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제28장. 태극검(太極劍)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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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천맹을 이끄는 수장들에겐 별도의 전각과 그 안에 연무장을 만들어 놓았는데 창천단을 이끄는 구치상의 처소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에서 영은성은 구치상과 비무를 하면서 대응에 있어서 감각을 기르고 있었다.
영은성은 매화검법의 성취가 높은 편이었지만, 장문인 전승으로 전해지는 자하신공의 운용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할 과제가 있었다.
진도건과의 수련은 검법의 실전적 이해를 높이는 데 큰 작용을 했었지만, 그가 ‘기’를 다루는 이해는 높지 않았기에 사실상 영은성의 성장을 높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마교의 강적과 싸우기 위해선 검법과 더불어 뒷받침할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구치상은 화산파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하신공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최소한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이 필요한지에 대한 조언은 해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영은성의 모든 실험적 공세를 받아낼 만한 실력까지 갖춘 자였다.
카카캉!
도검이 맞부딪치는 금속성과 더불어 자색 기류가 무수히 많은 매화를 형성하면서 구치상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꽃잎 하나하나 검기화시키는 것만큼 절대 쉬이 볼 게 아니었지만, 구치상의 칠성도는 손쉽게 무력화시켰다.
“자하신공의 패도(覇道)가 고작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
구치상이 비아냥거리면서 묻자 영은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매화검법 매화만개.
자색 매화 꽃잎의 검기들이 사방을 매우면서 동시여 영은성의 검격이 종횡무진 휘몰아쳤다. 한층 더 강해진 검격과 검기는 금방이라도 구치상을 집어삼킬 듯 에워쌌다.
칠성도법 개양철화(開陽鐵花).
구치상은 실로 여유로웠다.
잠깐의 시간 동안 지척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칼이 눈부신 속도로 움직였다. 삽시간에 영은성의 검광들을 아우르며 도광이 펼쳐지니 겹겹의 꽃잎이 개화하듯 피어나 매화검기들을 모두 잡아먹었다.
“꽃이 만발해 봐야 몰아치는 바람 아래 일거에 쓸려나갈 뿐이다.”
구치상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촌평(寸評)했다.
영은성은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였다.
지난 시간 동안 구치상과의 비무 가운데 사흘 전부터는 그의 실력에 대한 조롱이 대부분이었다.
화경에 오른 구치상의 몸에 그의 검이 닿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절대고수를 상대하는 경험을 높여 주기 위해 상대를 해 주고 있다고는 하나 매일같이 이런 조롱을 들어가면서 하고 있으니, 마치 그의 사문인 화산파가 조롱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구치상은 사파에서도 이름 높은 칠성파 소속이었으니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마치 일부러 그를 가지고 놀기 위해 부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영은성은 날카로운 신경을 유지한 채 보법을 밟으며 구치상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칠성도법의 방어 초식인 개양철화는 이미 수차례 봐왔기 때문에 막힐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영은성은 자신의 움직임을 쫓아 움직이는 구치상의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흐압!”
영은성이 기합 일성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매화검법 매화분분(梅花紛紛).
마치 가지를 뻗치듯 검광이 뻗어 나가니 그 움직임이 매우 변칙적이다. 그 궤적을 따라 피어나는 매화의 검기는 그 형상이 선명하여 보기 아름다우나 닿는 것만으로도 피를 탐할 것이 분명했다.
“흥!”
코웃음 치는 소리에 영은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구치상은 몸도 틀지 않은 채 칼을 휘두르자 세 가닥 도기가 뿜어져 나갔다. 변칙적으로 뻗어 나가던 영은성의 검광이 도기에 막혀 여지없이 튕겨 나갔다.
영은성은 자신이 피워낸 매화꽃들이 구치상의 칼날에 가지치기 당하여 맥없이 떨어지는 걸 봐야만 했다.
