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제29장. 사자(使者)로서 검림으로 (5)
청명은 소요자가 떠나고 나서 한동안 그 자리에서 실언해버린 스스로를 자책했다.
스승은 제자를 탓하지 않는다지만, 제자는 죄책감을 안게 되었으니 사죄해서 풀어야 함이 마땅했다.
그는 결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기 직전에 문득 조금 전에 했던 소요자의 말과 함께 그동안 놓치고 있던 것 하나가 떠올랐다.
‘…무당산으로 돌아가 보겠다. …….’
소요자에게 태극검을 집중적으로 사사하면서 배움에 정신 팔린 나머지 놓쳤던 것, 바로 무극신검이었다.
북부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천서은은 총관 서일헌에게 전장에서 귀환하면 청명에게 무극검을 돌려주라고 일러두었었다. 참전뿐만 아니라 진도건을 찾으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그녀는 500인 단과 떨어질 수밖에 없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녀의 귀환과 별개로 먼저 청명 등의 후발대로 참전했던 500인 단은 창천맹으로의 복귀를 위해 천무방 근처로 지날 수밖에 없었고, 서일헌은 그녀의 분부대로 미리 길을 찾아 기다렸다가 청명에게 무극검을 돌려준 것이었다.
청명은 서일헌이 정성스럽게 비단에 감싼 무극검을 한 번도 뽑지 않았다. 언젠가 무당산으로 귀환하게 되면 직접 장문인에게 반환할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소요자가 이제 돌아간다고 하니 사죄도 할 겸해서 무극검을 반환하면 화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문을 열고 근처 호위를 서던 창천단 무사에게 다가갔다.
“혹시 소요자께서 어디로 향하는지 보셨습니까?”
“맹주전 쪽으로 가시는 것 같았소.”
“고맙습니다.”
청명은 소요자가 천무경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음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움직인다면 무극검을 찾아와 늦지 않게 소요자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전력으로 제운종을 펼치면서 빠르게 자신이 기거하는 처소로 향했다. 그의 처소는 마을 내에 있었으나 다행히 그들이 있는 창천맹 시설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빠르게 지붕들 위를 날아가면서 객잔의 3층 창문을 열고 자신의 방에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상 밑에 숨겨둔 무극검을 찾아 꺼냈다.
“좋아.”
그는 다시 창문을 열고 몸을 날려 창천맹 쪽으로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중앙 대로를 통해 맹주전 쪽으로 향하는 중에 때마침 내려오는 소요자를 발견했다.
“스승님!”
두 사람이 다시 마주 섰는데 조금 전의 일로 인해 서로를 쳐다보는 사제 간의 시선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바쁘게 어딜 다녀오는 길이냐?”
먼저 입을 연 것은 소요자였다.
“스승님, 제자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되었다. 빈도의 수양이 부족한 것을.”
소요자는 기분이 모두 풀린 것은 아니었다. 묵은 감정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엉켜 있기 마련이라 모든 엉킴을 풀어낸 게 아니라면 시간으로써 해소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제자의 무례를 탓하는 것은 그의 체면상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뿐이다.
청명도 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기에 지금 품 안에 챙겨 온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스승님, 무당산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이 검을 갖고 가십시오.”
“도가에 귀의한 자가 물욕을 탐한다더냐? 스승의 기분을 풀기 위해서라면 넌 실수한 것이다.”
소요자는 그 검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청명을 엄히 꾸짖었다.
하지만, 곧 이어진 청명의 말에 소요자는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무당파의 신물 무극신검입니다. 제자가 전장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길에 천무방으로부터 돌려받아 왔습니다. 그동안 경황도 없었고 배움에 정신이 팔려 이 중요한 일을 먼저 아뢰지 못한 점을 용서하십시오.”
소요자는 놀라서 비단으로 감싸진 검을 받았다. 그리고 비단을 풀어내니 과연 그림으로만 보았던 무극신검의 형상을 빼다 박은 한 자루 검이 등장했다.
스르릉……!
소요자는 조심스럽게 검을 뽑았다. 투명하다 착각할 정도의 새하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극이라는 글귀가 검신에 새겨져 있었는데, 정순한 내공을 주입하자 팔괘(八卦) 문양이 검신을 따라 은은하게 빛났다.
무극검 자체로도 예리한 명검이었지만,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실현할 수 있는 신검의 가치는 오로지 태극신공을 수련한 무당파 제자들만이 발휘할 수 있었다.
“…잘했다.”
