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55화 (155/432)

155화 - 제30장. 마성본색(魔性本色) (1)

“후우…….”

설매화(雪梅花)가 더위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아름다운 여성의 손을 섬섬옥수(纖纖玉手)라 표현하곤 하지만, 설매화의 손은 흑옥(黑玉)이라 할 만큼 까무잡잡한데 피부 결도 고아서 보고 있으면 한번 잡아보고 싶은 그런 손이었다.

특히 손등은 까만 데 반해 손바닥은 하얘서 그 색감의 반전이 매끄러워 눈길이 절로 가곤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건 가슴과 허리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나신에 천만 한두 겹 덧댄 듯한 농염한 미색의 옷차림은 욕구가 식은 노년의 남성이라도 충분히 불길을 지필 정도로 정신을 홀릴 듯한 마력이 있었다.

거기다 흑옥 같은 검은 피부 때문에 이국적이면서도 중화 미인의 기풍도 녹아 있는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 미색에 혹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을까?

“그래도 신강 일대보다는 더위가 좀 덜하지 않나?”

“거기에 있었다면 천산의 만년설에서 설영(雪泳)을 했겠지.”

“눈 속에서의 헤엄이라니 고상한 취미로군.”

“너 때문에 생긴 취미잖아.”

설매화가 으르렁거리며 중년의 미남자를 노려보았다.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한 미남자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면서 설매화의 농염한 자태를 훑어보았다. 아주 노골적인 시선이었지만, 설매화는 익숙한 듯 그저 웃는 모습에만 고개를 저으며 반응할 뿐 다른 반응은 내놓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오라비 곁에 좀 와봐? 이 손 심심하게 둘 거야?”

“더워. 끈적거려서 기분 나쁘니까 건들지 마.”

“끈적거리는 것도 그것대로 좋은데.”

“닥쳐.”

“킬킬킬킬!”

설매화의 냉담한 욕설에도 오히려 기분이 좋았는지 미남자가 킬킬거려댔다.

두 사람의 낯뜨거운 음담패설은 이후에도 이어졌지만, 여정을 동행한 다른 무사들은 누구도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야영지의 바깥쪽만 주시하고 있었다. 끼리끼리 모여 있는 다른 무리들도 절대 설매화 쪽에는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둥그렇게 모이지 않고 바깥쪽 반달 모양으로 뭉쳐서 건량이나 나누고 있었다.

만약 실수로라도 설매화의 모습을 흘깃 보다가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기라도 하면 처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 분명했다. 해마다 그런 멍청한 자가 나오기도 했으나 여기까지 동행한 자들은 이미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어서 행실에 부자연스러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제삼자가 보기에나 부자연스러울 뿐이었다.

“우리 너무 가까이 있는 거 아냐?”

금서말(金西沫)이 불안한 기색을 하며 중얼거렸다.

“괜찮아. 하나, 둘, 셋…… 전부 13명, 이주일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숫자가 똑같아. 교대로 지켜보는데 오고 가는 사람도 없고. 이 정도 거리면 천하오절도 못 찾아.”

정태흘(丁殆訖)이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금서말과 정태흘은 하오문의 정보원으로 두 사람 모두 감숙 천수 태생이었다. 천민 출신이긴 했으나 그래도 재능이란 게 있어서 하오문에 소속된 이후에 무공도 제법 늘었다. 또 비단길을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을 자주 접하면서 이민족들의 언어도 제법 할 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하오문이 개방과 함께 창천맹의 정보 문파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자 능력을 인정받아 신강까지 이동해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천하오절은 가능할 거 같은데?”

“……그런가?”

신강에서부터 쫓아온 무리와 두 사람은 거의 20장 거리나 떨어져 있었다. 서방(西方) 땅을 오고 가는 행상인으로부터 산 망원경 덕분에 줄곧 3, 40여 장 밖에서 살피던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제법 가까운 데서 살피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도 언덕 고지를 잘 점유하고 수풀 속에 은폐까지 했으니 눈에 띌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흐흐. 그래도 저놈은 천하오절 급이 아니라서 괜찮아. 태생부터가 잡놈이다 보니 구주마종에도 끼지 못하고 공석인 혈마종에 자리 구걸하는 거잖아, 안 그래?”

정태흘은 망원경으로 지속해서 동태를 살피면서 물었다.

“그건 그렇지.”

“성격은 좀 포악하냐? 걸핏하면 사람을 죽여대니 신망도 안 좋고.”

“흡혈(吸血)한다는 건 정말인가?”

“말라비틀어진 시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면 저놈 집에서 들어간 놈이 다음 날 말라비틀어진 송장이 되어서 불태워지냐고.”