허무하게 깨버리는 도광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그 뒤에 있어야 할 구치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영은성은 황망히 몸을 틀려고 하는데 눈앞이 번쩍했다.
땅!
도신의 배면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겼으니 그대로 눈동자의 초점이 풀려 버렸다.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영은성의 신형을 보면서 구치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칼등을 어깨에 걸친 채 한숨을 푹 쉬던 구치상은 연무장 구석에서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야율균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넨 범굉대사님과 할 일이 끝났는가?”
“오늘은?”
“잘 돼 가는가?”
“땡중이 골치 좀 썩고 있는 것 같은데?”
야율균은이 웃음을 흘리며 얘기했다.
“무슨 의미인가?”
“땡중 무공이 강하긴 한데, 그렇다고 마공의 마기를 완전히 억누르지 못하니까 당황스러워하네. 한 번 상대하고 나면 한 시진 이상은 운기조식을 해야 정화가 된다나? 확실히 흑풍명천마공이 대단하긴 하지.”
“그렇군.”
“재미없어 보이는데, 상대해 줄까? 저 고지식한 도사보다는 내가 나을 거 같은데.”
“재미로 하는 게 아니라 조언을 하기 위함이다.”
“가르치는 실력이 없어 보이네.”
“그럴지도. 정사 문파가 추구하는 무공의 결이 다르니 어쩌면 내가 버거운 요구를 하는 걸지도 모르지.”
“궁금하네. 뭘 가르치고 싶은지?”
“흐음.”
구치상은 왠지 놀림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야율균은의 물음에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연무장을 나가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야율균은은 매정한 구치상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쯧쯧.”
바닥에 엎어진 채 기절해 버린 영은성의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찼다. 볼썽사나운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딱하기도 해서 한 마디 해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누군가를 제대로 가르쳐 본 경험이 없었다.
“으으…….”
한 마디 해 줄까 고민해 보던 그녀는 신음과 함께 머리를 흔들었다.
영은성에게 필요한 게 뭔지 알 거 같으면서도 맞는지 의심스럽고, 또 주제넘은 짓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그녀도 연무장을 떠나버렸다.
두 사람이 모두 떠나자 연무장은 기절한 영은성만 남겨둔 채 썰렁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가 다시 깨어난 건 반 시진쯤 지났을 때였으니 제법 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번쩍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비추는 건 마룻바닥과 짓눌린 볼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이었다. 뒤통수로 얼얼한 통증이 남아 있는 것도 물론이었다.
“으…….”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던 영은성의 입가로 침이 쭉 늘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매로 입을 닦으면서 바닥에 앉은 그의 어깨가 기운 없이 축 늘어졌다.
“꼴사납구나.”
화경의 도객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환영하며 큰 기대를 품었던 것과 달리 그의 현실은 잔혹했다.
‘자하신공과 매화검법이 하나가 되어 흘러가야 한다.’
그의 매화검법을 받아내 본 구치상이 조언한 그 목표는 의식을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비무를 몇 번 치르고 난 후 이어진 구치상의 말은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하신공과 매화검법이 별로 어울리지 않는군.’
앞서 한 조언과 뒤에 한 평가가 서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매화검법과 자하신공의 전설은 화산파의 역사에도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것으로 두 가지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는 화산파의 제자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은성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매화검법의 초식은 자하신공이 더해지면서 더욱 강력해졌다고 생각했다. 검술 운용에서도 진도건과 숱한 대련으로 적재적소에 합당한 초식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하신공으로 발현되는 매화검기는 스스로 강해졌다고 자부하는 상징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가 듣고 있는 건 구치상의 조롱 섞인 말이었다.
그를 우습게 보는 말들이었으며 매화검법의 초식들을 평가절하하는 발언들이었다.
그의 편견을 깨고 한 방 먹여 주기 위해 초식의 배합을 고심하여 펼치기도 했었다. 십수논검을 하는 이유도 초식 운용의 수를 확장하도록 하는 것이니 그 의도가 아닐까 생각한 접근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똑같았다. 또 구치상이라는 큰 벽 앞에서 그가 고심한 수법들이 모두 통하지 않는 건 답답할 노릇이었다.
