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 제30장. 마성본색(魔性本色)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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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진은 천마신교 내에서 독특한 존재였다. 그는 태생부터 마도인으로서 단용후에게서 파생된 마공 백귀마공(百鬼魔功)을 익혔고 그의 특출난 야심을 인정한 단원진이 흡성대법까지 전수하면서 신교 내 강자로서 자리매김한 자였다.
하지만, 그는 구주마종의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갖추었으나 다른 여덟 신마에 비해 두드러지지 못했다. 닥치는 데로 살인을 저지르고 내공을 흡수하면서 화경 고수 못지않은 내공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수천 가지의 기운이 혼재되면서 높은 경지를 이루지 못하는 걸림돌이 된 것이었다.
다만 섭혼(攝魂)의 공능이 있는 백귀마공과는 그럭저럭 어울리면서 아직 주화입마에 빠지진 않았지만, 잔인하고 제멋대로인 성정이 더욱 심해지고 무공도 강해져 위협적이니 어느새 모두가 꺼리는 그런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를 따르는 11명의 무사는 흑각수(黑角手)라고 불리는 구마진이 직속으로 꾸린 조직이었다. 그는 언제나 돌출된 존재로서 신교 내에 자리 잡길 원했기에 ‘검은 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 모두 구마진처럼 재능을 인정받고 마도인으로서 신교가 직접 키워낸 인재들이었으나 마찬가지로 결국 한계를 맞이한 이후, 구마진을 따르게 된 자들이었다.
설매화는 구마진만큼 독특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본래 무영각 출신으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진 벽과 동료이자 연인 사이였다.
구마진이 입지를 다지기 시작하자 그녀는 ‘매’로서 벽과 함께 구마진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다만 그녀가 벽과 다른 점은 음지보다 양지에서 활약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고, 힘과 지위에 대해 분명한 욕심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구마진에게 접근하여 흡성대법과 더불어 상성이 좋은 백귀마공을 함께 전수받았다. 물론 그 대가로 연인인 벽을 버리고 구마진과 동침하게 되었으니 벽이 구마진을 보는 눈길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환상무영술로 숨은 벽을 포함한 14인은 청해호 북쪽을 통과하여 서녕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녕의 북부 산지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두 개의 마을로 갈 수 있었다.
하나는 대마의 유변이 의원들과 함께 마을을 꾸린 청의향이 있었고, 그보다 조금 더 동쪽엔 아주 작은 촌락 수준이었다가 혈마종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서녕 다음가는 거주지로 발전한 대통현이 있었다.
구마진과 설매화는 부하들과 함께 청의향을 지나쳐 대통현으로 가고 있었다.
구마진은 이미 2년 전, 한 차례 두 곳을 모두 방문한 적이 있었다.
목적은 혈마종 지휘 권한의 양도 요구였으나 자격이 없다면서 거절당했었다. 특히 대통현에서는 오히려 공격을 받아 쫓겨나기까지 했었다.
그가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도 역시 같은 목적이었다.
대통현에 진입하는 순간, 미리 소식을 듣고 그들이 올 걸 알고 있었던 마을 사람들은 이미 입구를 향해 둘러선 채 구마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가진 혈마종 사람들과의 대치는 구마진에겐 그저 짜릿하고 흥미로운 상황에 불과했다.
“클클클! 오랜만이야, 친구들. 잘들 지냈나?”
구마진은 두 팔을 높이 흔들면서 소리쳤다. 그의 과장된 표정, 몸짓, 어투 등은 혈마종 무사들의 심기를 건들기에 충분했다.
“왜 왔지?”
“이게 누구신가? 양호(兩虎) 영감 아닌가?”
구마진은 친한 척 너스레를 떨었으나 부양호(部兩虎)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추존된 현령(縣令)이자 혈마종 가운데서도 가장 고강한 실력을 자랑하는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젊었을 때 사부를 따라 함께 귀의하였다가 이제 사부는 명을 달리하고, 그는 긴 세월을 넘어 혈마종의 여론을 관리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고령이었지만, 여전히 노쇠함이란 걸 모르는 노고수였다.
“용건이나 말해라. 우리는 널 환영하지 않으니.”
“이젠 날 따라 정벌전에 참여해야 하지 않느냐? 언제까지 신교의 기둥 한쪽을 차지한 채 밥만 축낼 셈이냐?”
“적격자가 명령하면 우린 따를 것이다. 그렇게 맹세했으니. 하지만, 그게 너는 아니야.”
구마진은 여전히 웃는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큰 적대감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보였지만,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자들도 제법 보였다. 그들 대부분은 중원의 추억은 없을, 마도의 영향만을 받고 자란 젊은 무인들이었다.
“그렇다고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무사들을 말리면 쓰나?”
“혈마종은 한 몸이고 적격자를 따르기로 한 것이 우리를 지탱하는 강력한 결속이다. 그걸 존중하는 것이 바로 교주님의 의지이시고 여기에 너 따위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부양호의 발언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겉보기에 여전히 이들의 결속은 꽤 단단했고 젊은 세대들은 다소 불만은 있음에도 지켜보는 걸 선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마진의 시선은 바로 그들에게 향했다.
“참 아깝군. 딱 보기에도 훌륭한 기백을 가진 친구들이 많은데 말이야. 내가 혈마종의 수장이 된다면 자네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길 텐데. 아쉬워, 아쉬워!”
구마진의 발언에 몇몇 젊은 무사들은 몸을 돌렸지만, 몇몇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일부에게서 반응이 나올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던 부양호는 더는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만 떠나라. 너와 할 얘기는 없다.”
