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제28장. 태극검(太極劍) (5)
소요자는 잠시 눈앞을 가린 묵허자의 뒷모습 같은 잔상을 지나쳐 영은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웠는데 우는 모습이 영락없이 철없는 소년 같았다. 하지만, 화산파라는 이름의 무게를 한껏 등에 지고 혹독한 환경의 풍파 속에서 꿋꿋하게 성장하려 했던 고난의 비애도 느껴졌다.
영은성의 울음은 조금씩 사그라들었지만, 얼굴은 여전히 많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이미 눈물에 젖어 버린 옷소매로 얼굴을 닦아 봐야 더 엉망이 되기만 했다. 그러나 그런 가식적이지 않은 모습을 바라보는 소요자의 눈에는 엄격한 가르침에 눈물짓던 청명의 어릴 때 모습이 떠올랐다.
똑같은 봉문이라도 무당과 화산의 처지가 그만큼 달랐으니 영은성이 어떻게 어려움을 묵묵히 참아내며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 것 같았다. 청명에게 있었던 어린 나이에 일찍 투정 부릴 수 있던 여유가 영은성에겐 없던 것이다.
“자네의 스승께서 무엇을 중히 여겨 가르침을 주었는지 고민해 보게. 아마 거기에 답이 있을 것이네.”
“흐흑, 알겠습니다…….”
소요자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격려하고는 처소의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영은성은 얼굴의 눈물을 마저 닦으면서 깊이 호흡했다.
여전히 해답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복잡하게 얽혀 있던 실타래가 풀린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전각들 사이로 시원하게 부는 바람이 가슴을 관통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묵허자의 가르침은 매화검법에 고스란히 녹아 있었으니 영은성 본인이 자신 있는 검법인 만큼 그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의지는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무엇을 배웠고, 무엇을 들었는지.
과거를 되짚어보며 돌아서던 영은성의 시야에 야율균은의 모습이 잡혔다.
처음엔 무심하게 쳐다보았다가 문득 퉁명스럽게 대했던 자신의 태도가 떠올라 부끄러워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흥!”
야율균은이 콧방귀를 뀌면서 영은성의 얼굴은 더욱 홍당무가 되었다.
“엉엉엉! 아주 울고불고 난리가 나셨어요, 화산파 도사님. 얼굴을 아주 얼룩덜룩하게 해서 참 보기 좋으셔요. 걱정해준 나한테는 듣기 싫은 체를 다 하더니 도사들끼리는 아주 쿵짝이 잘 맞아. 한족들은 원래 다 그렇게 이중적이냐?”
야율균은은 아이가 대성통곡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면서 그를 놀려댔다.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모습이었지만, 영은성은 그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무례하게 굴었던 점 사과드리겠소.”
야율균은은 그를 몇 번 더 비꼬았지만, 영은성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사과할 뿐이었다. 그녀로서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풀고 싶은 의도도 있었지만, 진지함의 벽에 장난은 무딘 칼이었다.
오히려 야율균은은 자신이 광대가 된 기분이 되어 버렸다.
영은성도 사과는 하고 있었으나 다소 멍한 기분으로 무엇이 해답인지 고민을 거듭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서 뭐 해?”
그때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천서은의 것이었다.
목소리를 쫓아 뒤를 돌아보니 계단 위로 그녀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사내를 본 순간, 영은성의 머릿속에 묵허자의 목소리들이 귀에 꽂히듯 머릿속에 들려왔다.
“뭐라? 진도건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도대체 거기가 어디냐? 내 놈의 숨통을 끊고야 말겠다!”
분노에 가득 찼던 묵허자의 목소리.
“진도건이란 녀석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건 어쩌면 우리 화산파의 명운을 세울 기회다. 놈의 스승이 그 조강선이라니. 허허허…….”
허탈한 표정이었던 묵허자의 목소리.
“놈들을 숨겨 주는 대가로 널 그들 곁에 있을 수 있게 얘기해 두었다. 내려가 그들의 것을 훔쳐내야 한다.”
고집스러웠던 묵허자의 목소리.
“내가 놈을 본 건 몇 년 전의 일. 그때도 놈은 이 스승과 능히 검을 겨룰 정도로 괘씸한 녀석이었다. 신검합일이란 말이 그저 듣기에만 좋은 허울뿐이라고 여겼던 내 생각을 완전히 무너뜨렸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이 스승의 실력은 놈을 만난 뒤에 비로소 늘었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매화검법의 24개 초식, 참 많지 않으냐? 검기조차 화려하니 무엇을 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화산파의 명맥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으로 고집스럽게 수련해 온 이 형태들(形)이 어쩌면 형벌(刑)이 되어 나를 구속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그리고 언제였던가, 그는 결국엔 무언가 깨달은 듯 진중한 목소리로 제자에게 뜻을 전하기 시작했었다.
무심코 떠오른 그 목소리들의 마지막은 분명 묵허자의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었으나 다시 되새겨보는 영은성에게 그것은 지금도 쉬이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어째서 검법의 초식이 시전자를 옥죄는 형벌이 된다는 말인가?
“네 꼴이 그게 무엇이냐?”
“진 대협…….”
진도건의 목소리에 영은성의 눈빛이 흔들리며 그를 향했다.
멍한 표정과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한 영은성은 진도건에게도 생소한 모습이었다.
“울었어요?”
“질질 짰어, 아주.”
천서은이 놀라 물어보는 소리와 야율균은이 약 올리는 말투로 대답하는 목소리는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멍하니 진도건을 보다가 예전에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매화검법이라. 과연 역사와 전통을 아우르는 검법이어서 그런지 초식에 빈틈이 없구나.’
영은성은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등골을 타고 정수리까지 전류가 찌릿하며 타고 올라가는 듯했다.
