구제한다면 유변으로서도 더는 거부하지 못하리라 여긴 것이다.
단지운에게 보살핌을 받는 유변이나 엎드려 꼼짝 못 하는 구마진이나 같은 짐작을 하고 있었으니 한층 더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단지운은 유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닙니다. 저의 불찰로 어르신을 불편하게 했으니 아버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부상자들이 모두 회복될 때까지는 구마진의 지위 임명에 대한 교주령을 유예하겠습니다.”
교주령의 유예.
결국은 혈마 구미진으로서 지위를 확정 짓는 발언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유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고맙네.”
유변은 단지운의 손길을 밀어내면서 스스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다친 혈마종 무사들에게로 가서 그들의 부상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의 입은 진찰 목적 외에는 쉬이 열리지 않았고 표정은 계속 무거웠다.
유변의 뒷모습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단지운은 구마진에게 눈길을 돌렸다.
“구마진.”
“하명하십시오.”
“일어나라.”
구마진은 잠시 멈칫했다.
별말 없이 일어나라고 하는 것을 보니 무던하게 넘어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조금 안도했다.
팟!
막 몸을 일으켰을 때, 단지운의 신형이 그의 앞에 솟아올랐다.
퍽!
“끄윽……!”
반응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단지운의 좌장이 구마진의 명치에 적중했다. 평범하게 때린 거 같아 보였지만, 구마진은 그대로 널브러진 채 눈을 까뒤집고 부들부들 떨어댔다. 금방 입가에 게거품까지 물 정도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엎드려서 상황을 보지 못했지만, 들려오는 신음이 구마진의 것임을 깨달은 설매화와 흑각수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부상자들 수습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유변과 다른 무사들 또한 깜짝 놀라 잠시 단지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각수.”
“예!”
엎드렸던 흑각수 11인이 즉시 몸을 날려 다가와 부복하였다.
“대마의께 불손을 저지른 구마진을 천산 박격달봉 정상의 빙첨탑(氷尖塔)에 30일간 금제하라. 만년한철(萬年寒鐵) 사슬로 사지를 따로 결박하고, 하루 정오에 한 번 미음을 먹이는 것 제외하고는 어떤 음식도 먹여서는 안 된다.”
“…그, 그것은……!”
“왜 대답이 없지?”
“조, 존명!”
단지운은 흑각수들을 흘겨보고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쉬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벽.”
단지운의 부름에 벽이 그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부복하였다. 환상무형술로 멀리서 숨어 있던 그는 이미 단지운의 전음을 받고 근처에 와 있었다.
“형벌의 공정성을 위해 미음을 주는 역할은 그대가 실행한다. 그 외 설매화와 흑각수는 30일이 되기 전까지는 접근 금지다.”
“존명.”
단지운은 흑각수나 설매화가 명을 어기고 구마진의 편의를 봐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 임무를 벽에게 돌린 것이다. 벽은 구마진을 싫어했으니 고개을 숙였어도 입만은 웃고 있었다.
“끌고 가라.”
구마진은 몸에 침투한 천마진기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 고통은 제대로 당하면 누구도 저항할 수 없었는데 구마진은 무방비로 중단전에 직격당하였으니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릴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단지운은 착잡한 표정으로 자기 쪽을 흘겨보는 유변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의를 갖추었다.
천마신교의 절대자로서 정직한 면과 음흉한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대마의 유변에 대한 태도는 깍듯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던 유변은 다시 몸을 돌려 환자들을 살폈다.
구마진은 흑각수들에게 끌려갔고 반 시진 정도 뒤에 청의향의 의원들이 총동원되어 대통현에 도착하였다. 유변은 의원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환자들을 살폈는데 의외로 단지운도 자리를 뜨지 않고 일손을 도왔다.
천마신공의 천마진기는 최악의 살상력을 가진 마도 최고의 마공이었지만, 반대로 만마(萬魔)의 근원 격인 이유로 마공을 익힌 자들을 회복시키는 데도 도움을 주기에 적합했다. 정파에서 소림, 무당 등이 가장 정순한 내공심법을 다루는 문파이기에 내상에 대한 내력치유에 탁월한 만큼 천마신공도 마공에 대해서 그런 위치에 있는 셈이었다.
이날 이후, 단지운은 마원당에서 유변의 신상을 돌보다가 사흘 뒤 떠났다.
떠나는 날 어디로 향하는지 유변이 묻는 말에 단지운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훌훌 털고 우루무치에서 나왔으니 당분간은 개인 휴가를 즐기려고 합니다.”
* * * *
천산 박격달봉 중턱의 작은 오두막.
무영각 소속 사가 지키는 호수의 깊은 곳까지 들어가면 찾을 수 있는 수중동굴, 그것을 지나 나오는 비밀스러운 용암동굴 안에는 엄청난 마기가 응집되고 있었다.
응집된 기운의 중심엔 양자성이 술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천마동 안에 그려진 술진은 단원진이 천혼제정대진을 개량하여 펼쳐 놓은 것이다. 이는 인간에게 직접 사념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특별한 제어를 할 수 있었다. 그 제어란 바로 마성을 형성하는 일이었다.
