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44화 (144/432)

144화 - 제28장. 태극검(太極劍) (2)

* * * *

성벽 위는 다른 곳보다 사방이 트여 있어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면 확실히 해방감이라는 게 있어서 기분이 풀렸다.

아래로 무수히 많은 전각과 길 위의 사람들이 있었고 성벽 너머 반대편에는 드넓게 펼쳐진 논들과 중간중간에 초가들이 심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성문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나 소, 돼지들을 끌고 다니는 목동도 보였고 새들도 떼 지어 날아왔다 떠나기도 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스한 봄이 시작되었다는 좋은 신호들이었다.

성벽 위에 쪼그려 앉아 있던 천서은의 머리카락이 선선한 바람에 휘날렸다. 비단결처럼 반짝이는 검은 머릿결과 쪽빛 옷자락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옆모습은 가까운 곳에 경비를 서던 병사는 임무를 망각하고 힐끔거리며 쳐다보게 만들 정도였다.

천서은은 오랫동안 감상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무슨 상념에 젖어있기에 그런 것인지 이따금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때로는 피식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힐끔 쳐다보던 병사는 심장이 쿵쿵 뛰면서 금방이라도 멎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거의 반 시진 가까이 그렇게 앉아 있던 천서은이 마침내 일어나자 병사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며 뻣뻣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수고하세요.”

천서은은 병사를 향해 미소로 격려하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의 미소와 함께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을 간신히 버텨내던 병사는 천서은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아주 잠깐 심장이 멎는 경험과 함께 비틀거렸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 영천성을 지키는 무림 창천맹의 맹주 천무경의 딸임을 잘 알았다.

“하아! 저런 아름다운 여인을 봐 버렸으니 이거 장가나 갈 수 있을까 모르겠구나. 눈만 높아져 가지고…….”

병사는 성벽 아래로 그녀가 창천맹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탄식과 함께 중얼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천서은은 어느새 창천맹의 관문과 전각들을 지나 맹주전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사람들이나 창천단 무사들도 모두 그녀를 알아보며 인사를 보냈고 그녀도 웃으며 받아주었다.

몰래 눈물을 훔치던 감상 젖은 모습은 뒤로 감춰두고 있었다.

하지만, 맹주전의 연무장에 들어서서 운기조식에 몰두하고 있는 진도건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다시 핑 돌았다.

한쪽 벽에 기대어 앉아 수염을 만지작거리던 천무경은 딸의 그런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깨어났을 때도 저랬지. 멍하니 있다가 눈물을 보이고는…….’

그때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동시에 깨어난 네 사람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진도건은 그런 의식에 갇힌 상황이 익숙해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먼저 챙겼다. 뭔가 생각이 많은 눈치였었는데, 범굉대사의 삼화취정 경지에 관해 이야기하자 소요자의 조언을 듣고 바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소요자는 진도건에게 내단 형성에 집중해야 한다며 조언을 주고는 진도건이 운기조식에 들어가자 혼자 중얼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듣기로는 연무장 하나를 빌려 바로 명상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천무경은 생경한 공간에서 장시간 치열한 싸움을 이어온 셈이었기에 피로한 얼굴이었지만, 아주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진도건의 상태에만 집중했다.

천서은은 다소 지친 표정으로 멍하니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었다. 진도건이 운기조식에 들어가자 천무경도 마침내 여유를 갖고 시선을 돌렸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었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또르르 눈물을 떨어뜨린 그녀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친 듯한 얼굴로 자리를 뛰쳐나갔었다.

천무경은 딸을 향해 손짓하며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천서은은 얌전한 몸짓으로 부친의 옆으로 다가가서 그처럼 벽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팔로 무릎을 끌어안으며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잘 되고 있나요?”

천서은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순조롭다. ……넌 어떠냐?”

“저요? 아버지께서 도건에게 집중하시는 덕분에 여유 있게 쉬고 있죠.”

“쉬면서 마음을 잘 추슬렀냐는 말이다.”

되묻는 천무경의 말에 천서은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혈마의 의식 속.

검은 구멍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마기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으며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사흘간의 시간 동안 천무경이 감내해야 했던 정신적인 피로는 엄청났다.

