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제27장. 혜검(慧劍) (6)
혈마는 그동안 많은 부분에서 진도건과 동화가 일어나면서 자신의 색을 입히게 되었지만, 본질적인 자신의 마성은 유지한 채 조용히 잠들어 있던 상태였다.
진도건이 운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 강한 자극을 받으며 혈마는 다시 깨어났는데 그의 파천신공 운기를 느끼고 바로 마기를 일으켜 역주천을 발생시킴으로써 다시 진도건을 흔들어 버린 것이었다. 말 그대로 마성이라는 본능에 따른 공격이었고 그것으로 다시 지배권을 빼앗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곧 혈마는 자신이 의도한 것과 다른 상황이 펼쳐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새롭게 역주천의 흐름을 일으켜 백회에서 터뜨린 것은 주효했다. 놈은 삼단전이 연결된 기연이 있었기에 나도 그걸로 죽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거든. 그러나 그건 내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만들어냈어. 이미 천문이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저 백회를 뚫고 올라가 솟구친 기운은 진정한 의미의 천문을 건드렸고 그 결과가 바로 저 검은 구멍이다.”
소요자와 혈마의 시선이 검은 구멍에 닿았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천문이란 말도 틀린 것일지 모르지. 나의 의식이 존재하는 이유도 평범하지 않으나 결국 예상할 수 있는 건 진도건이 느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 다만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저기서 쏟아져 내려오는 마기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진도건은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지? 설마 네가 올려보낸 것인가?”
“내가 올려보냈다. 내 목적은 놈의 육신을 차지하고 정신을 말살시키는 일이니까.”
“말살. 저기에 뭔가가 있군.”
“아아! 있지, 있고말고. 또 다른 의식이 저 좁은 구멍으로 마기를 쏟아내는 것도 모자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거든.”
“또 다른 의식.”
“나와 닮은. 그러나 완전히 다른. 크크크! 그런데 진도건 저놈은 놀랍게도 그 의식을 막아 세우고 있단 말이야? 그걸 지켜보고 있으면 정말 대단해. 두 번에 걸쳐 나와 의식 속에서 다투지 않았다면 분명 소멸하고 말았을 텐데. 그러면 나도 구멍을 닫아 버리고 이 육신을 차지할 수 있을 거고. 아, 물론 천무경 저자 때문에 깨어나자마자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크크크큭!”
소요자는 멍하니 검은 구멍을 올려다보면서도 혈마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그리고 혈마의 말 속에서 짚어내야 할 부분을 찾아냈다.
“구멍을 닫을 수 있다면 네가 열쇠까지 들고 있는 셈 아닌가?”
“큭큭! 좋아, 좋아! 늙은 도사가 맥을 짚는 데도 도사였구만. 일단 저 위로 올라가 볼까?”
혈마가 한 손을 들어 중지와 엄지를 붙였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갑자기 발밑을 받치는 단단함이라는 느낌의 의식이 사라지고 점점 빨려들 듯 파묻히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소요자의 모습을 보며 웃긴다는 듯 혈마가 키득대었다.
“킥킥킥! 꼴사납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보라고. 죽이진 않을 테니까.”
의식을 집중하는데도 발밑에는 어떤 단단한 감각도 잡히지 않았다. 혈마의 의지가 더욱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 고인 핏물이 점점 높이 차올라 어느새 가슴 부근까지 높아져 있었다.
‘무당의 제자가 마를 믿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다니……!’
시선을 돌려 천무경 쪽을 보니 그들은 여전히 정상적인 위치에서 싸우고 있었다. 오로지 그와 혈마만이 지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어느새 핏물은 턱밑까지 차올랐고 눈 깜빡하는 순간 머리끝까지 파묻혔다. 잠깐의 괴로움이 느껴지면서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떼는 순간, 소요자는 온몸을 덮었던 핏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발밑에 고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섬뜩한 실감을 뒤로 한 채 발밑을 받치는 단단한 감각은 그를 안도하게 하고 있었다.
지면은 예의 핏물로 가득 고여 있었지만, 하늘에도 가득 차 있던 붉은 피는 사라지고 까마득한 어둠만이 자리 잡았다.
소요자는 혈마의 말대로 혈천 위에 올라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너무나 명확한 두 존재감을 향해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바라보았다.
“보이느냐?”
혈마의 물음에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지면을 따라 시선을 쫓으니 소용돌이치는 검은 구멍이 보였고 그 바로 옆에서 두 인형이 검을 다투고 있었다.