“흐음, 독을 쓴 건가?”

“마공 때문 아닐까? 비상식적인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흐음.”

“마공 맞아.”

“역시 그렇겠지?”

정태흘은 그 말에 인정하면서 눈에 힘을 주고 망원경으로 열심히 살펴보았다.

중년의 미남자와 매혹적인 흑진주 같은 여인 그리고 그 주변을 에워싼 11명의 무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딱딱딱…….

연달아 딱딱거리는 소리가 요상하게 들려왔다. 금서말의 호흡도 조금 가빠져 있는 느낌이 들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정태흘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옆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모습에서 정태흘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왜 그래?”

그는 잔뜩 경직되어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딱딱거리는 소리는 턱이 떨리면서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식은땀까지 흐르는 게 눈에 보이는 상황 속에서 정태흘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그들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두 사람이 덜덜 떨면서 뒤를 보았고, 한 사내가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였다.

그 사내는 자신의 서늘한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공 맞아. 흡혈은 아니고.”

콰직! 콰직!

정태흘과 금서말은 꼼짝도 못 하고 사내의 손에 기절하였다. 사내는 두 사람을 모두 어깨에 들쳐 매고는 언덕에서 바로 뛰어내렸다. 높이가 상당한데도 나뭇가지들을 밟으면서 가볍게 내려올 정도로 경공이 무척 뛰어났다.

그는 그대로 바람처럼 달려서 어느덧 중년미남자와 설매화 일행이 있는 곳까지 달렸다. 그리고 그를 멀리서부터 발견한 중년미남자가 꽤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게 누구야? 벽(檗) 아냐? 도통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니 몰라볼 뻔했어.”

벽은 무신경했다.

대신 그는 어깨에 지고 온 두 사람을 바닥에 던질 뿐이었다.

“윽!”

“으으……!”

그 충격에 두 사람이 깨어나기 시작하자 바깥쪽을 바라보고 있던 11명의 무사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둘러섰다.

벽은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손을 털고는 뒤돌아서 나가려고 했다.

“이봐, 무영으로서 임무는 존중한다만,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 주자고. 이 정도로 우리 사이가 팍팍할 필요는 없지 않나?”

벽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는 중년미남자는 보지 않고 그 옆의 설매화를 흘끔 돌아볼 뿐이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던 설매화는 벽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거기까지도 벽은 참을 수 있었지만, 중년미남자가 설매화에게 가까이 당겨 앉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고 머리카락의 향취를 맡자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자리를 훌쩍 떠났다.

“떨어져. 더우니까.”

설매화가 차갑게 말하며 중년미남자를 밀쳤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더욱 세게 끌어안으면서 허벅지까지 쓰다듬었다.

“더울수록 더 뜨겁게 몸을 달궈야…….”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설매화의 손길이 마치 그를 받아들이는 듯 자신의 허벅지를 건드리는 오른손을 쓰다듬었었다. 그 기분 좋은 촉감이 팔을 따라 올라가더니 어느새 손톱의 날을 세우며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워.”

“앙칼진 것. 크크크!”

중년미남자는 실없는 웃음과 함께 조심스럽게 손을 떼면서 목을 누르고 있는 그녀의 손까지 천천히 밀어내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피식 숨을 내쉬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두 하오문도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뭐냐? 중원인인 데다가 무공은 허접한 걸 보니 창천맹이 심어 놓은 눈깔들이구만.”

정태흘과 금서말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그 물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봐라.”

“…구마진.”

짝짝짝!

“정답! 똑똑한데?”

금서말의 대답에 구마진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질문. 어디서부터 날 쫓아온 거지?”

잠시 기다렸으나 두 사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구마진이 피식 웃었다.

“큭큭! 아, 이제 입을 다물겠다. 물론 너희가 입을 열든 다물든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하지만, 죽음도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다른 거 아니겠어? 그렇다고 내가 고문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내리는 죽음은 고통받을 수밖에 없거든.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니 내 장기가 뭔지도 알고 있겠지?”

“…흐…. 모른다.”

정태흘은 흡혈이냐고 물으려다가 조금 전에 사라진 벽이 그들을 기절시키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구마진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느 쪽도 아는 눈치가 아니자 그는 두 사람을 향해 가볍게 오른손을 펼쳤다.

“모른다니 이 구마진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내 장기는 말이야. 바로 흡성대법이야. 들어는 봤나?”

“흡성대법……!”

