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제28장. 태극검(太極劍) (4)
야율균은은 그 잠깐의 눈 마주침으로 영은성의 심경이 어떤지 대략 눈치챌 수 있었다.
무당파의 위상이 조금 더 높긴 하나, 화산파의 명성이 결코 그에 뒤진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사대전에서 천무방을 상대로 최전선에서 싸웠던 섬서 지역의 두 정파 화산파와 종남파는 괴멸적 타격을 받음으로써 종남파는 멸문의 길을 걸었고 화산파는 와해에 가까운 지경에 이르렀다.
작금에 이르러서야 관계가 회복되며 정파의 봉문이 풀렸고 화산파의 깃발이 다시 연화봉에 세워졌지만, 그래도 과거 전력을 어느 정도 보존한 채로 봉문했던 무당파와 비교하면 조건이 매우 열악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 결과로 무당파에서는 소요자라는 불세출의 고수가 등장하였고 청명 도사라는 뛰어난 재능이 그 뒤를 이을 상황에서, 같은 세대의 후기지수인 영은성의 시선에선 스스로가 초라해져 보이는 것이었다.
자신도 화산파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으로 추켜세워지고 있으나 그의 스승인 묵허자는 소요자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 과연 벽에 가로막힌 자신의 상황이 스승 때문인지 자신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고, 또 이런 식의 이유를 찾는 자신의 꼴이 추레할 뿐이니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너무 강한 상대와 대련하는 건 자신감을 잃는 원인이 되기도 해.”
“뭘 안다고 그러시오?”
영은성이 돌아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하자 야율균은은 구치상이 했던 것처럼 뒤통수를 후려쳐 버릴까 생각했다가 속으로 꾹 눌렀다.
“사촌오빠 야율재는 흑풍신마의 자리를 이을 정도로 대단했고, 내 오라버니 야율신도 그 못지않은 대단한 고수였어. 흑풍대에서 내가 활약할 자리가 있었을 거로 생각해? 너희한테 전멸당했던 그 전쟁이 내가 처음으로 여한 없이 싸웠던 전투였어. 꼴사납게 죽상인 얼굴로 그러는 거 별로 봐줄 만하지 않아.”
영은성은 야율균은을 힐끔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당신과 난 같은 입장은 아니오. 내겐 스승님의 뒤를 이어 화산파를 끌어야 할 책무가 있소. 당신처럼 흑풍대를 쉽게 포기할 처지가 아니오.”
“하!”
말의 내용도, 어투도 이전과 같이 묻어나오던 친절함이 사라졌다.
야율균은은 달라진 영은성의 태도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그에게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억울하기도 했다.
여기가 초원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쌍곡도를 뽑아 들고 결투를 하든 기습을 하든 불손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긴 창천맹이었고 언제나 친절했던 영은성에겐 알게 모르게 조금의 정이 쌓여 있었다.
“그래, 미안하다. 패잔병인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지. 알아서 잘해 보라고”
야율균은은 그렇게 쏘아붙이면서도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영은성도 돌아서는 그녀를 붙잡고 싶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흔들리는 자존심과 책임, 부담감 등 겹겹이 딸려와 어깨를 짓누르는 중압감은 몸에 배어 있는 쉬운 친절조차 무시하게끔 하였다.
끼익.
축조된 지 2년여밖에 되지 않았는데, 조립이 잘못된 것일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비틀린 잡념이 발목을 붙잡은 영은성은 물론이거니와 막 돌아가던 야율균은의 발걸음도 붙잡아 돌려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전각 안에서 젊은 도사와 노도사가 함께 나오고 있었으니 바로 청명도사와 소요자였다.
“영 대협, 반갑습니다. 무당의 청명이라고 합니다.”
청명이 영은성을 바로 알아보고 다가와 포권을 취했다.
진도건과 함께 온 일행으로서 유명했고, 화산파의 미래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영은성의 명성은 정파 내에서 특히 주목을 받는 부분이 있었다. 나이도 어린 청명으로서는 반사적이되 진심으로 보이는 예의였다.
하지만, 영은성은 단번에 청명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검수임을 깨달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진중한 보폭과 흔들림 없는 균형감은 물론 은은하게 느껴지는 기백은 상대의 심리를 억누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무당검수만이 아니라 도가제자로서도 그 수양의 깊이가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화산의…… 영은성이오.”
