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52화 (152/432)

152화 - 제29장. 사자(使者)로서 검림으로 (4)

* * * *

“스승님께선 어찌 그리 한탄하십니까?”

“넌 배알도 없느냐? 우리 무당파의 무공이 누출되는 것을 말이다.”

“그가 펼친 게 태극검이 아니라는 것은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청명은 소요자가 한탄과 후회를 늘어놓으면서 갑자기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하는 모습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본래도 엄격한 편에 무당파 무공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비판하는 말까지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스승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스승이 누구냐? 조강선 아니더냐? 그자와 사숙조께서 함께 보낸 시간이 어디 몇 년 수준으로 볼 수 있겠느냐? 분명 본 파의 무공을 유출한 것이 틀림없다.”

“너무 확대해석하시는 것입니다. 태사숙조께서 사문을 떠나계신 지 오래됐다고는 하나 사문에 대한 애정이 깊어 다시 돌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니다! 아무리 이화접목이 무당의 것이라 할 수는 없더라도 태극검을 그것으로 파하다니? 그걸 목적으로 오랫동안 수련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소요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심호흡하는 그의 미간이 좁혀져 있는 것이 이에 대해 무척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주백자는 무당파의 파문제자가 되었으니 그가 밖에서 무얼 하고 돌아다니든 크게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입신의 경지에 이른 주백자에게 죄를 물어 무공을 폐할 엄두 따위는 내지 못하므로 소요자가 우려하는 일을 벌여도 무당파가 억지로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긴 했다.

어쨌든 주백자가 전 무림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던 것도 혈마 원건이 무당파 무공을 사용한 것이 드러나면서였으니 소요자의 그런 추정도 일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강선의 경지를 생각한다면 천하의 모든 검리(劍理)를 꿰뚫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므로 소요자의 이런 반응이 청명이 보기엔 너무 편협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강호에 다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태사숙조의 공이 큰데…….’

그때 청명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상식적인 생각 수준에서 주백자를 비판하는 소요자의 언행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에 관한 생각을 입으로 담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혹시 스승님께선 진도건 그자의 성취가 부러우……. 흡.”

청명은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을 무심코 내뱉다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소요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제자가 실언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청명은 황망하여 깊이 엎드렸다.

사실 부러운 건 그의 마음이었으나 소요자의 심정이 어떨지 생각하다 보니 그의 감정을 대입하고 만 것이다.

소요자는 부릅뜬 눈으로 제자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내 제자에게서 기대했던 성취를 놈이 보여 주었으니 부러울 수밖에. ……아니, 이것도 틀렸다. 이건…… 내 문제다.’

소요자는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엎드려있는 청명을 지나쳐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밀기 전에 잠깐 멈췄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의 일은 끝났으니 무당산으로 돌아가 보겠다. 넌 네 할 일을 하면서 정진하기를 멈추지 말아라.”

끼익.

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청명의 귀에 무겁게 들려왔다.

소요자는 바로 무당산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가 그래도 천무경을 만나 작별을 고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여 맹주전으로 향했다. 비무가 끝나자마자 기별도 없이 떠나는 것은 무당산의 명예에도 이롭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마침 천무경과 부맹주들, 구치상과 표개가 아직 정무청에서 회의 중이었기 때문에 맹주전에 도착해서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때마침 맹주전에서 걸어 나오던 남녀가 있었으니 바로 진도건과 천서은이었다.

두 사람은 소요자를 보자마자 포권을 취하며 예의를 갖추었다. 오전에 창무대의 일이 있었지만, 사실 진도건이 느끼는 불편함은 별로 크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감정이 있었던 소요자는 가볍게 인사를 받고는 바로 돌아섰다.

‘하아, 이 무슨 부끄러운 모습이란 말인가?’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조금 전 들었던 청명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소요자는 이미 깨닫는 중이었다.

진도건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는 다시 돌아서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 실수했다고 했던 말은 잊어 주게나.”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염려하시는 바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후배로서 경청하겠습니다.”

차분한 진도건의 모습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의 행동거지가 사파답게 가볍지 않고 진중한 태도는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빈도는 이제 청명에게 가르칠 것은 모두 가르쳤다.”

소요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왠지 모를 무거운 분위기에 진도건과 천서은은 함께 바람 쐬러 나가려 했던 생각을 잠시 미루고 조심스럽게 기다렸다.

“태극검이 천무방의 제자에게 졌다고 생각하면 뼈아픈 일이지만, 자네의 특별한 이력은 사파의 인물로 보기는 어려우니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하는구나. 홍 방주는 제자가 자네 옆에 있으면서 제법 성취를 이뤘다고 기뻐하는 모양이고, 화산파의 제자는 벽에 부딪힌 모양이나 자네를 신뢰하는 걸 보면 느끼는 바가 있는 듯하구나. 빈도가 보기에 작금의 강호 무림에서 자네는 사상의 중도(中道)를 가로지르고 있는 셈이니 행동거지에 앞서 부디 무겁게 판단하도록 하여라.”

