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49화 (149/432)

149화 - 제29장. 사자(使者)로서 검림으로 (1)

원류검결(原留劍結).

이 무공의 명칭만 보면 아주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검을 익히는 데 있어서 근본에 머무르기 위한다는 뜻이었으니 진취적이지도 않고 패도적이지도 않은 그저 원론적인 검법처럼 들리는 이름이었다.

여타 초식을 구성한 검법들이나 태극검처럼 특정한 이치와 철학을 가진 무초식의 검법 등은 하나같이 공방의 목적성을 짙게 띠고 있는 데 반해 원류검결은 실상 그 수련 과정이 하나의 순수한 운동법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수련법으로 어떻게 적의 공격을 피할 것이며 검 끝에 찌르거나 베고자 하는 의지를 담지 않고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둔 채 움직이고 있으니 이것을 무공으로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천무경이 원류검결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조강선이 주백자와 함께 첫 제자였던 원건에게 무공을 가르치면서 겪었던 실수란 천무경이 내는 욕심과 동일 선상의 이유였기 때문에 그다음으로 만든 원류검결은 무공이 가진 목적의식을 지우는데 집중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원류검결은 태극검처럼 철학을 품은 무초식의 검법이면서도 어떤 목적으로 이치를 공부하게 만드는 검법도 아니라는 측면에서 더더욱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이었다.

조강선이 진도건을 가르칠 때 수행시킨 방법은 크게 다섯 가지로 아래와 같았다.

첫째, 명상법(冥想法).

수련에 앞서서 반드시 마음에서 잡념을 덜어내어 오로지 수련 과정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정신을 다듬는다.

둘째, 완검법(緩劍法).

천천히 검을 움직인다. 베고 찌를 수 있는 모든 동작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천천히 수행한다. 행동이 생각을 좇아가지 못해 급급해지는 것에 적응 및 제어함에 있었다.

셋째, 정검법(靜劍法).

느린 것을 더 느리게 하여 마침내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의 모호해지는 경계에 도달하도록 한다. 급급한 마음에서 해방되니 평정(平靜)에 도달하게 되어 중단전에 머무는 ‘정’을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이 유지하도록 돕는다.

이 수련을 위해 한 동작을 상정하여 열두 시진(24시간)을 모두 사용하여 펼쳐낸다.

넷째, 대검법(對劍法)

정검법을 수련한 날이 지나고 동이 트기 시작할 때, 두 시진을 자고 일어나면 육신과 정신이 피로로 인해 이질적인 관계가 된다. 이 상태에서 조강선은 진도건의 한계를 자극하는 수준의 대련을 펼친다. 조강선의 대검(對劍)은 진도건의 움직임을 끌어내고 반복시켜 주는 것에 목적이 있으며 그의 모든 경험을 녹여내어 시간을 두고 체화(體化)할 수 있도록 한다.

다섯째, 상검법(想劍法).

정검법을 수행하기 시작하여 경지에 이르면 몸은 움직이되 움직이지 않으니 명상을 통한 상상 속의 수행을 이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본디 육신과 생각은 일맥(一脈)이라 생각대로 육신이 움직이기 마련이어서 정검법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건 필연적이다.

따라서 대검법을 치른 다음 날 극한에 이른 피로와 수행의 기록이 몸에 새겨져 있을 때, 수행함으로써 반 수면에 가까운 상태로서 대검법을 복기하고 생각의 속도를 촉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육신의 한계는 높이고 판단의 반응은 섬전(閃電)과 같게 하니 결국 이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원류검결의 요체란, ‘검’도 근본은 ‘사람’에게 있으니 굳이 살생 등의 목적을 둔 형식을 갖추지 않고도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길에 있었다.

이것이 바로 소요자가 얘기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검합일을 뜻하는 것이었으니 현재 조강선이 이 세상에 없는 이상, ‘이 경지에 이른 것은 오직 진도건이 유일하다’라고 얘기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 * *

기(氣)라는 것을 인지하고 다룰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인간은 상식의 한계를 무너뜨리고 큰 힘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진도건은 그 이상의 이상을 겪어 왔기 때문에 자신의 검이 먹히지 않는 일에 전혀 의아해하지 않았다. 또 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기 시작한 시점에선 그 또한 더 큰 자신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어찌 됐든 간에 내공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비슷한 조건에서도 그의 검은 언제나 우월했었고 쓰러뜨리지 못할 상대가 없다는 자부심은 여전히 존재했다. 물론 이런 가정이 실전에서 상정할 일은 없었지만, 진도건이 갖는 하나의 작은 자존심 정도는 되었다.

역시 그렇기에 상대가 그의 검속에 반응할 정도의 내공만 운기하고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어떤 상대든지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거 정말 대단하구나……!’

그런 의미에서 청명의 태극검으로부터 내심 감탄하고 있는 진도건의 심정은 진짜였다.

검을 들었을 때,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작은 상념 정도는 품고 있었다.

그러므로 태극검에 의해 속박된 듯한 느낌이 주는 답답한 기분은 도저히 용납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용케 청명의 목검이 몸에 닿는 것만큼은 피해내고 있었지만, 그가 머릿속에서 온갖 자세들을 쥐어 짜내면서 시험해 봐도 태극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왼손 등의 박투술까지 동원하면 어찌해 볼 수도 있을 거 같은 기대를 품으면서도 그조차 가능성을 점치기엔 쉽지 않았다.