사문을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는 듯했다. 영은성이 누군지 먼저 알아봤기에 망정이지, 몰랐다면 그 기어들어 가는 말만 듣고는 되물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걸 뒤에서 보고 있는 야율균은의 얼굴엔 한심하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확실히 저 노도사의 기백은 엄청나구나. 젊은 도사도 그렇고……. 저만한 사제관계는 부러울 만하지.’
그녀는 슬그머니 근처로 물러나 마치 상관없는 사람인 척, 때마침 보이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은 채 영은성 쪽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영은성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청명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애써 그를 무시했다. 보고 있으면 왠지 자신의 실력이 초라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신 그는 소요자를 보며 예의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무당의 소요자를 뵈어 영광입니다. 화산파 제자 영은성입니다.”
“원시천존.”
소요자는 도호를 외우며 영은성의 인사를 가볍게 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청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은 푹 쉬고 명상으로서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이 하여라.”
“알겠습니다, 스승님.”
청명은 소요자의 당부를 공손히 받았다. 그리고 영은성에게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신이 머무는 처소로 향했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야율균은도 발견하고는 그녀에게까지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나서야 장내를 떠났다.
‘친절 도사가 또 하나 있었네.’
길을 따라 멀어지는 청명의 뒷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이 꽤 닮았다고 생각하는 야율균은이었다.
소요자도 잠시 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청명을 지도하느라 태극혜검의 두 번째 실마리가 벌써 감각에서부터 멀어지는 거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하룻밤 진지하게 명상을 해도 그것을 잡을 수 있을지 우려스러웠다.
소요자가 발걸음을 뗄 때, 영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움츠러들었다.
그를 이곳까지 향하게 만든 발걸음이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복합적으로 얽힌 감정의 피로는 결국 자격지심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 것임을 청명을 본 그 잠깐 사이에 깨달아 버렸다.
영은성은 의욕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고는 힘없이 팔을 내리고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그리고 돌아서기 위해 오른발을 한 발자국 내딛는 그때였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느냐?”
소요자의 물음이 마치 암운을 비추는 한 줄기 햇살처럼 들려왔다. 번쩍 정신이 들어 소요자를 바라본 영은성은 벌써 감격에 겨운 마음이 되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창천단주와의 대련에서 그분은 저의 검술에 대해 혹평을 하셨습니다. 물론 저를 일깨우기 위한 조언으로 듣고 고민해야 함을 알지만, 그것이 제 귀엔 조롱으로만 들리고 길은 찾을 수 없으니 제 부족한 재능 때문에 사문의 명성에 먹칠하는 것만 같아 이 상심을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 때마침 맹에 소요자께서 오셨음이 떠올라 이렇게 왔습니다. 감히 작게라도 지도를 청하고자 하니 소도의 고민을 헤아려 주십시오.”
구구절절 늘어놓는 영은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면서 그 절절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소요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손으로 이마를 쓰다듬었다.
깨달음의 실마리를 붙잡기도 바쁜데 영은성의 그런 마음을 얘길 듣기도 전에 엿보고 말았으니 이에 발목이 붙잡히는 건 모두 소요자 본인의 천성 탓이었다. 무공에 깊이 심취해 있으나 어려움을 지나치지 말라는 도가의 가르침도 있었으니 차마 무심하게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하아, 이 노도는 한평생 무당의 무학에만 심취하며 살았으니 제아무리 같은 도가라 하더라도 어찌 화산의 무학에 훈수를 놓을 수 있겠느냐?”
“그, 그…… 선배께서는 깨달음이 지고하신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소한 제 부족함은 쉬이 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부디 길을 열어 주십시오.”
“구 단주도 비슷한 경지에 오르신 분인데, 이 노도라고 뭐가 다르겠느냐?”
“하아…….”
조심스럽게 내뱉는 영은성의 호흡이 다소간 거칠어짐이 보였다.
소요자의 말로부터 그의 간절함이 외면당하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어린 도사의 마음일 뿐, 노도의 깊은 헤아림은 여전히 품으로 보듬으려 하고 있었다.
