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 제29장. 사자(使者)로서 검림으로 (3)
비무가 끝났다고 해서 꼭 인사치레한다던가 하는 식의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소요자가 느닷없이 창무대에 나타나 청명을 데리고 훌쩍 빠져나가는 바람에 끝마무리가 썰렁하게 되었다.
‘실수?’
진도건은 소요자의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이 비무에서 있었던 치열했던 겨룸들이 실수로 치부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던 기분도 바로 창무대 위로 올라온 천서은의 미소 앞에서 사그라들었다.
“날 얼마나 놀래킬 거예요?”
“하하, 뭐가?”
“똑같이 태극검을 펼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원리만 비슷했던 거지……. 운 좋게도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어.”
진도건은 운이 좋다고 얘기했지만, 천서은은 그것도 진도건이 가진 무기이며 실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 형님은 뭐 맨날 운이 좋았대? 안 그러냐?”
최현걸도 어느새 영은성과 함께 창무대에 올라와서는 떠들어댔다.
언제나처럼 기분에 맞게 떠드는 최현걸의 말에 영은성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역시 자신이 찾으려는 답은 진도건에게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요자와 청명 도사가 순순히 돌아갔다는 건 패배를 인정했다는 건가? 공력의 영역으로 끌고 와도 떨쳐내기가 쉽지 않은 게 태극검이라 들었는데 같은 재주로 이겨내다니……. 이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비단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비무의 결말만이 아니었다.
“근데 목검은 어떻게 자른 거요? 목검이라 검기를 쓰기도 어려웠을 텐데.”
“글쎄다. 그것도 우연인 것 같긴 한데……. 잘 모르지만, 덕분에 시간을 벌었지.”
진도건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영은성은 그것이 진도건이 가진 무서운 잠재력임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검객이기에 청명의 목검이 잘려나간 순간의 그 섬뜩한 날카로움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언제나 진도건의 수련과 싸움 등을 유심히 지켜보는 습관이 있었던 영은성이었기에 찰나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었다.
그것을 제대로 본 사람이 바로 천무경이었다.
“대단한 잠재력인 것 같소. 천 맹주께선 그걸 느꼈기 때문에 목검을 던져서 시험해 본 것이겠지요?”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는 홍두형을 보며 천무경이 씩 웃었다.
“예전부터 그랬습니다. 한계에 부딪힐 만한 조건에 던져 놓으면 언제나 새로운 면모를 보이면서 극복해 왔죠. 소요자가 변덕 좀 부린 것 같은데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해 버려서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소요자는 심통이 난 모양인데?”
“청명 도사도 뭔가 얻은 눈치던데, 시간 좀 지나면 손해 봤다고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뭘 말이요?”
“총기가 넘치는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이 가진 기술을 모두 선보이며 승부를 보았습니다. 심통 난 소요자와 다르게 청명 도사는 표정이 무척 후련한 듯 보였으니 큰 깨달음이 뒤따를 것입니다.”
“호오, 그래요?”
그의 설명에 홍두형이 감탄했다.
과연 화경의 고수는 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창천맹의 깃발 아래 정사가 같이 모여 있긴 하나 은연중 경쟁심리들이 작용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천무방의 인물로 상징되고 있는 진도건이 이기자 씁쓸한 기분이 없잖아 있었는데 청명 같은 재능있는 무당파의 검수도 얻은 게 있다고 하니까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하긴 나도 많이 빼먹었으니까. 푸흐흐!’
홍두형은 최현걸의 실력을 확인해 보면서 깜짝 놀랐었다. 화산에 보낸 이후에 직접 가르친 게 벌써 2년이 넘었는데 그사이 실력이 일취월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타구봉법의 초식도 두 가지나 더 가르칠 수 있었고 내공의 축기도 도와주면서 제자의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소요자가 모르고 놓쳐서 마음이 오래 상할 수 있으니 있다가 가서 넌지시 알려 줘야겠구먼.’
홍두형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창무대 쪽을 바라보았다. 군중들 가운데 창천단 일부가 아예 올라와서 진도건에게 감복하여 예를 갖추고 돌아가는 모습도 보였다. 그의 실력에 설왕설래했던 기대감이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이었다.
“방주님.”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던 홍두형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오, 표개(彪丐) 아닌가?”
그의 말을 들은 천무경도 고개를 돌려 표개를 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기다려왔던 소식이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소식들을 취합하여 가져왔습니다. 찾으시는 사람들의 소식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네. 가시죠, 맹주님.”
“그러시지요.”
세 사람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홍두형은 가면서 창천단 무사 하나를 붙잡아 범굉대사와 구치상도 정무청으로 오도록 지시를 내렸다.
* * * *
창천맹 정무청에 모인 다섯 사람은 표개가 탁자 위에 펼쳐 놓은 보고서들을 살피고 있었다.
현재 돌아가고 있는 중원의 정세를 정리한 내용이 첫 번째였고, 마교의 움직임을 중원과 새외 두 건으로 정리한 것이 두 번째였다. 세 번째는 개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문파들 가운데 창천맹과 소통하면서 움직이는 중천, 녹림, 검림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였고, 구룡문의 동태를 감시하는 동향 보고서가 네 번째였다.
이 모두는 충분히 숙지하면서 향후 계획들을 수립해야 할 자료로 사용해야 했기에 표개의 요약된 설명만 우선해서 듣고 상세한 부분은 따로 회의를 거치기로 하였다.
현시점에서 그들이 관심을 두고 기다리는 것은 바로 별건 보고서였다.