“진 대협. 내일 청명 도사와 십수논검을 하기로 했지요?”
“그래.”
“계속 운기조식만 하신 거로 알고 있는데 몸이 굳으셨을 거 같습니다. 괜찮으시면 부족하더라도 저를 상대로 가볍게 몸을 푸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건은 저와 몸을 풀기로 했어요, 영 소협.”
천서은이 나서서 끼어들었다. 그러나 진도건은 천서은의 어깨를 짚으면서 눈을 마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영은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꾸나.”
천서은은 약속을 바꾼 진도건의 반응에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도건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영은성의 볼썽사나운 몰골 속에서 갑자기 눈빛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는 숨은 진의가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꼬르륵.
요란한 소리에 모두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진도건은 멋쩍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우선 배부터 채우고. 씻고 나오느라 며칠 간의 허기를 달래지도 못했다.”
“가요, 어서. 저도 배고파지고 있어요.”
천서은은 진도건의 팔을 감싸 안으며 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은성도 그 말을 듣고는 식사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는 그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야율균은은 묘한 표정으로 진도건과 천서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거리를 조금 유지한 채 뒤따라갔다. 연인이 걸으면서 옷깃을 부딪칠 때마다 산뜻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그녀의 후각을 간질이고 있었다.
“에휴.”
야율균은이 외로운 감정을 삼키며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 * * *
다음날.
창무대에 어느덧 사람들이 제법 모이기 시작했다.
천무경과 진도건이 화려하게 겨루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소요자가 직접 청명을 지도했다는 소문을 들은 창천단원들은 상당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근무지를 이탈하면서까지 몰려들었다.
진도건 대 청명 도사.
꽤 흥미로운 십수논검이었던 것만큼 창천단주 구치상도 특별히 고려를 해 주었다.
‘이 지경까지 되어 버리니 결말을 예상하기가 쉽지 않군. 진도건이 이길 것 같지만, 바로 어제까지 소요자가 사사하였으면 감각이 예리하게 서 있을 터.’
어쩌면 더 격렬한 싸움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더 심오한 대결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밌겠어. ……응?’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중에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군중들 가운데 영은성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재능은 있으나 고집스럽고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화산파 도사.
그것이 구치상이 영은성에 대해 내리는 평가였다.
창천단은 연령대가 다양하여 갓 약관에 이른 젊은 사람도 있었고 4, 50대를 넘긴 중장년층도 있었다. 무공의 성장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으나 대개 나이가 들수록 여러 가지 습관들이 굳어지면서 일취월장 수준의 진보를 이루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은성은 마치 4, 50대의 무인들처럼 매화검법이라는 틀에 갇힌 듯 융통성이 없었다. 초식의 완성도 자체는 깊고 운용의 묘도 잘 살리지만, 딱 예상했던 기대 수준을 벗어나진 못했다.
진도건과 3년 가까이 함께 수련했다는 얘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진도건의 자유로운 검에 비하면 영은성의 검은 겉보기에 화려하기만 할 뿐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눈빛이 달라졌군.’
지난 며칠 동안 피로와 불만이 가득한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처음 봤을 때, 무언가 배움을 갈구하는 기대 어린 눈빛이 다시 살아 있었다.
오오오!
기대에 찬 탄성이 들려오자 구치상은 영은성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창무대 쪽으로 돌렸다.
진도건과 청명 도사가 서로 반대 방향에서부터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었다.
진검이 아니자 아쉬워하는 원성도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장내엔 그런 아쉬움도 잊을 만큼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소도 무당파의 청명이라고 합니다.”
“천무방의 진도건입니다.”
“한 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청명은 가볍게 발을 뻗어 자세를 낮추고 목검의 첨봉을 진도건에게 겨눈 채 비스듬히 틀었다. 그리고 목검 쥔 손을 왼손으로 가볍게 누르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진도건은 목검을 가까이 당긴 채 마찬가지로 자세를 살짝 낮추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왼손은 뒷짐을 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몸이 앞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어느 쪽이 어떤 공방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지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흘렀다. 이 모습을 창천단뿐만 아니라 천무경과 소요자, 두 부맹주들까지도 목 좋은 곳에 따로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천서은, 최현걸, 야율균은 등도 이를 지켜보고 있음은 물론이었다.
저마다의 흥밋거리를 찾으며 장내에 들어와 있을 때, 영은성은 진도건의 검에서 자신이 원하는 길을 다시 찾아보고자 했다.
그의 검술이 매화검법 24초식을 온전히 체득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면 지금은 그에게 한 단계 너머의 길을 보여 주길 기대하고 지켜보려 하는 것이었다.
청명도 적당한 긴장감으로 진도건을 주시하고 있었다.
맞상대할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역시나 천서은과 처음 합을 나누었을 때였다. 그녀의 쾌검에 일방적으로 무너졌던 부끄러운 일을 다시 겪을 수 없었다.
그녀보다 빠른 검과 진정한 신검합일이란 과연 그에게 어떤 시험에 들게 할지 집중하는 터라 수 초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 벌써 팔에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저벅저벅…….
진도건이 차분하게 걸음들을 내딛자 경공으로 돌진해올 줄 알았던 청명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탓탓탓…….
발걸음의 박자가 점점 빨라지며 진도건의 신형은 더 청명에게로 기울었다.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긴장감이 증폭되는 만큼 눈꺼풀 깜박이는 것조차 허용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때,
적갈색을 머금은 선형의 궤적이 화살처럼 청명을 향해 날아갔다. 순식간에 측두부(側頭部)를 부숴 버릴 것만 같았던 진도건의 목검 앞으로 청명의 목검이 불쑥 솟아올랐다.
타앙-!
창무대가 세워진 섬 전체를 울릴 정도의 격렬한 타격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