두 사람이 놀란 반응을 보이자 구마진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과장된 웃음과 연기로 흉악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아, 그래. 흡성대법. 상대의 정기와 진기를 빨아들이는 아주 잔악무도한 무공이라고. 죽는 순간까지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만드는 그런 무공. 어때? 지금 내 손에 죽을 텐가 아니면 질문 몇 개 대답해 주고 여기 이 아름다운 흑진주에게 최후를 맡기겠나?”

정태흘과 금서말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일찍이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짓을 따라 덜덜 떨면서 시선을 옆으로 돌렸을 때, 그들을 흘겨보는 설매화의 요사스러운 색기에 휩싸여 금방 눈빛이 흔들렸다.

죽음이 눈앞에 있었기에 바로 눈을 내리깔았지만, 설매화의 매혹적인 자태는 마치 그들을 편안한 죽음으로 인도해 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무, 물어보시오.”

정태흘은 대답하면서도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금서말도 그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우릴 쫓아왔지?”

“…오로목제.”

“우루무치? 하! 이거 제법 능력 있는 놈들이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서녕이 이제 코앞인데 잘 해오다 들키다니? 크하하하!”

구마진의 비웃음에 정태흘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쩌면 줄곧 유지해 왔던 거리를 좁히지만 않았어도 들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서말도 옆에서 침음성을 삼키니 그저 애통하기 그지없었다.

“좋아, 다음 질문. 오늘 말고 다른 때에 날 가까이서 본 적이 있나?”

뜻 모를 질문에 정태흘과 금서말이 서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때, 금서말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일 장 거리 정도에서는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소만…….”

“흐음, 애매하군. 그래도 눈썰미는 있을 테니 정보력을 시험해 보는 차원에서 한 번 물어보지. 내 얼굴을 잘 봐라. 뭐 달라진 게 보이느냐?”

구마진은 금서말 앞에서 쭈그려 앉은 채로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금서말은 조심스럽게 구마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거리가 조금 멀었긴 했어도 이목구비 등 생김새를 눈에 하나하나 담았으니 변화가 있다면 바로 알아볼 터였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구마진은 여전히 구마진이었다.

“잘 모르겠소…. 달라진 건 없…….”

거기까지 말을 하던 금서말이 입을 다물었다.

구마진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의 눈동자 색이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처음엔 갈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좀 더 적색을 띠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그의 눈길이 무심코 구마진의 이마 쪽에 머물렀다. 그 부분을 자세히 살피려는 금서말의 시선을 느꼈던 구마진이 손으로 이마를 가리면서 씩 웃고는 다시 물러나 설매화 옆에 앉았다.

“됐다. 그 정도면. 세 번째 질문, 창천맹에 관련된 최근 소식들 좀 있으면 떠들어 봐. 질문이라긴 너무 광범위한가? 큭큭큭! 그래도 저승 갈 길에 노잣돈으로도 쓸모없는 것들이니 대충 풀어놔 봐.”

구마진은 차갑게 웃었고 정태흘과 금서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없소. 아, 알고 있는 것은….”

“에이, 이봐. 그래도 저승길 편안하게 가고 싶지 않아?”

“저, 정말이오! 우리는 작년부터 계속 신강에 아예 상주하면서 정보만 전달하는 일을 했을 뿐이오!”

구마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트, 틀림없는 사실이오….”

“쩝.”

구마진은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의 피부는 설매화만큼은 아니지만,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어서 새외 생활을 오래 한 티가 많이 나 보였다. 1년의 공백이 있었다면 그가 아는 정보랑 크게 다를 바 없을 것 같았다.

“김 샜다. 너희 죽음은 설매화에게 맡기도록 하지.”

구마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턱을 괴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설매화가 천천히 일어나자 두 사람은 덜덜 떠는 몸에 힘을 준 채 다가오는 그녀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래도 미인의 손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게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사치라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될까?

구마진의 목을 겨누던 손톱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을 거로 생각한 두 사람은 목을 꼿꼿이 세운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송글 맺혔다.

터텁!

차갑고도 고운 손바닥이 두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덮은 그 순간 두 사람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잿빛 안개가 설매화의 검은 손등을 타고 일렁이는 순간.

“끄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악! 아아아! 아아아가가가각!”

끔찍한 비명이 두 사람에게서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터져 나왔다. 부릅뜬 두 눈은 혈관이 터져 흰자위를 붉게 물들였고 얼굴과 목에도 수십 개의 핏발이 꿈틀거렸다. 온몸의 정기와 내기가 그대로 설매화의 손을 통해 빨아 들여지고 있었다.

그 눈앞의 광경을 구마진은 악의에 가득 찬 눈, 희열에 휩싸인 웃음으로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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