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50화 (150/432)

150화 - 제29장. 사자(使者)로서 검림으로 (2)

진도건은 어느새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좀 더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생존에 직결된 일은 아니었으나 자존심, 자부심 등 따위로 설명되는 모호한 관념의 작용과 늘어지는 비무의 시간 속에 발생한 관성(慣性)과도 같았다.

이런 가운데 심리의 기저에 일격을 맞을 일은 피할 수 있다는 의식이 깔리기 시작하면서 육신의 사지와 감각의 기관들은 청명의 검에 주목하여 반응하면서도 의식은 이와 별리(別離)되기 시작했다.

조급함을 버리자 마음은 평정을 되찾고, 움직임에 힘겨움이 없으니 호흡도 흐르는 바람처럼 잔잔하고 고요하다.

가쁘게 움직이고 있으나 실은 위급함이 없어 정에 머물고 있으니 상검법을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피로함이 싫어 멀리한 지 수년이 흘렀어도 심신은 기억하고 있고, 의식은 생경하게 살아나 단전의 중심에서 사지의 끝, 목검의 칼날에도 미친다.

허리와 사지 관절의 회전들, 팔의 각도에서 시작하여 의식과 칼날의 선이 일치하니 손에 쥔 것이 목검이면 어떻고 날 없는 한낱 작대기면 또 어떠하랴.

신검합일.

이미 그 자체로 예리하게 벼려진 칼날과 같거늘.

통!

그 울림소리가 갖는 충격은 비단 청명뿐만 아니라 지켜보던 사람들조차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반 토막 난 목검.

비스듬히 잘려나간 단면은 진검으로 일 검에 잘려나간 듯이 매끄러웠다.

창무대 위로는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진도건은 목검을 뻗은 채 서 있었고 청명은 그 앞에서 토막 난 목검을 들고 당황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뭐지?’

진도건이 휘두르는 검에 맞춰 다시금 태극검으로 자세를 무너뜨리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의 목검이 진도건의 검날에 닿는 순간, 갑자기 뎅겅 잘려나간 것이었다.

튼튼하기 그지없는 자단목으로 만든 목검에 오히려 청명은 내력을 운용하면서 그 강도가 높아져 있었는데 어떤 걸림도 없이 잘려나가 버린 이 현상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도건을 보면 그런 의문은 더해진다.

그의 눈이 일순간 초점을 잃은 채 멍한 표정이 돼버린 것도 이상한데, 검기를 분출한 것도 아님에도 어떻게 목검을 잘라낸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닿기만 했을 뿐인데…….’

청명이 당혹스러워할 때, 창무대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천무경이 씩 웃더니 가까이 보이던 목검 한 자루를 허공섭물로 손에 당겼다. 그리고는 진도건을 향해 목검을 던졌다.

난데없이 창무대 위로 빙글빙글 돌아가며 날아가는 그 목검은 당연히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그 목검은 정확하게 진도건이 뻗은 목검을 향하고 있었다.

텅!

맑은소리.

천무경이 던진 목검은 정확하게 진도건의 목검의 날 부분에 부딪히자마자 뎅겅 잘려나가 땅에 떨어졌다. 그 부딪침의 충격이 전해지면서 멍하니 서 있었던 진도건도 깨어났다.

진도건은 청명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상황을 잠시 살핀 후에 자신이 상검법의 수행 상태에 접어들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로서도 잘려나간 목검들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목검이 잘려나갔지?”

“……진 대협이 자른 것입니다.”

“제가요?”

문득 오른 손목에 남아 있는 저릿한 느낌에 신경이 쓰였다.

정신이 들기 직전에 뭔가가 목검에 부딪혔다는 인식을 떠올리면서 그게 바닥에 두 동강 나 널브러진 또 한 자루의 목검이 바로 그것임을 인식하였다.

“으하하하!”

멀리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천무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는데 진도건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었다.

진도건은 그가 목검을 던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받으세요.”

진도건은 청명에게 자신의 목검을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든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부는 결정 났는데 왜……?”

“제가 어떻게 그 목검을 자를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청명 도사께서는 이런 결말을 기대했습니까?”

“그게 무슨…….”

청명은 되물으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진도건이 무슨 의미로 다시 시작하려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검기(劍技)로써 이 비무의 결착을 지어야 만이 의미가 있다는 걸 잊어버렸구나.’

청명은 반 토막 난 목검을 창무대 밖으로 던졌다.

진도건은 천무경이 던져준 목검을 다시 받았다.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고 재차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진도건은 왜 목검들이 잘려나갔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긴 했으나 그는 분명히 상검법을 수행하고 깨어났다. 그리고 실제로는 무척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식 빠른 회전 속에서 정말 많은 과거를 돌이켜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탕! 탕!

연달아 검격을 주고받는 와중에 청명은 다시 집중하여 태극검을 펼쳤다. 유려한 곡선을 들며 진도건이 만든 궤적을 파고들었고 이내 두 자루 목검은 찰싹 붙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좌로 휘두르면 그 방향에 힘을 더해 내리누르거나 위로 띄워 자세를 무너뜨렸고, 우로 휘둘러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졌다. 청명의 목검은 여전히 그의 목검에서 떨어질 여유를 주지 않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일격을 시도했다.

그만큼 청명의 태극검은 아주 정교하였다. 그리고 진도건은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일단 작게.’

진도건은 검을 당기면서 검 끝을 빙글 돌렸다. 아주 작은 원을 그리는데 그 방향이 아래로 향하고 있으니 청명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하나의 원을 그리면서 당기고 다시 위로 끌어올리면서 또 원을 그렸다.