“허나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겠구나. 무당의 도(道)는 속세에서 멀어져 깊은 심신의 수양을 쌓는 데 있고, 화산의 도(道)는 속세와 가까이하여 협(俠)을 행함으로써 약자를 구원하는 덕(德)을 쌓는 데 있다. 무당의 도는 수도(修道)에 있고, 화산의 도는 정도(淨道)에 있다. 청명이 어려서부터 도호를 받아 수양하는 것은 그 때문이요, 자네가 여전히 속세의 이름으로 정진하고자 함도 그 때문이다. 무당의 태극검은 수양의 검이기에 처음부터 형(形)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화산의 매화검은 정협(淨俠)의 검이기에 형으로서 수단을 익히고 악을 멸하여 도를 구하려 한 것이다. 먼 옛날 정사대전에서 우리 정파가 패배의 기로에 섰을 때, 무당은 일찍이 산문을 걸어 잠갔으나 화산과 종남이 마지막까지 싸웠던 것은 바로 그런 기상 때문이네.”
이 말을 들은 영은성의 표정은 멍해져 있었는데 소요자가 얘기한 도가 문파 간 차이에 관해 설명한 것들이 묘하게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며칠 동안 거듭 고민했던 복잡한 것들의 핵심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책임, 부담, 분노, 피로 그리고 자격지심 등의 복잡한 심경이 여전히 붕 뜬 채로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어쩐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느끼고 있었다.
심안을 가진 소요자의 눈에도 영은성의 그런 심경의 변화가 어렴풋이 읽히고 있었다.
“내 제자인 청명이 나이가 어리나 일찍부터 시작한 오랜 수양으로 무공의 경지가 높은 것은 무당의 자랑이라 할 만하지만, 그저 조금 더 빨리 달렸을 뿐 멀리 달아난 것이 아니니 조급해 말게. 그러고 보니 주백자 사숙조께서 화산에서 자네를 본 다음, 무당에 와 내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는군.”
“네?”
영은성은 잠깐 멍해진 심경에 취해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며 되물었다.
“연화봉 정상에 피어 있을 매화나무는 찾을 길이 없었는데, 연화봉 그늘 깊숙한 심산 속에 초라한 매화나무 한 그루 서 있구나. 시들한 나뭇잎들만 떨어지고 또 썩어가는데, 그것을 거름 삼아 마침내 꽃봉오리 하나 탐스럽게 돋았으니 피어나면 참 아름답겠구나.”
“아…, 아아! ……으흐흑!”
영은성은 갑자기 장탄식을 지르더니 마침내 감정의 둑이 터져 나간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자신의 과오로 주저앉은 정파의 근간을 다시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던 주백자는 살아남은 문파의 소중한 재능들을 주목하였다.
소요자가 깊이 우러나오는 목소리로 읊은 것은 살아남은 육파일방 가운데 가장 세가 처참히 기울었던 화산파에게서 영은성이라는 어린 재능을 찾아내고 감격하여 남긴 시문(詩文)이었다.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영은성은 그 시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첫 구절은 무너진 화산파의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구절에서 얘기하는 초라한 매화나무란 바로 그의 스승인 묵허자와 그가 이끌던 화산파 은둔 조직 온화당을 일컫는 말이었다.
소요자는 무당산에 고고하게 솟은 소나무라면 그에 비해 스승인 묵허자는 화산 연화봉 그늘에서 햇볕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초라하게 자라난 매화나무인 것이다. 줄기는 제멋대로에 가지는 막무가내처럼 거칠게도 자라 보기에 아름답진 않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매화나무였다.
화산파의 맥을 잇기 위해 온화당의 일원이 된 사숙 및 사형제들이 있었고 그들의 도움을 거름 삼아 성장한 영은성이 꽃봉오리인 셈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선 영은성은 자신이 얼마나 배은망덕했고 또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한심한 모습을 보인 것인지 절실하게 깨달아 버렸다. 스승인 묵허자를 소요자와 비교하여 깎아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사형제들과 사숙의 수준을 초라하다고 모욕을 주었음에 진배없었다.
바로 그들이 그의 부모요, 스승일진대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는 짓을 저질렀으니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자신에게 어찌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털썩!
“엉엉엉-!”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는 엎드려 울음을 터뜨리는 영은성의 모습은 누가 보면 마치 소요자에게 사죄하는 것처럼 보일 법했다. 그러나 소요자는 자신과 영은성 사이로 얼굴도 모르는 화산파 장문인 묵허자의 뒷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장문진인의 존안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으나 어떤 기상을 품고 계신 지 느껴지는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