화경의 고수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질 법도 한데 가르침을 주겠다고 비무를 하자 해 놓고 조롱을 늘어놓는 구치상의 태도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볼 장 다 봤다며 내치는 것도 아니고 줄기차게 연무장으로 불러내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아!”
누가 들으면 깊은 한숨에 땅이 꺼지겠다고 말하리라.
영은성은 도포 자락으로 바닥에 고인 자신의 침을 닦아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휑해진 연무장으로 구치상이 다시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아서 나가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절시킨 것도 처음이지.’
질질 끌 듯 발걸음을 옮기며 연무장을 나선 영은성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창천단주의 집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그곳으로 갈 마음은 없었다.
그는 곧바로 전각을 나와 서산으로 점점 기울어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봄바람은 산뜻하기만 한데도 그의 마음은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 아래 진흙탕처럼 무겁고 혼란스럽기만 했다. 근처로 지나가는 창천단 무사들이 무심코 흘끔거리는 시선조차 마치 그를 비웃는 시선처럼 느껴졌다.
“하, 내 꼴이 우습군.”
생각이 그런 식으로밖에 미치지 않자 그의 얼굴에 자조 섞인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십수논검 다시 한다는데?”
“누구? 진도건?”
근처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창천단 무사들의 대화가 영은성의 귀에 들려왔다. 진도건이라는 이름에 귀가 쫑긋하긴 했으나 그가 깨어난 상황에서 십수논검을 진행해주었던 일을 기억하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 아마 여태까지 십수논검 했던 것 중에서 제일 볼 만할 거야.”
“누구랑 하는데?”
“무당파 청명도사.”
“오, 그 도사 실력이라면……. 에이, 안 돼. 자네도 봤잖은가? 그 진가의 칼솜씨가 예사가 아니라는 걸.”
“무당파의 태극검일세. 이 사람아.”
“단주님 말씀 못 들었는가? 검만으로 따진다면 맹 내 단연 최고라고.”
“아아, 그건 나도 들었지. 그런데 이번엔 정말 다를지도 모르네. 태극검선 소요자가 지금 맹에 온 거 알지? 이번에 논검을 위해 직접 제자를 봐주고 있다더라.”
“오오, 제자가 허무하게 깨지는 꼴 못 보겠다 이건가? 끌끌끌!”
지나가는 대화들은 어딜 가나 있는 법이고 상심이 가득한 영은성에겐 쇠귀에 경 읽는 일이었을 텐데.
어느새 무사들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을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뭐, 뭐야?”
“화산파 영은성?”
그의 조용한 발걸음이 등 뒤 가까이 다다르고 나서야 눈치챈 무사가 깜짝 놀라 할 때, 맞은 편에 있던 사내가 영은성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영은성이 쳐다보았다.
“진 대협과 청명도사가 뭐 한다고 하셨습니까?”
“십수논검 말이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진도건이 와서 하던 거 말이오.”
“청명도사가 소요자의 제자 아니요. 온종일 검술을 봐주고 있다 들었소이다. 그 도전이 심상치 않았는지 단주님도 이번 논검은 창무대에서 하겠다는데?”
“아아, 언제 한답니까?”
“내일?”
“……알려 줘서 고맙소.”
영은성은 그들에게서 물러나 발걸음을 돌렸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 경공을 펼치면서까지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이 마침내 멈춘 것은 소요자와 청명도사가 수련 중인 연무장이 있는 전각 앞이었다.
“어? 이봐!”
야율균은은 영은성을 발견하고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었을 법한데도 영은성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전각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야율균은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툭 건드렸다. 그제야 영은성이 그녀를 돌아보았는데 그 눈빛에서 뭔가 허무함이 엿보였다.
‘이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