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54화 (154/432)

154화 - 제29장. 사자(使者)로서 검림으로 (6)

* * * *

참 신기한 일이었다.

잠이 줄기도 하고 안 꾸던 꿈도 꾸곤 하면서 나이를 먹어가던 걸 느끼곤 했었다. 다 늙어서 모든 것이 혼란에 빠졌던 시기에는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만, 그런 것들이 온전히 자리를 잡고 난 뒤에 최근 십여 년간을 돌이켜 보면 정말 꿈 한번 꾼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야……. 꿈을 꾸고 나면 해가 정수리를 뜨겁게 덥힐 시간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꿈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내용이라고 할 만큼 기억나는 건 없었다.

어떤 때는 아무것도 없는 초원으로, 어떤 때는 산수화로 그려낼 법한 절경 속에서, 또 어떤 때는 망망대해 위 표류하는 조각배 위에 서 있었는데 공통된 점은 희뿌연 안개 때문에 시계(視界)가 나빴던 것이었다. 다만 언제나 마지막은 태양을 등지고 선 채 손을 흔드는 그림자를 그리워하다가 잠에서 깨는 통에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감정의 우물 속에 통한의 물기가 조금씩 고이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그 그림자도 시각에 남은 기억 속 모습은 매번 달랐다. 젊은이의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었고 중년인으로 보일 때도 있었으며 햇살에 부서져 하얗게 빛나는 수염의 노인으로 보이기도 했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난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꿈을 꾸면서 그 그림자를 맞이하였고 그 느낌들을 되새겨 본 결과 동일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긴 했다.

“대마의 어르신.”

사마월이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유변은 익숙한 개완차의 다향이 코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왔는가?”

뒤를 돌아서니 사마월이 다반을 들고서 정자로 올라오고는 가운데에 놓고 한쪽에 앉는 걸 보았다. 유변도 그의 맞은편에 앉으면서 그가 따라주는 찻잔을 받았다.

“오늘도 멍하니 계신 걸 보니 꿈 때문입니까?”

“허허, 확실히 이 꿈을 꾸고 나면 세수를 해도 멍한 기분이긴 하네.”

유변은 차를 한 모금 입안에 물었다. 부순 호두 조각이 찻물 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입술에 닿자 가볍게 빨아서 찻물과 함께 입안에 넣었다. 맑은 차향이 콧속으로 스며들고 입안을 노는 호두의 구수한 맛도 적절하게 미각에 자극을 더하니 멍하던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찻물과 함께 어금니로 호두 조각까지 오독오독 씹으면서 나는 소리까지 즐기니 청각까지 깨어나며 바깥으로 보이는 폭포 소리까지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아래 분위기는 요즘 어떠하냐?”

“마원당 의원들이 절반이나 빠져나갔지만, 그만큼 마을과 도시들에서 징병된 백성들이 많다 보니까 환자가 크게 줄어 한산합니다. 오히려 대통현(大通縣)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감이 돈다고 합니다. 옛 고향 땅 동족들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적룡마종이 주축이 되어 청해에서 3만의 군사로 거병하여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오랜 시간 유격전만 펼치던 적룡신마가 지난겨울에 직접 정예 고수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기련산맥을 넘어서 옥문관(玉門關), 가욕관(嘉峪關)을 일거에 점령해 버리는 쾌거를 이룬 상황이었다.

다만 왜인지 중원 황군의 증원이 때맞춰 이뤄지면서 난주성(蘭州城)과 천수성(天水城) 앞에서 진출이 막혀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있었다.

“자넨 교주의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게 바르다고 보는가?”

“예?”

사마월은 갑자기 물어오는 유변의 의도를 몰라 당황했다.

“…대통현 거주민이 4천여 명에 이르러 서녕 다음으로 큰 거주지니 대마의께서 결정을 내려주시면 신교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요.”

“될 수는 있다?”

“대마의의 지위는 천마조사(天魔祖師)께서 임명한 것입니다. 혈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혈마종은 대마의의 책임 아래에 있습니다. 교주님이시라고 왈가왈부하셔선 안 되는 일입니다.”

유변은 쓴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쓸어내렸다.