“…진인의 고견을 무겁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진도건의 대답에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두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멈춰 섰다.

“내 제자가 그래도 뭔가 깨닫는 바가 있는 모양이더구나. 혹시 녀석이 청하거든…… 화산, 개방 제자들을 도왔던 것처럼 부탁하마.”

“소인의 부족함이 어찌 진인의 가르침만 하겠습니까?”

“빈도는 이 길로 무당산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홍 방주나 묵허진인께서 제자들을 자네 곁에 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

소요자는 그 말을 끝으로 곧장 경공을 펼치며 자리를 떠났다. 노도사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다가 천서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전엔 그렇게 휙 사라지더니 갑자기 왜 저럴까요?”

“글쎄? 남모를 사연이 있겠지.”

진도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천서은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진도건의 팔을 잡아당겨 바짝 밀착했다.

“그래도 도건을 높게 평가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 좋은데요?”

“부담스러운데.”

“그래도 피하진 않을 거잖아요.”

“그럼. 그런 건 서은이 싫어하는 모습이잖아.”

“어머? 그런 말을……. 지금 내 눈치 보는 거예요?”

“눈치보다는…… 예전에 사패련을 떠나기 전에 내게 해 줬던 말들을 되새겨 보는 거지. 그저 무던하게 구는 게 편했던 나를 먼저 잡아줬으니까 고맙잖아. 공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작은 욕심이랄까?”

진도건의 말에 천서은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툭 쳤다.

“호호호! 진 위사. 제가 무슨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건지 설명해 보겠어요?”

“흐음……, 그렇게 물어보니까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머, 어디 공녀에게 반말할 수 있죠?”

천서은이 허리에 두 손을 올려두고 짐짓 위엄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도건은 그 모습에 멋쩍게 웃더니 슬쩍 고개를 숙였다.

“어떤 기대를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하명을.”

장난에 맞장구를 쳐주는 진도건을 보며 천서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다가가 진도건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넓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건은 이미 잘하고 있답니다.”

전도건도 그녀를 안아주면서 머리 위에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은 맹주전과 가까운 곳에 있는 연못과 그 한 가운데의 정자에 가 앉았다.

주변에 가꿔진 정원은 보는 눈에 휴식을 선물하기에 충분했다.

진도건은 의식을 회복한 이후부터 내단술 연성을 위해 집중하느라 사실상 떨어져 있었기에 대화를 나눌만한 여유가 없었다. 청명과의 비무를 끝으로 중요한 일들이 마무리되면서 비로소 시간이 생겼으니 천서은으로서는 그의 곁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이 매우 소중했다.

“우리의 지난 3년, 저는 도건의 설명들을 듣고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혈마의 의식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로는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떻게?”

“도건이 저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살았을 거라고요. 혈마의 의식 속은 정말이지 끔찍했어요. 어떤 싸움을 해온 것인지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경험이 낫다고…….”

“그렇지 않아. 적과 싸운다고 생각하면 다를 바 없지. 그저 내가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의 시간을 겪었을 뿐. 오히려 거기에 정신 팔려있던 내가 느낀 감정의 아픔은 서은이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 내가 죄책감을 느꼈던 것도 그런 점 때문이야.”

진도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혈마의 의식 속에서 천서은은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맛보았다. 그것은 순수한 살의로 가득 찬 세계였기 때문에 소요자가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바로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또 천무경 옆에서 쏟아지는 마기를 상대로 싸웠을 때조차 실질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었다.

물론 진도건이 혈마와 다툰 것은 자신의 무의식 속이었으니 그녀가 마주한 세계와는 분명 달랐다. 하지만, 그런 혈마의 마성과 기운을 자신 안에 품고 있다는 건 달리 얘기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독주머니를 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단 한 번의 방심이 파멸로 이어질 수도 있는 그런 위험.

천서은은 몸을 기울여 진도건에게 기대었다. 진도건도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머리에 기대었다. 그리고 조금 틀어서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대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꽃내음이 콧속을 간질이며 기분을 좋게 했다.

“입술은 입술에 맞춰 줄래요?”

그 말을 들은 진도건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대고는 다시 천서은의 입술에 대었다.

“이렇게?”

“으휴! 아니, 그거 말고요.”

천서은은 적극적이지 못한 진도건에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목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진도건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왜요?”

천서은이 당황해서 되물었지만,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불청객들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돌아보니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청명 도사와 거적때기들을 기워 만든 것 같은 남루한 행색의 홍두형이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두 사람이 어색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분위기를 자기들이 깼다는 사실을 깨달은 홍두형은 뻘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헛기침과 함께 청명의 어깨를 툭 치고는 돌아섰다.

“크흠. 잘 얘기해 보아라.”

“예, 예…….”

더듬으면서 대답하는 청명을 뒤로하고 홍두형은 경공까지 펼쳐가며 급히 자리를 떠났다.

거기에 홀로 남은 청명은 왜인지 차갑게 느껴지는 두 사람의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한 채 불편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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