“왜? 난 좀 더 얘기하고 싶은데.”
“썩 꺼져라.”
부양호는 그 말을 내뱉고 휙 돌아섰다. 그의 반응에 따라 혈마종 무사들도 몸을 돌리려는 찰나 구마진이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차기 혈마를 앞에 두고 그렇게 무시하면 쓰나?”
“너 따위가 입에 올릴 이름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으르렁거리며 노기를 드러내는 부양호를 보면서 구마진이 연신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품에 손을 집어넣더니 서신을 하나 꺼내 부양호를 향해 던졌다.
부양호는 못마땅한 눈으로 구마진을 쳐다보고는 받아든 서신을 펼쳤다. 그리고 곧 그의 인상이 크게 일그러지더니 서신을 땅에 집어 던졌다.
“너 그거 실수하는 거야.”
구마진이 이죽거리면서 말했다.
“뭐라 쓰여 있습니까?”
구마진의 반응에서 이상한 점을 느낀 혈마종 무사 하나가 부양호에게 물었다.
“…구주마종의 일주(一柱) 혈마종의 혈마로 구마진을 임명한다. ……헛소리!”
부양호는 조용히 서신 내용을 사실대로 읊었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머지 강하게 소리쳤다.
다른 혈마종의 무사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구마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핫핫! 다시 인사 올리지요. 여러분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이 사람, 혈마 구미진이올시다.”
“닥쳐라!”
“이봐 부 영감, 설마 천마 단 교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셈인가?”
“네놈의 조작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하하! 천마인(天魔印)을 보고도 그딴 소리를 지껄인다고?”
부웅!
부양호는 등에 걸어둔 칼을 뽑아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혈마종 무사들도 모두 자신의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11명의 흑각수도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면서 구마진 앞을 가로막았다.
어느새 흉흉해진 장내의 상황 속에서 구마진은 여전히 여유롭게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반역인가?”
“농간을 부린 대가를 치러야지.”
2년 전에도 지금과 비슷했다. 그리고 구마진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쫓겨나가야만 했다.
2년 만에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그가 흡성대법으로 2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으면서 내공을 흡수하였는지는 모르나 혈마종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지배적이었다.
“큭큭큭!”
구마진은 흑각수들을 밀치면서 한참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부양호와 좌중을 훑어보더니 손바닥을 내밀고는 손가락들을 까닥거렸다.
“내 수하들이 될 놈들이니 목숨은 빼앗지 않겠다. 기꺼이 혼나고 싶은 자들은 덤벼라. 혈마로서 반항하는 자들을 위한 훈육을 해 주마.”
자신 있게 도발을 하는 구마진을 보며 부양호는 그 거만함에 치를 떨었다.
“건방진 놈! 모두 쳐라!”
그의 열화와 같은 호통이 떨어지자마자 십수 명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구마진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덤벼라!”
유변과 사마월은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서 차를 기울이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는 고요했으나 긴장감이 있었고, 표정은 평온했으나 보이지 않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달려온 모홍도가 전하는 말에 두 사람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구마진이 대통현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먼저 오지 않고……!”
“기어코 그자가…….”
두 사람이 으르렁거리며 곧바로 정자에서 내려왔지만, 이어지는 모홍도의 전언은 두 사람의 안색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그, 구마진 그자가 본인을 혈마라고 지칭했는데 단 교주님의 명령이랍니다.”
그 말에 유변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세.”
세 사람은 동시에 유변의 마원당과 청의향에서 떠났다. 서둘러 경공을 펼치는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다급했기에 이를 발견한 청의향의 의원들과 주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변과 사마월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 데다가 이런 움직임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청의향과 대통현의 거리는 일반인들에게는 한 시진 거리지만, 무림 고수들에겐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히 도착할만한 거리였다.
“먼저 가십시오.”
모홍도는 두 사람이 괜히 자신의 보조를 맞추는 거 같아서 급히 외쳤다.
“먼저 가겠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유변과 사마월은 앞으로 멀찍이 튀어 나갔다. 그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모홍도가 민망해진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산등성이를 넘으면서 나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산림을 돌파하듯 넘어가는 두 사람의 등장에 쉬고 있던 산새들이 일제히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대마의의 무공이 죽지 않았구나.’
유변이 바깥 생활을 거의 하지 않으며 생불처럼 마원당을 지키고 있음에도 이 정도 수준의 경공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사마월은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는 한 가지 우려가 있었다.
2년 전 구마진이 청의향에 와서 발작을 일으키듯 행패를 부릴 때, 그를 막아 세운 것은 사마월이었다. 그러나 그건 유변이 견제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로 사마월의 무공이 구마진과 비교하면 조금 부족했다는 의미였다.
교주가 정말 구마진을 혈마로 지명했다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다른 여덟 신마급으로 무공이 급성장했다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분명 대통현 혈마종 무사들은 아무리 수가 많다 한들 크게 다칠 것이며, 사마월 본인도 막아 세우는 게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즉, 유변이 건재하지 않으면 구마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인데 다행히 그의 경공 수준을 고려한다면 조금 고무적이었다.
어느덧 대통현이 눈에 들어오자 안의 소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폭음, 비명들도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입구까지 돌아갈 수가 없기에 마을 울타리를 뛰어넘어 날아오른 두 사람의 눈에 백여 명을 쓰러뜨리며 날뛰고 있는 구마진의 모습이 들어왔다.
“멈추어라!”
유변의 호통이 대통현 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