‘좀 더 크게. 그리고…… 느껴야 해.’

원을 그리는 것.

그것은 목검이 그리는 궤적 속에서 공간감을 의식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검을 적당한 압력으로 부드럽게 쥐어 손바닥의 감각을 민감하게 두고 검신을 타고 전해오는 느낌들에 집중한다.

베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찌르겠다는 생각을 버린다.

그들이 추구하는 검은 궁극적으로 활검(活劍)이니, 그에 맞춰 생각하면 그 이치를 이어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상검법을 통해 찾은 실마리는 과거 대검법 수행 시 보여 준 조강선의 시범.

그 시범이란 주백자가 보여 준 태극검의 이치를 흉내 낸 것이었으니 비록 그가 스스로 흉내라고 표현했다고는 하나 어떤 무당파의 검수가 그의 경지를 보고 흉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맞닿은 두 자루 목검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포착하고 손목을 비튼다.

“읏!”

청명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낮은 신음.

진중했던 얼굴의 표정 위로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오를 때, 진도건은 전에 볼 수 없던 한 걸음으로 과감하게 파고들며 목검을 비틂과 동시에 우로 당겼다.

청명의 얼굴에 당혹감이 더욱 짙게 떠올랐다.

급히 현천보를 밟으며 중심을 이동시키고 진도건이 이끄는 힘의 방향에 더해 목검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다시 진도건의 목검으로부터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이전과 같은 억지스러운 변화가 아니라 마치 그의 힘을 타고 넘어가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바람이 풀잎을 누이고, 물결이 돌벽을 깎는 느낌이 아니었다.

마치 바람과 바람이 만나 얽히고, 물길과 물길이 만나 얽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얽히면 그 중심에선 힘이 소용돌이치기 마련이니 결국 누가 주류가 되느냐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청명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것은 태극검……!’

바로 어제까지 소요자와 함께 검을 맞대고 춤을 추었던 감각이 진도건과 맞댄 목검 사이에서 생경하게 살아났다.

그 충격적인 기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입속 볼살을 깨물어 핏물이 삼켜지니 그 비릿한 맛으로 인해 그의 신경은 각성 상태에 이르렀다.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하여 목검이 맞붙은 채로 이리저리 방향을 틀고 서로를 끌어안듯 요동을 치니 평범한 사람은 감히 그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오로지 이 장내에서도 높은 경지에 이른 소수의 인물만이 감탄과 경악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태극검을 따라 하다니!’

이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심지어 천무경의 생각도 그러하여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소요자는 태극검의 선도자로서 진도건이 펼치는 것이 태극검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생각은 편협한 것이 아니라 꽤 냉정한 분석이었다.

‘이화접목의 이치까지 체득하고 있을 줄이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소요자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좌로, 우로 그리고 위아래로 목검을 흔들 듯 움직이고 있는데 두 자루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세하게 힘을 비틀고 또 비틀면서 상대를 역이용하려는 힘의 이동들은 쉴 새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거기에서 진도건의 의식 속 흐름은 더욱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으니 육신이 절로 반응하고 그에 따라 목검도 같이 움직였다.

이 가운데서 이제 조급함은 청명의 몫이었다.

사량발천근.

넉 냥의 힘으로 천근을 움직인다는 이 말은 마치 내가 고수들이 작은 힘을 주고도 내력으로써 큰 힘을 발휘한다는 그런 전유물처럼 치부 시 되곤 했으나 사실 그 진의는 달랐다.

천 근을 다스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면 그땐 넉 냥의 힘만으로도 능히 천 근을 다룰 수 있다는 기본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진도건의 외공은 그와 같아 자신의 힘과 속도를 자유롭고 적절하게 제어할 수 있으니 청명이 따라올 경지가 아니었다.

더욱더 세밀하게 쪼개면서 힘의 흐름을 변화시킨다.

큰 흐름 속에 작은 흐름을 품고 또 그보다 작은 흐름을 일으켜 계속해서 줄여 나간다.

그것이 동작의 각 순간순간에 이뤄지고 있으니 청명으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태극신공으로 뻗어 나가 손에 머물던 기운은 진도건이 만드는 연속된 변화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점점 청명의 손아귀에서 휘몰아쳤다. 그 압력은 청명의 악력을 밀어내고 있었고 마침내 목검을 쥐는 힘이 제대로 헐거워졌다.

그 버거움을 청명이 제대로 인식하였을 때, 진도건의 목검이 그의 목검을 제대로 휘감듯 파고들었다.

팡!

공기를 담은 작은 부대가 터져나가듯 작은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청명의 손이 열리면서 그의 손아귀에 있던 목검이 진도건이 쳐올리는 목검을 따라서 하늘로 솟구쳐 날아갔다.

마침내 시도가 성공한 진도건의 머릿속에 조강선의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태극검의 후발제인(制人)이라. 상대의 공격을 역이용해서 제압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피를 피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그럴 바엔 차라리 검만을 제압(制劍)하여 승복시키는 것이 나은 것 같은데. 어떠냐, 검을 빼앗긴 소감이?’

왜인지 목검을 놓쳐 버린 청명의 모습에서 진도건은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가 있다면 어릴 적 진도건은 이 심오한 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었고, 청명은 이 원리를 지금까지 오래도록 갈고 닦았었다는 점에 있었다.

“하아.”

청명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태극검이 진 것인데, 이상하게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그는 결과를 승복하기 위해 진도건을 보며 포권을 취하려고 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소요자의 신형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는 청명의 어깨를 짚으면서도 시선은 진도건을 향했는데 그 눈빛에서 회한(悔恨) 같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빈도가 오늘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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