중단전의 정(精)은 오욕칠정(五慾七情)에 오염되기 쉽고 세상에 만연한 사념과 원념 등은 이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술진 내에서의 수련이란, 바로 이 정을 오염시키는 과정을 말함이며 이는 즉, 진정한 마성을 갖추고 마정을 이루는 고된 시련이라 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러한 사념과 원념은 자연 속에서도 존재하지만, 무덤이나 숱한 생명이 죽은 옛 전쟁터에서도 더 농도 짙은 수준으로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용암동굴은 정로말 특정 원인이 될만한 것을 찾을 수 없음에도 이상하리만치 원념이 아주 강하게 집약된 곳이었다.
이는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빠른 속도로 마성과 마정을 구축하기에는 아주 적합하였다. 단용후가 이곳에 10개 동굴을 설치하고 천마동을 비롯하여 각 신마를 위한 동굴에 모두 각기 다른 천혼제정대진을 설치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공의 본질을 깨우치고 진정한 힘을 얻기 위한 작업.
구주마종의 각 신마의 마공은 모두 특성이 달랐기에 그들에 맞도록 술진의 설계를 조정할 필요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모두 선대 신마들의 그러한 공이 녹아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단지운이 이곳 천마동에서 각성하여 떠났고, 흑풍신마 야율강이 불의의 사고로 죽자 그 아들 야율재가 이곳에 와 명마동(冥魔洞)에서 각성하여 떠나기도 했다.
오직 술진이 설치되지 않은 곳은 혈마동 뿐이었는데 적합한 시료가 없기 때문이었다.
구마진이 복용한 네 번째 홍천환은 단지운이 신교의 결집과 전쟁 준비를 위하여 전통의 방법으로 우루무치 인근의 화장터에서 제조한 것이었다. 혈마종을 움직일 ‘혈마’가 필요했고 흡성대법을 익힌 구마진이라면 어설픈 홍천환이라도 충분히 각성이 가능한 일이라 보고 수년 전부터 설계한 일이었다.
종남산에서 발견된 홍천환을 입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미봉책이었으나 일월신마의 기행(奇行)으로 인하여 결국 차선으로 실행된 셈이었다.
물론 이런 일련의 과정을 설계하고 지시를 한 사람은 바로 태상교주 역천마제 단원진이었다.
그런 단원진이 지금 만족스러운 눈으로 양자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빠르게 천마의 마성을 받아들이고 있군. 지닌 내공도 천마신공을 통해 마기로서 제대로 치환하고 있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힘의 갈망이 대단한 놈이야.’
단원진은 이미 양자성을 제자로 들인 시점부터 한 가지 생각을 확실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은밀하고도 음험한 계략이었으며 누구에게도 알려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들인 단지운조차 알려 줄 수 없었다.
‘후후후……!’
단원진은 속으로 웃으면서 천마동을 빠져나왔다.
천마동 입구 앞 긴 공동을 지나 빠져나오자 용암동굴의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좌우 부채꼴 형태로 펼쳐진 단층마다 괴석상이 불꽃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고 각 동굴로 통하는 입구들도 보였다.
이곳에서는 마실 물 외에는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으니 도가에서 애용하는 벽곡단과 건량, 육포 등을 공수해와 비축해 두고 있었다.
단원진도 항상 주머니에 소량의 말린 음식물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열어 육포 하나를 꺼내고는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흘러내렸던 용암으로 인해 나타난 벽의 물결무늬와 여기저기 솟아오르고 내린 종유석, 석순 등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일렁이는 횃불로 인해 발생하는 그림자와 함께 춤을 추곤 해서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주백자와 있었던 격전으로 인해 대부분 부서졌거나 상처가 나서 과거의 운치를 찾아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적적하고 고요한 공간 속에서 그 격전의 흔적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풍경은 묘한 두근거림을 선사하곤 했다.
주백자로 인해 처음 느껴본 대적의 존재는 오래되어 식은 줄 알았던 무인으로서의 투쟁심을 자극하는 일이었기에 종종 여기에서 그때의 대결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반복해서 아쉬움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무저갱의 지옥 속에 떨어져 이후로 감감무소식이니 죽음은 기정사실.
하지만, 일월신마와 함께 힘을 합쳤어도 제대로 쓰러뜨리지 못했던 필사의 강적이 남겨준 기억의 상처는 아직도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단용후로부터 시작하여 세대에 걸쳐 세워진 장대한 계획 속에서 우연히 만난 짧은 인연은 그 어떤 원념이나 오욕칠정의 자극보다 아주 선명하고 짙은 흉터를 영혼에 새긴 셈이었다.
햇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용암동굴의 어둠 속에서 횃불들의 일렁이는 붉은 화광(火光) 아래 선 단원진의 눈빛에 섬뜩한 현기(玄氣)가 맴돌았다.
“크크크… 크크크크크……!”
나지막한 냉소의 운율에 맞춰 그의 그림자가 귀신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