칭찬하는 한 마디에 청명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러나 곧장 표정이 굳어졌으니 소요자가 무극검을 다시 청명의 품에 던졌기 때문이었다.
“무당산에 가져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청명은 엉겁결에 무극검을 받으면서 놀라 물었다.
“마도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현 무림의 사태를 돌이켜본다면 이런 신물은 무당산에 귀하게 모셔야 할 게 아니라 강호에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쓰이는 것이 더 가치 있는 길일 것이다.”
소요자는 문득 자신에게 가르침을 갈구하던 영은성이 떠올랐다.
“우리 무당파는 정사대전의 위기에서 불리함을 이유로 일찍 봉문을 선언하는 비겁함을 보였다. 비록 그때의 은원을 따질 만한 시운(時運)은 아니어서 당장 풀 길은 없으나 마교라는 대적이 눈앞에 있으니 역할을 한다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스승을 혼낼 만큼 오늘의 비무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손에 쥐어서 성취로써 보여 주어라. 그리하여 강호에 정의를 실현해 낸다면 이 스승도 기꺼이 인정해 주마.”
“스승님……!”
“네가 나보다 마음의 수양이 깊으니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기대가 있다. 항상 정진하여라.”
소요자는 눈물을 떨어뜨리는 청명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곧장 경공을 펼쳐 자리를 떠났다.
큰 존재가 떠난 만큼 휑한 마음을 채울 길이 없으나 항상 정진하라는 말을 진정으로 품으니 바로 할 일을 찾았다.
‘정진하겠습니다. ……진도건, 그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한다.’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비무대에서 결착이 지어지기 직전 그의 손에서 소용돌이치던 태극신공의 기운을.
진도건의 기운도 아니고 자신의 내공이 상대에게 영향을 받아 그리된 것인데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아 청명 자신은 거기에 적잖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맹주전을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떼려고 했다.
그때 홍두형이 마침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청명 도사. 방금 떠난 사람이 소요자신가?”
“그렇습니다.”
“무당산으로 아예 가신 건가?”
“예.”
홍두형이 아쉽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이고, 어쩐지 그 비무로 기분이 안 좋은 거 같더니만,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가시다니.”
“스승님은 어찌 찾으십니까?”
“어찌 찾냐고? 흐음, 그게…….”
홍두형은 대답하려다가 청명을 슬쩍 보았다. 사실 청명에 관해서 얘기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대답해 주기가 모호했다.
“아, 그게…… 나중에 맹에서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을 전하려고 그랬네.”
“그렇습니까?”
“자넨 어떤가?”
“예?”
“낙심하고 있지 않았나 해서 말일세.”
청명은 잠깐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대답에 뜸을 들였지만, 곧 홍두형이 자신과 스승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아……,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진 대협과 나눌 얘기가 있어서 내일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내일? 그건 힘들겠는데.”
“네?”
“그는 맹주령을 받아서 검림에 갈 예정이라네. 바로 내일.”
청명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실 지금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왠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홍두형에겐 내일이라고 얘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말 오늘밖에 시간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의 마음을 읽었던 걸까?
“아, 마침 맹주전 쪽에서 걸어가는 걸 봤네만. 찾으러 갈 텐가?”
“네, 네! 그러겠습니다.”
“좋아. 같이 찾아보지.”
두 사람은 곧장 몸을 날렸다. 그리고 이내 맹주전 근처 정원에서 진도건과 천서은을 찾을 수 있었다.
뭔가 꼼지락거리면서 얘길 나누던 두 사람은 곧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천서은에게서 싸늘한 눈초리를 느꼈을 때, 청명은 바로 옆에서 홍두형의 헛기침 소리를 들었다.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돌아보자 홍두형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크흠. 잘 얘기해 보아라.”
“예, 예…….”
청명은 훌쩍 도망가듯 서둘러 빠져나가는 홍두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힘없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쭈뼛거리면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니?”
천서은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때마침 천무방에서 그에게 말 놓기로 했던 걸 떠올렸으니 청명에겐 더욱 차갑게 들려왔다.
청명은 그녀가 진도건에게도 이렇게 반응하는지, 혹은 같이 다니는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 눈빛은 사람의 마음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쪽으로.
“지, 진 대협에게 드릴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하세요.”
진도건은 분위기가 더 싸늘해질까 서둘러 답변했다.
“오전의 비무는 감사했습니다. 아아, 그…….”
“용건만 말해 줄래?”
다시 천서은이 끼어들었다.
그녀에게는 오붓한 둘만의 시간이 깨진 것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
“네, 넵. 저 괜찮으시다면…… 다시 한번 비무를 해 주시겠습니까?”