그가 이룬 경지란 상대적 정점이 아니라 절대적 정점에 가까운 수준인 데다가 본인 자신도 엄청난 상상력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진 강건한 무인이었기에 버틸 수 있었던 것이었다.

다만 그런 치열한 사투 속에서 혈마의 존재와 감정적 영향력을 명확히 느낀 천무경은 진도건이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생각을 하면 절로 고개를 젓게 만들 정도였다.

하물며 진도건에게 깊은 감정을 가진 천서은이라면 어땠을까?

그녀가 쉽게 눈물짓게 되면서 마음을 추스르기에 바빴던 건 진도건이 겪은 고통의 범주를 체감함에 비롯된 것일 터였다.

“……생각하면 서글퍼지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고 있는 데서 울진 않잖아요.”

“어제만 해도 보자마자 질질 짜더니 오늘은 확실히 나아 보이는구나.”

“질질 짜다니요?”

“후후후! 새삼 3년 전이 떠올라서 그렇다. 그때도 뭘 원망해야 할지도 모른 채 현실을 부정하면서 목놓아 울어대지 않았느냐? 같은 사람 때문에 또 우는데 그 이유도 그때와 밀접하게 닿아 있으니. 그때와 지금의 관계를 비교해 보면 이도 신기할 따름이니 세상일이란 게 참 예측하기 힘들어.”

발끈했던 천서은도 천무경의 넋두리에 그때 생각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3년 전의 슬픔은 이제 모두 덜어내었기에 웃어넘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진도건이 홀로 견뎌내야 하는 고통의 정체를 여실히 느끼게 되었으니 이 슬픔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아버지는 어떨 거 같아요? 도건이 혈마를 이길 수 있을까요? 저렇게 공존해야 하는 처지라면 언젠가는 또 위기를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사람은 하나지만, 속에 둘을 품고 있고. 이제는 둘이라 보기도 어렵게 하나에 근접한 수준이 되어 있으니 혼란스럽지. 그러나 들어보니 죽음의 위기에서 혈마가 좋은 쪽으로나 그렇지 않은 쪽으로나 역할을 했으니 이 정도면 공생(共生)의 관계에 있다 봐도 무방하지 않을 것 같구나. 다만 혈마의 의식이 더는 진도건의 혼백을 침범하기 어려운 수준이 됐으니 앞으로는 이와 같은 위기를 맞지 않도록 강해지기 위한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혈마를 없앨 수는 없을까요?”

“글쎄다. 마도 마공이라는 건 무림의 상식에서도 벗어난 것들이니 무언가 ‘특별한 조건’이 있다면 가능한 길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구나.”

“특별한 조건이라. 그게 뭘까요?”

“없을 수도 있고. 마교를 토벌하다 보면 길이 열릴 수도 있겠지.”

“흐음…….”

천서은은 깊이 호흡하면서 이 난해한 문제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때 연무장 안으로 큰 폭의 파동이 퍼져 나가며 두 사람을 일깨웠다.

파동의 진원지는 진도건이었으니 마침내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드러난 그의 홍안(紅眼)에 현묘한 기색이 빛나는 것이 범상치 않았다.

“후우……!”

진도건은 깊이 담아둔 호흡을 천천히 뱉어내며 복심과 폐를 비워내었다. 그리고 중단전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내단을 인지하였다.

파천혈마공 그리고 혈마단(血魔丹).

그것은 아주 예민하게 끓어오르면서 하단전에 축기된 내공과 함께 끊임없이 공명하고 있었다.

소요자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단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하단전에 축기된 내공을 상당 부분 비워내면서 중단전에 응집시켜야 했다. 비워낸 하단전은 다시 심법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상태에서, 기존에 쌓은 기운은 내단으로서 함께 존재하게 되는데 이 결과로 술자는 이전보다 배에 가까운 내공을 다룰 수 있게 되고 공력으로써 발휘할 시에 순도를 크게 높여 주게 된다.

같은 강기공이라도 예기나 강도, 파괴력 면에서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이유였다.

하지만, 진도건은 자신의 혈마단이 소요자가 설명한 내단과는 다른 성질을 품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삼단전은 하나가 되었으나 실제로 정기신(精氣神)이 머무는 위치가 하나가 되었다기보다는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니, 이 세 가지는 자연 상태로서 근본적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육신을 갖추고 인격을 유지하며 상상을 펼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자연 상태마저도 하나가 되면 이는 곧 등선, 성불하는 길이었다.

