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제30장. 마성본색(魔性本色) (3)
우웅우웅우웅……!
그의 호통에 대기가 부르르 떨었다.
저마다 부상 당해 쓰러져 있고 구마진은 쓰러진 자들로 이뤄진 산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늘어져 있는 한 사내의 멱살을 쥔 채 고개만을 돌려 유변과 사마월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 흉광이 번뜩였다.
장내를 살피는 유변의 얼굴엔 당혹감이 떠올랐다.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설매화와 11인 흑각수는 지루한듯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거의 2백여 명이나 쓰러져 신음하는 이 상황에 단 한 가지도 개입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정도의 숫자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그의 무력이 숫자로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으로 성장했다는 얘기였다.
‘심각하군.’
호통을 치긴 했으나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구마진의 목적은 교주령을 따르지 않는 혈마종을 굴복시키는 데 있는 거 같지만, 그렇다고 단순하게 그리 이해하기에는 구마진의 음흉함이 마음에 걸렸다.
“구마진!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유변이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을 때, 사마월이 앞으로 나서서 호통을 쳤다.
“클클클! 여어! 오랜만이야, 사마월. 여독이 너무 쌓여서 말이야. 이렇게 몸 풀고 있는 것일세. 어쩌면 자네랑도 한바탕해야 할지 모르잖나? 크하하핫!”
구마진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들고 있던 자를 던져 버렸다. 우당탕 널브러지는 사이에 밟고 있던 자들에게서 내려온 그가 사마월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 뒤의 유변을 바라보았다.
“대마의 어르신께 인사 올립니다.”
구마진은 유변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유변은 그 인사의 예의보다 깊이 고개를 숙인 아래 숨겨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자네의 이 행태는 받아들이기 어렵군. 혈마종의 자리에 욕심이 있는 건 알고 있으나 이 사태를 일으키다니. 교주께서 이런 일까지 지시하진 않았을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 대마의 어르신. 하지만, 교주령으로써 명령서를 들고 왔음에도 저를 쫓아내고자 한 이 자들에 대해 신교의 중임자로서 훈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내 수명이 황혼을 걷고 있는 건 맞으나 그 정도 이해를 못 할 정도로 총기가 죽지는 않았네. 다만 의도가 이해가 안 가서 말일세. 이 정도까지 일을 벌인 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내게 먼저 와 그 교주령을 들이밀 수도 있었을 텐데?”
“지금이라도 드리지요.”
구마진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유변에게 던졌다.
유변이 서신을 붙잡아 펼쳐서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직인은 분명 천마인이었다.
“자네를 혈마로 임명했다는 내용이군. 하지만, 그렇다 해도 자네는 혈마가 아니지. ……그게 중요한 거야.”
“으하하! 교주께서 절 혈마로 임명하셨는데, 아니라고 하니 당혹스럽군요.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만.”
유변은 피식 웃었다.
“뭐 자네야 그 자리에 욕심은 있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혈마는 이미 나타나 버렸다네.”
구마진이 떠들면서 했던 과장된 몸짓이 멈춰 섰다.
“하하…….”
웃음을 흘리면서도 당황하는 그의 반응을 보면서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설매화의 표정에 묘한 웃음이 띠었다. 정말 오랜만에 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과 비슷하게 혈마종 사람들도 유변의 말을 똑똑히 들었기에 그에게로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아직 멀쩡한 사람들도, 부상에 신음하는 사람들도 고통을 잊고 유변을 바라보았다. 그만큼 유변이 방금 내뱉은 말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구마진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조금은 가라앉은, 그러나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유변을 쏘아보았다.
“혈마라……, 누굴 얘기하시는 겁니까?”
“흐음.”
유변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어제 사마월에게 알려 주려 했다가 예기치 않은 소식에 시점을 놓치고 미뤄뒀던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몽골 초원에서 전쟁을 주도하던 흑풍신마가 죽고 흑풍마종이 무너졌다는 걸 알고 있느냐?”
“알고는 있소. 황군의 조씨 장수들에게 무너졌다고 해서 놀라긴 했는데…….”
말하면서도 말끝을 흐리는 이유는 그 정보가 신빙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에 참여했던 흑풍신마와 흑풍대는 전멸하였고 몽골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초원 북쪽으로 달아났다. 황군도 대부분 해산하여 개봉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천마신교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주 제한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천마신교는 정기적인 연락이 끊긴 것으로 인해 뒤늦게 정보를 수집하러 간 상황이었고 그런 가운데 얻어낸 것은 조태상, 조태번이라는 두 장수의 이름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한된 정보 속에서 황군의 장수가 흑풍신마 야율재를 쓰러뜨렸을 거라는 흐름은 개연성이 너무 부족했다.
유변은 사마월을 슬쩍 보았다.
“미안하지만, 자네를 거칠 정보 하나를 내가 먼저 본 일이 있었네. 뭐 이런 게 전혀 없었던 일은 아니었으니 바로 자네에게도 알려 주는 게 정상이었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는 걸 이해해 주게.”
“물론입니다. 헌데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몽골족으로부터 입수한 정보였네. 흑풍신마와 흑풍대는 몽골족을 징발하여 북부대장군 남양과 전쟁을 벌였다. 조태상과 조태번 두 사람이 이끄는 원군과 합류한 이후로 전황은 급반전하였으며 시라무렌 강 인근에서 벌인 대회전에서 패배 및 전멸하였음. 이때 황군뿐만 아니라 창천맹에서 파견한 1000명에 이르는 무림인이 참전하였는데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야율재의 죽음에 직접 관여하였음. 한 사람은 창천맹주 파천무봉 천무경의 딸, 백봉천녀 천서은. 다른 한 사람은 과거 화산에서 일월신마가 홍천환을 먹이고 혈마로 폭주시킨 탈명검 진도건.”