천마조사라 일컬어지는 단용후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 교주인 천마 단지운은 말 그대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힘과 자격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제 작년 그가 한번 이곳에 찾아와 혈마종에 관하여 의견을 물었을 때, 유변이 천마조사의 이름을 빌려 비협조적으로 나왔음에도 그는 예상보다 더 넓은 배포로 유변의 입장을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유변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태도로 인해 천마신교의 마도대의라는 계획에 혈마종이 방해되는 존재로 여겨진다면 언제든지 일거에 쓸려버릴 수 있다는 것을.

사실 유변은 자신의 생애에 조금씩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도에 귀의한 이후로 큰일 없이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버려 무뎌진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조강선을 만난 일이 그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대통현에 모여 사는 혈마종 인사들의 민심이 천마신교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려고 하는 것도 주요한 원인이었다.

“자넨 참 희한해.”

“하하, 뭐가 희한하십니까?”

“자네야말로 태상교주가 뿌린 마도의 씨앗이니 본교로 돌아가 공을 세울 기회를 거두고 싶을 법한데, 왜 여기에 남아 허송세월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이 노부를 감시하는 의욕이 예전만큼 남아 있지도 않고 말이야.”

사마월의 임무는 대마의 유변을 보좌하고 또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수년 전부터 그가 보낸 감시의 눈길이 뜸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유변은 딱히 떠날 의사도, 그를 시험해볼 장난기 있는 성격도 없었기에 크게 의식하지 않고 넘어가다가 오늘 특별히 생각나 말하는 것이었다.

“본교 태생이긴 하나 미완성인 저를 살려 주신 건 대마의 어르신 아닙니까? 주화입마에 허덕이던 저를 일찍이 구해 주시면서 훨씬 평온해진 마음으로 삶을 돌아보니 피 보는 일이 저와 맞지 않는다 여겼습니다. 여기서 어르신과 차 한잔 나누고 수련하다가 졸리면 잠도 푹 잘 수 있는 이 삶만큼 행복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별 이상한 놈을 다 보았구나.”

“하하하하!”

유변의 핀잔에 사마월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보면 사마월과의 관계는 언제나 원만했다. 초기 감시의 눈으로 쳐다보는 게 거북하긴 했었지만, 귀의한 몸으로서 당연한 신세라 여겼기에 대수롭지 않게 노력한 것이 오히려 사마월을 물들게 한 모양이었다.

혈마종 대리종주의 지위로서 별도의 땅을 할당받아 살게 된 이후로 초기 몇몇 감시자들이 있긴 했지만, 사마월 보임 이후로는 이십여 년 넘는 시간 동안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잠시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유변이 다시 불쑥 입을 열었는데 이번엔 사마월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만약 배반한다면 자네는 내 목을 치려 하겠지?”

그 말을 툭 던지고 다시 찻잔을 기울이는 유변의 모습을 보면서 사마월은 잠깐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분히 호흡하였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통현의 민심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게야. 이 노구도 이미 천륜을 깨고 너무 오래 명을 이어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죽을 날이 올 수도 있을 걸세. 누가 혼란스러운 민심을 수습하고 이끌 수 있겠는가? 자네라도 힘들 거야. 그렇다고 힘으로 굴복시키려다간 피해도 커질 테고. 진정 계륵(鷄肋)이 되어버리는 게지.”

혈마종은 천마신교 안에서도 정말 특이한 조직이었다.

천마신교의 구주마종이란, 천마라는 절대자를 숭상하는 여덟 개의 마종과 혈마라는 상징적 존재를 숭상했다가 정사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여 마로 쫓기듯 넘어온 한 개의 조직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 후자의 하나가 바로 혈마종이었다.

무림 초출인 원건이 무림맹이 주최한 천하제일 무림대회에서 당당하게 천하제일인이 된 그때, 정말 많은 인물이 원건에게 감복하고 경의를 표했었다. 그리고 원건은 무림의 공적이 되어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

저들만의 정의를 내세워 영웅을 무림공적으로 몰아 잔인하게 핍박했던 정파.

그 난잡한 정의 논리 속에서 기회를 엿보며 원건과 정파 모두를 공격한 사파.

무림을 양분한다는 정사 어느 신념도 원건보다 당당하지 않았기에 원건을 숭상하던 사람들은 제3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 나타난 것이 바로 단용후와 마도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그들은 혼란스러웠다.

단용후는 정중했으나 계산적이었고 또 이기적인 면모도 있었다. 물론 거기에 취해 더 큰 힘을 바란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직 마공은 불안정했고 주화입마에 빠지는 자도 여럿 나타나면서 이 역시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그 시점에서 때마침 단용후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 유변의 등장은 이들에게 구원자 같은 의미를 담게 되었다.