혈마단은 정이 머무는 중단전과는 같은 곳에 있으면서도 다른 곳에 있는 묘한 경계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진도건의 의식 속에 혈마의 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것과 같았다.

삼화취정의 경지에서 정기신과 오기(五氣)는 중단전에서 만나 조화를 이루는 법이다.

마치 상단전, 신의 경계에서 혈마의 의식이 잠재됨으로써 그 영향력으로 진도건의 외견 변화가 일어나 머리카락과 눈빛의 색이 변한 것처럼 중단전, 정의 경계에 놓인 혈마단은 새로운 파천혈마공의 기로(氣路)를 발동과 동시에 마치 오염시키듯 물들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하단전의 기운을 아주 조금씩 끌어올리면서 그 크기와 순도를 느릿하게 더하고 있었다.

내면으로 이를 바라보는 진도건의 심경은 싱숭생숭했다.

‘의식의 확장을 느끼고 강해졌다는 것도 느껴지는데, 혈마에게 좋은 일을 해 주는 게 아닌가 싶구나.’

일찍이 이 부분에 대해서 소요자가 말하길 ‘의문이 있긴 하지만, 정과 신은 한 몸이나 서로 다른 것인데 너의 선천진기가 대단히 뛰어나니 수양을 멈추지 않는다면 염려할 일은 아닌 것 같다.’라고 하였다.

진도건이 몸을 털고 일어나자 천가의 부녀도 같이 일어났다.

천서은은 즉각 달려가 진도건의 품에 꼬옥 안겼다.

진도건은 반사적으로 끌어안으면서도 천무경 앞인 상황이라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천서은이 고개를 들어 진도건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진도건이 붉은 눈으로 담아내면서 진심인 미소를 드러내었다.

“잘 마무리한 것 같아. 오랜만에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 보니까 기분도 좋아지고 말이야.”

배시시 웃는 천서은의 볼에 홍조가 떠올랐다.

두 사람의 모습에 천무경은 실소를 머금으면서 몸을 돌렸다.

“애비 앞에서 아주 서슴없이 안기는구나. 아주 상봉이 눈물겨워. 난 오랜만에 한나절 푹 자야겠구나. 좋은 시간 보내라. 섭섭한 아비는 가마.”

일부러 들으라는 듯 떠들어대며 나가는 천무경의 뒷모습을 보면서 진도건과 천서은이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천무경이 나가고 나서도 잠시 기척이 멀어지길 기다린 두 사람은 꼭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었다.

달콤한 감각이 짜릿하게 감정을 휘감는 것도 잠시.

꼬르륵.

진도건의 뱃속에서 울려 퍼지는 요란한 소리에 두 사람이 동시에 맞닿은 얼굴을 떼면서 화들짝 놀랐다.

천서은은 이내 까르르 웃었고, 진도건도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단술을 연성하면서 집중과 동시에 몸을 청결히 하느라고 물만 마시면서 식사는 계속 걸렀다. 사흘간의 의식 속 싸움과 지난 나흘의 수양, 자그마치 이레 동안 공복이었으니 꼬르륵 소리가 유난히 요란할 만했다.

천서은은 장난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면서 한 손으로 코를 막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진도건의 옷섶을 쥐며 잡아당겼다.

“으으! 냄새. 뜨거운 물에 묵은 때 좀 박박 밀고 옷도 새 걸로 좀 갈아입어야겠어요. 배고프더라도 좀 참았다가 그때 먹어요.”

진도건도 옷섶을 당겨 킁킁 냄새를 맡아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씻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혹시 입 냄새도 나지 않았을까 괜히 민망해졌다.

“하하, 그러네. 씻는 거부터 해야지.”

“어서 가요.”

진도건이 발을 떼기가 무섭게 천서은이 그의 등을 두 손으로 밀었다. 기분 좋게 밀려나면서 걸어 나가던 진도건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요?”

“등은 손이 안 닿는데 좀 씻겨 주겠어?”

천서은은 잠깐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겨보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앙큼하긴!”

퍽!

“윽!”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의 주먹이 진도건의 옆구리에 냅다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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