“……진도건?”
구마진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일월신마가 진도건이란 자에게 그가 취했어야 할 홍천환을 멋대로 먹였다가 그의 죽음조차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크게 분개한 기억이 있었다. 2년 전 혈마종을 내놓으라고 유변과 이곳 대통현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쫓겨난 일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유변은 구마진의 반응을 슬쩍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천서은도 강했으나 야율재에게 역부족이었다. 야율재를 마무리한 건 진도건이었다. 그의 눈과 머리카락이 붉었으며 검은 언제나 붉은 기운을 뿜어내었다. 목격담들을 종합해 본 결과 화산에서 혈마로 폭주할 때와 같은 힘을 보여 준 것으로 보이며 성공적으로 혈마가 된 거로 보인다. 다만 현재 추정되는 행보는 창천맹 귀환으로 확인된다.”
“크하하하핫!”
유변의 말이 끝나자 구마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의 반응과 다르게 사마월뿐만 아니라 혈마종 무사들 사이에서 당혹감과 그 웅성거리는 반응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영감.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라, 글쎄. 혈마종을 이끄는 대리자로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것이지.”
구마진이 턱을 꼿꼿이 세운 채 유변을 아니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창천맹에 혈마종을 갖다 바치는 배신을 저지를 참인가?”
예상외의 말에 흠칫 놀라는 사람도 있었으나 유변은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저 내가 만든 마지막 홍천환을 복용하고 혈마가 된 자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네. 천마조사 단용후께서 내게 내린 은혜를 배신할 수는 없고 단 태상이 내게 준 배려를 져버릴 수도 없네. 그저 난 내 권한과 책임으로서 인내하고 지켜볼 뿐이지.”
“흐하하하하! 어이가 없군! 신교에 힘을 실어주지 않는 무력집단이 무슨 의미가 있지?”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네. 자네를 혈마로 임명하는 천마령이 내려졌다고는 하나, 이것은 단 태상이 직접 와서 날 설득할 문제이네. 물론 교주께서 혈마종의 지원을 요청하신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하여 따르겠네. 자네는 이만 돌아가 내 말을 전해나 주시게.”
“하하하하…….”
유변의 말에 잠시 웃음을 흘린 구마진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일순 주변 공기가 심상치 않게 변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무서운 투기가 냉소를 머금는 구마진에게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유변의 평온한 표정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네, 후회할 짓을 하려 하는군.”
“아니. 나는 이제 후회할 짓을 하지 않아. 영감도 영양가 없는 말 길게 떠들었으니까 나도 좀 지껄여 보지. 영감이 만든 지금의 명천단, 명현단은 참 대단한 영약들이야. 마공의 속성을 살리면서도 주화입마를 일으키지 않도록 마성이 싹트는 것을 크게 늦췄으니까. 하지만, 그게 오히려 한계를 만들어버렸어. 저 수천에 이르는 혈마종에서도 나를 애먹일 정도의 고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마공의 근간인 마성이 피어나지 않기 때문이야. 그런 의미에서 영감의 진정한 걸작은 명천단 따위가 아니라 홍천환이지. 그렇지 않은가?”
“무공의 경지를 마성의 유무로만 판단하는 자네의 견해가 한심하군. 마공이라 해도 참된 경지에 오르는 길은 다를 바가 없네.”
“크하하하! 물론 그렇기야 하지. 그러나 지름길을 막은 것은 부정할 수가 없을걸? 아무리 강력한 마공들을 익히면 뭐하나? 마인은 마인다워야지.”
구마진의 지적은 천마신교 내에서도 존재하는 한 부류의 견해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주화입마는 마공이 갖는 양날의 칼로 심오하게 파면 팔수록 피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것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자는 정말 소수에 불과했다.
유변이 개발한 명천단과 명현단은 정말 많은 마인을 양성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고, 이는 천마신교와 구주마종 모두 전력을 급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주화입마에 빠진 자는 유변이 직접 구해내기도 했으니 그가 대마의로서 칭송받는 것은 당연한 명예였다.
하지만, 일부 마종에서는 그리고 일부 마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마성을 마주하길 원하는 자들이 생겼다. 일부는 아예 초기 내공을 향상하는 데만 명천단을 활용하고 명현단은 배제하는 자들이 생겼고, 일부는 오히려 마성을 보기 위해 기타 각성제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곳도 생겼다. 일부는 아예 유변의 영약들을 배제한 채 마공 자체를 깊이 파고들면서 순수성을 강조하는 자들도 생겼다.
구마진은 바로 그런 세 번째에 해당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그의 목적성은 매우 집요하였으니 결국 흡성대법까지 익힌 것이었다.
“각자 부작용 정도는 감수할 각오를 하면서 선택하는 일이지.”
유변의 대답에 구마진이 조소를 머금었다.
“뭐 좋아.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영감이 최초로 완성한 홍천환은 내게 완벽한 영약이나 마찬가지였어. 마성을 확실히 만들어 주니까. 그런데 왜 이걸 당신은 더 만들지 않을까? 왜 ‘천혼제정대진’으로 더는 홍천환을 만들지 않을까? 글쎄, 영감의 의도 따위 나는 관심 없어.”
유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