청명이 순진한 미소를 지으면서 용건만 바로 말했다. 그리고 이내 차갑게 표정이 굳는 천서은 때문에 곧 주변 공기까지 차갑게 얼어붙었다.
물론 진도건의 얼굴에 난감해하는 표정이 떠오른 건 덤이었다.
다음날.
해가 떴을 때, 청명은 운기조식에 이어 명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있었던 진도건과의 비무를 끝으로 그의 조언에 따라 명상을 통해 머릿속으로 복기하는 것이었다.
진도건에 의해 목검을 얼마나 날려 버렸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때로는 깊은 철학적 고민 끝에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치열하게 반복되는 훈련 속에서 체화되며 얻는 깨달음도 있는 법이다. 그의 손안에 남아있는 백여 차례 넘는 패배의 흔적은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기 위한 청사진이 되고 있었다.
마침내 손에 금방이라도 잡힐 듯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지침을 발견한 것에 기뻐서 다른 데 신경을 쓸 수 없었던 청명은 천서은이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이를 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창천맹을 떠나는 다섯 필의 인마.
말을 달리지는 않지만, 일부러 말의 전진 속도를 빠르게 하여 일행보다 앞서 나가는 천서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뒤를 쫓듯이 가는 다른 사람들은 불안감에 떨었다.
“저 아가씨는 왜 또 화났어?”
야율균은의 물음에 이유를 알고 있는 진도건은 난감한 표정을 물었다.
응당 그에게서 답을 들어야 했던 그녀는 그의 눈 밑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너는 왜 피로에 절어 있는데? 혹시 밤일로 그녀를 죽일 듯이 괴롭힌 거야?”
“오우쒸.”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에 최현걸이 손으로 눈 앞을 가리며 탄식을 내뱉었다. 영은성도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괜히 돌려 버렸다. 야율균은은 두 남자를 한심하게 흘겨보고는 다시 진도건을 향해 도집에 채워진 만곡도로 그의 팔을 푹 밀었다.
“말해 봐봐. 눈은 왜 그렇게 퀭하고, 저 아가씨는 또 왜 저렇게 화났는데? 엉? 정말 밤일이야? 뭐 문제가 있었나?”
야율균은이 괜히 아랫도리를 흘겨보자 진도건이 손을 휘둘러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하아, 그건 아니오. 다른 일 때문에 시간을 뺏겨서…….”
진도건은 그녀에게 조용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핑!
그 순간 갑자기 날아온 무언가에 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통나무조차 뚫어버릴 정도의 기세로 날아든 건 동전이었다. 급히 그 방향으로 고개를 트니 천서은이 두 사람을 노려보며 팔을 뻗고 있었는데 팽팽하게 펴진 손가락들로 봐서 그녀가 날린 게 분명했다.
천서은은 진도건이 돌아보자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내 말 좀 부탁하오.]
진도건은 최근 배운 전음술로 야율균은에게 얘기했다.
야율균은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을 때, 진도건은 말을 그녀 가까이 붙이고는 손을 붙잡아 자신의 고삐를 쥐게 했다. 그리고는 말 안장을 박차고 천서은 쪽으로 몸을 날리더니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앉았다.
“어머!”
푸르륵-!
천서은은 그가 날아오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모른 척 앞으로 당겨 앉았었다. 말이 놀라 몸부림치려 하자 진도건은 손을 뻗어서 말고삐를 쥔 그녀의 손등을 덮어 잡고 고삐를 조심스럽게 당겼다.
“워워-!”
말이 다시 진정하자 진도건은 천서은에게 바짝 몸을 밀착하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이렇게 좀만 붙어서 갑시다. 응?”
나긋한 속삭임과 콧바람이 머리카락을 밀어내며 귓바퀴를 간지럽히자 기분이 조금 풀린 천서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이 귀여웠던 진도건도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그런 부탁은 절대 들어주지 마세요. 다음에 청명 도사를 만난다면 반드시 대가를 묻고야 말 거에요.”
“재밌게 지켜보리다.”
“흥!”
“후후! ……조금 피곤한데 당신께 기대어 좀 쉬어도 될까요?”
“왜 또 존댓말이에요?”
“그래야 잘 들어줄 거 같아서.”
“치.”
천서은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체취를 맡으며 함께 호흡하여 말을 타는 이 분위기도 썩 괜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천천히 뒤쫓아오던 세 사람도 저마다 다른 감정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으휴.”
“휴.”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