표개는 품에서 세 개의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리고 겉에 적힌 서로 다른 표식을 살피더니 그중 하나를 먼저 풀어 앞에 펼쳐 놓았다.
“주백자의 행적을 찾았습니다. 멀쩡히 살아계셨습니다.”
“아미타불!”
“다행이군.”
“하오문에 회회족같이 다른 민족어를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도움이 됐습니다. 저희가 행적을 감지하기 시작한 곳은 서장 랍살(拉薩)이었습니다. 목격되는 일이 별로 없어서 행적을 좇기가 어려웠는데,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고원을 떠도시다가 곤륜산맥(崑崙山脈)을 넘어 신강 지역으로 넘어가신 모양입니다.”
“허허…… 그야말로 신출귀몰(神出鬼沒)이구먼. 그 지역까지 간 것은 역시 마교 본산을 찾아내기 위함인가?”
“그렇습니다. 여기 보시면 저희 방도임을 먼저 알아보시고 다가와서 ‘마교의 거물 하나 때려잡고 등선할 터이니 그만 쫓아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뭣? 푸하하하! ……아, 이게 웃을 일이 아닌 것 같군.”
표개의 말을 듣고 홍두형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주백자는 사실상 창천맹의 최대 전력이나 다를 바 없었다.
천무경도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정파 인사들의 증언들까지 검토한 결과 주백자는 당대 천하오절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두셋은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평가를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천무경도 진지한 심정으로 이 상황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주백자께서 마지막 위치가 확인된 곳이 신강 토로번 근처의 교하토성입니다. 다만 문제…… 라고 할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왜? 뭔데?”
표개는 들고 있던 나머지 두루마리들을 차례로 풀어놓았다. 그중 첫 번째 풀어놓은 두루마리는 신강 지역의 지형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표개는 그 지형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하나는 저희가 마교 본산의 위치를 추적한 결과의 보고서입니다. 토로번에서 더 북서쪽으로 산맥을 넘어가면 오로목제(烏魯木齊)라고 불리는 회회족 거주지가 있습니다. 저희의 분석 결과로는 이곳이 본거지일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는 판단이 있습니다.”
“표개야, 신경 쓰인다는 부분부터 말해야지.”
표개가 지형도 위의 토로번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보시는 바와 같이 토로번과 오로목제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습니다. 주백자는 이곳 토로번 인근에서 더는 종적이 끊어졌는데, 바로 이곳에 양자성이 나타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양자성은 교하토성에도 모습을 드러냈고요. 그것도 주백자와 같은 시기였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뭐?”
표개는 토로번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오로목제 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양자성은 이곳 오로목제로 향하는 중간 산맥을 넘어갔고,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합니다. 오로목제로 향했을 가능성도 있고 혹은 다른 길로 샜을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전자로 가정하고 추적하는 중입니다.”
“흐음, 양자성의 위치를 다시 붙잡을 가능성은?”
“거리를 두고 추적하는 처지라 쉽지 않습니다. 오로목제가 평범한 거주지처럼 보이긴 했지만, 상당한 고수들이 드문드문 보여서 자세하게 파고들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른 길로 새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찾을 수도 있겠지요.”
천무경은 양자성에 관하여 적힌 보고서를 들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양자성은 교하토성에서 마교인들과 동행하여 산맥을 넘었다라……. 그동안의 심증이 확실시되는군.”
“그가 마교에 투신했다는 말입니까?”
구치상의 물음에 천무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굉대사가 표정에 걱정을 내비쳤다.
“아미타불, 강 총수께서 크게 낙심하시겠습니다.”
“대사, 그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마음의 준비는 해두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상만 할 때는 부정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확실시되어버리면 그 충격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흐음!”
홍두형도 더 얘기하면 말꼬리를 잡는 것 같아서 신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천무경이 그때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 총수의 기분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주백자와 양자성의 행적이 겹친다는 게 좀 걸리는군요. 주백자는 천하를 떠돌면서 정파 문파들을 보살피는 한편으로는 사파 주요 문파들도 살펴보셨다고 들었소. 어쩌면 양자성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나간 것 아닐까요? 그렇게 본 사람만 수백, 수천이 넘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을 하겠습니까?”
구치상이 피식 웃으며 물어보았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기에 천무경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표개가 오히려 고개를 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추정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해야 합니다. 양자성을 약관 이후에 보셨다면 그자의 재능이 특출나기도 하니 눈에 담아두셨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가? 정보분석은 여전히 어렵군.”
표개는 홍두형이 가장 아끼는 수하로 일신의 무공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도 매우 비상하여 정보를 분석하는데 아주 능한 인물이었다. 경공이 매우 뛰어나기까지 해서 그 날렵한 모습이 표범 같다고 하여 이름을 그리 붙인 것이었다.
제갈무문과 표개, 홍두형 셋이서 이리저리 떠들어대던 걸 그 사이에서 듣고 있으면 머리가 아팠던 기억이 있어서 구치상은 이내 입을 꾹 닫고 얘기가 길어지지 않길 빌었다.
“어쨌든 가능한 사실 확인은 끝났으니 검림에 전해줄 준비를 이제 해야겠군요.”
“제가 요약해서 서신을 따로 작성해두겠습니다.”
“그럼 부맹주께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그들을 언제 출발시킬 것입니까?”
사전에 얘기해둔 바대로 진도건 일행에게 서신을 맡겨서 검림에 보내기로 한 계획을 일컬음이었다.
“내일 바로 떠나도록 해야지요.”
천무경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