애초에 손에 검을 든 이상 자유로울 거로 생각하는 것이 기본이었기에 검객으로서 자존심이 그걸 용납하지도 않았다. 소요자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걸 갚아 주려면 오직 검으로만 이 난국을 타개해야 의미가 있었다.

‘유검이라지만, 바람처럼 빠르고 뱀처럼 변화무쌍하다. 조금의 틈만 보이면 바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니 여유도 주지 않는다. 속도의 이점이 없는 베고 찌르는 거로 이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

진도건은 생각을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방법들을 고민했다.

누군가가 보기에 헐레벌떡 우스꽝스럽게 굴러가면서 청명의 검에 놀아나듯이 움직이면서 말이다.

“하핫! 저게 무슨 꼴이야?”

군중들 사이에서 비웃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천서은이 목소리가 들린 쪽을 째려보았다. 그러나 비단 그녀가 눈초리를 준 곳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비슷한 반응이 흘러나왔다.

‘청명은 저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내공을 사용하고 있는데 다들 그것도 몰라?’

하지만, 천서은은 이런 자기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음에도 적어도 이 자리에선 의미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십수논검의 취지는 진도건과 청명 간에 무언의 합의로 인해 깨져 버렸다.

군중들의 시선에서도 가타부타 조건 따지는 것 없이 무당파와 진도건, 어느 쪽의 검이 더 우월한가에 관한 관심이 커져 버렸다.

그걸 천서은도 모르지 않았기에 불안한 눈빛으로 진도건의 상태를 살펴보고 있었다.

‘저대로면 언제 제압당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태극검의 위력이 저 정도일 줄이야.’

천서은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다가 소요자에게 시선이 닿았는데 그는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창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제자가 이기고 있는데 왜 저런 표정이지?’

천서은은 정확히 소요자의 심경을 읽은 것이었다.

어차피 청명이 진도건과 검속을 나눌 만큼 충분히 내공을 활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승패의 우위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었다.

‘제압이 불가능하다니…….’

태극검이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여 제압하기 위한 검법은 맞으나 적의 무공 수위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으면 사실상 진검을 든 이상 살생은 불가피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검이 아닌 목검 대련이라면 살생의 심적 부담을 충분히 덜어낼 수 있었다.

청명이 우세를 점하면서 진도건의 검을 제어하고 있는 건 눈에 보이는 사실이지만, 몸을 타격하기 위한 시도들은 번번이 무산되고 있었다.

‘신검합일이라……. 나를 포함한 검의 고수라는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소요자는 더 궁금해졌다.

자신이 나서기가 민망하기 그지없어 제자를 대리인으로 세운 셈이었지만, 이렇게 결착을 가를 수 있는 상황이 보이지 않으니 직접 겨뤄 보고 싶은 생각도 든 것이다.

‘이런 일로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다니……. 내 수양이 아직도 모자라다. ……아니, 주백자 사숙조는 무공에 대한 욕심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으니 그런 경지에 오르신 게 아니겠는가? 하아, 어찌할꼬! 이 또한 번뇌로다!’

소요자는 심호흡하면서 머릿속의 어지러운 잡념을 하나씩 덜어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빨리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지 여전히 비무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엔 쓴맛을 참는 듯한 미묘한 찌푸림이 보였다.

잡념에 고전하는 소요자처럼 진도건도 머릿속이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생각을 회전시키고 있었다.

‘끊어치자.’

따다닥!

생각과 동시에 목검을 좌우 반복해서 끊어쳤다. 연달아 움직이니 청명의 목검을 떼 내는 데 성공했지만, 오히려 청명의 눈에는 기회를 다시 안겨 주는 것이었다.

슈악!

목검의 잔상이 급히 뒤로 고개를 젖힌 진도건의 눈앞을 휩쓸고 지나쳤다.

급히 피하고 나니 그의 검은 다시 태극검의 권속 아래였다.

이번엔 목검을 크게 휘두르되 비틀어 궤적 안에 반드시 상대가 어떤 공격을 해도 방어를 할 수 있도록 시도했다.

‘아차! 아까 했던 걸을 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방어 수법이었으나 그의 검에 찰싹 달라붙은 채 비틀어 휘두르는 궤적과 함께 날아오는 목검에 다시 한번 땅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진도건으로서는 수가 바닥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출타(出他)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무가 길어지는 것.

오히려 진도건은 조급해졌고, 청명은 느긋해져 갔다.

전심전력으로 맞붙는 실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마다의 목적과 자존심으로 내공을 사용하지 않거나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두 사람의 처지가 다른 이유는 명확했다.

‘질 수 없는 싸움이다.’

청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 제한된 조건 속에서 이 지경까지 비무가 이어지고 있다면 청명은 진도건이 어떤 수를 내더라도 다시 태극검의 이치 아래 옭아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진도건을 제압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항복 선언이라도 받아낸다면 무당의 긍지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청명은 곧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진도건이 내공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그도 자기 자신에게 암시를 걸면서 내공을 운용하고 있었다.

‘이 선을 넘어선 안 돼’

그런 암시와 함께 어차피 제한된 내공만을 사용하는 거라면 밤새 이대로 지속해도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이는 결국 ‘하하! 내가 이기고 있어!’라고 하는 자기 최면에 걸린 꼴이 되어 버렸다는 걸 청명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현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자.

지금의 현상을 뒤엎으려고 하는 자.

문제를 일으키고 변혁을 꾀하는 것은 언제나 후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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