원건의 스승이었고, 제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유변의 비애는 모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는 아예 마인의 길을 가기 위해 천마신교의 밑으로 들어갔으나 남은 대부분은 똘똘 뭉쳐 유변을 따르게 되었다. 유변이 명현단의 조제에 성공하여 주화입마로부터 자유롭게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자 그를 선구자처럼 여기기도 했다. 그 영향이 마도 전반에 두루 미처 한때는 위상이 크게 오르기도 했다.

단용후는 그들의 입장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들을 혈마종으로서 조직화하여 새로운 혈마가 나타나기 전까지 유변에게 전권을 일임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이후 정말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들 사이에 혼인하는 자도 생겼고, 회족과 혼인하는 사람도 생겼다. 2세가 태어나고 3세가 태어나면서 세력은 커지고 더 조직화 되었다. 600여 명으로 시작되었던 혈마종은 그렇게 4천여 명의 대조직으로 성장한 것이었다.

작금에 이르러서 과거의 감정은 어느 정도 희석되었지만, 아직 혈마를 숭상하는 마음은 여전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유변이 여전히도 살아 있으니 사그라들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대의 범주가 넓어지면서 이번에 발발한 전쟁으로 인해 마을 민심은 혼란스러워졌다. 새외의 거주민으로서 의식이 있는 젊은 세대는 참전 의지가 상당했지만, 노장층 중심으로는 귀향하고자 하는 의식이 많이 강해져 있었다. 당연히 무림인들끼리의 싸움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고향 백성들까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군사적 전쟁은 분명 다른 문제였기에 세대 간의 갈등도 크게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만약 유변이라는 상징적인 인물이 없었다면 대통현에 사는 혈마종은 진즉 절반으로 쪼개졌을지도 몰랐다.

사마월은 오랫동안 유변과 함께 생활해왔고 이제는 그를 감시해야 한다는 의식에서도 자유로워진 만큼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진지하게 고민하였고 조심스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대마의께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실 때가 오신다면…… 반드시 저를 설득해 주십시오. 만약 대마의의 뜻에 조금이라도 명분이 있다면 소인은 감히 막지 않겠습니다.”

유변의 주름진 얼굴에 표정 하나가 떠올랐다. 가벼운 변화였지만, 진심으로 놀란 기분을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무영각이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찮겠느냐?”

유변의 반문에 사마월이 조금 난감해졌는지 턱을 긁었다. 괜스레 풍성한 수염 사이로 간지럽던 느낌들이 손끝에 전해지면서 난감한 기분도 같이 쓸려 내려갔다.

“이미 감시보고서를 뜨문뜨문 보내는 바람에 의심받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으허허허!”

사마월이 너스레를 떨자 유변이 기분 좋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사마월의 마음이 그러하니 유변도 숨기고 있던 것 하나를 풀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전쯤 오랜만에 처소에서 벗어나 마원당 입구 쪽을 서성이다가 정기적으로 바깥 정보를 물어오는 자를 만났다. 보통은 사마월을 거쳐서 그에게 올라올 정보들이었으나 그날은 왜인지 먼저 보고 싶은 마음에 앞서 넘겨받았다.

다양한 소식들을 읽어 내려가던 중 가장 마지막 줄은 그에게 정말 뜻밖의 소식이었다. 그는 공력으로 그 부분을 절단하여 품에 숨겼고 나머지 본문만 사마월에게 전달해 주었다.

이후에도 같은 정보가 사마월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심히 지켜본 바로 그는 모르는 눈치임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내 자네에게 알려 줄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흐음…, 그러니까 말일세…….”

유변은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이곳 뒤뜰로 뛰어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대화가 끊어지며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람이 그들 앞에 나타났으니 바로 모홍도였다.

급히 달려왔는지 그는 꽤 숨을 헐떡이고 있었는데 죽상인 얼굴을 하는 게 왠지 모를 불길함이 뒤따라 느껴졌다.

“헉! 헉! …대마의! 그, 그 개잡놈이 또 온다고 합니다!”

“개잡놈? 누구?”

“아이고, 개잡놈이 어디 또 있답니까? 구마진, 그 천하에 개잡놈 말입니다요.”

유변의 주름 가득한 노안(老顔)이 더 일그러졌다. 그리고 사마월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모홍도에게 구마진과 개잡놈은 동의어(同義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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