한 사람은 혈마와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던 진도건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오로지 칠흑의 일렁이는 신체를 가지고 있어서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 칠흑의 인형으로부터 소요자는 혈마와는 다른 끔찍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혈마로부터 느껴지는 섬뜩함은 그의 살욕, 식욕, 투욕에 관한 것이었다. 죽음과 투쟁, 생존의 본능에 국한된 처절한 본능이 집약되어 나오는 섬뜩한 느낌인 것이다.
‘으음…! 저건…… 끔찍하다는 말 이외에 설명하고 형용할 수 있는 말이 없구나.’
존재감은 끔찍하도록 명료한데 그 성질을 설명하기에는 워낙 복잡하고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무너질 것만 같은 아찔한 기분이 느껴졌다.
“사념만으로 존재했던 내가 마성을 갖출 수 있었던 건 진도건 저놈의 의식을 먹고 태어났기 때문이지. 그래서 정신이 무너지는 게 아니면 내가 이 공간 안에서 물리적으로 해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저놈은 잘 알고 있지. 그런데 싸우는 걸 유심히 봐라.”
칠흑의 존재와 싸우는 진도건은 이미 몸에 많은 상처를 안고 싸우고 있었다. 혈마의 의식 속이었고 그가 힘을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와는 다르게 오로지 평범한 기운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로지 의식의 단단함만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것인데 혈마에게 겪었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으로는 상당한 피로를 나타내고 있었다.
“저놈이 천무경이나 그 딸년 수준에 이르는 운기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면 양상이 좀 달랐겠지만, 지금의 인지력으로는 너무 평범해서 검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저 존재의 힘을 온전히 막아낼 수는 없어. 이대로 시간이 며칠 더 흐르면 결국 무너지고야 말겠지만, 저걸 보고 있으니 나도 생각이 드는 거지. 정말 내가 저 구멍을 닫고 저 의식체까지 없애든 먹어치우든 할 수 있을까?”
소요자가 혈마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엔 꺼림칙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저것이 나처럼 마성을 갖추고 있는 존재일까? 저 구멍이 너무 작아 그 의식까지 표면에 떠오르진 않은 상태로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저만한 힘이라면 역으로 나까지 먹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아래로는 천무경을 짓누르고 위로는 진도건을 해치우고 나면 그다음은 나일 테니까. 저것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할지 모른다고 가정한다면 위험하다는 판단이 드는 것이지.”
혈마는 짜증 섞인 표정까지 내보였다.
“짜증이 난다고! 육시랄. 쇠약해진 명마의 마성을 먹어치웠어도 내 힘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야. 결국은 저 존재를 물리치고 구멍을 닫은 다음에 뭔 지랄을 할지 모르는 네놈들을 쫓아내는 것만이 내게 남은 최선의 수일 줄이야. 짜증이 어찌 안 나겠느냐?”
“그럼 진도건과 합세하여 저걸 물리치면 되는가?”
“그래. 하지만, 평범한 거로는 안 돼. 아까 내가 거두라고 했던 것. 그 이상의 것까지 보여야 할 거야.”
“내게 상청검을 펼칠 능력은…….”
“이 공간이라면 찰나만이라도 가능할 텐데?”
의식의 공간.
이만큼 육신의 제약도 없이 의식을 확장해나감으로써 깨달음의 실현을 시도해 볼 만한 좋은 공간도 없다.
잠시 망설이고 있던 때에 문득 머릿속으로 범굉대사의 염송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걸 생문 삼아 탈출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혼신을 다해야 하는 상황이 오다니……!’
소요자는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도가의 제자로서 혈마에게 목숨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 우스운 상황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이 분명했다.
“해 보지.”
“클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더한 존재로부터 그 경지를 엿보지 않았더냐?”
소요자가 흠칫 놀라 혈마를 쳐다보았다. 그의 의식 속에 있으니 주백자와 만나 전수받던 기억들이 희미하게 흘러나가는 것이었다.
혈마가 씩 웃었다.
“네 능력이라면 열쇠의 자격이 있다. 가라! 진도건이나 밑에 인간들에겐 내가 뜻을 전달하겠다.”
소요자의 눈앞에서 혈마의 존재가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의식으로서 실체화하지 않고 이 공간 자체로 동화하려는 것이었다.
홀로 남은 소요자는 진도건과 다투는 칠흑의 존재로 시선을 집중했다.
“원시천존이시여! 태상도군(太上道君)이시여! 태상노군(太上老君)이시여! 이 부족한 소도(小道)를 바른길로 인도하소서!”
삼청의 신격을 부르짖으며 소요자의 신형이 칠흑의 인격체를 향해 날아갔다. 어느새 오른손에 쥔 태청검의 광휘가 꼬리를 무니, 마치 어둠을 향해 돌진하는 혜성처럼 보였다.
혈마로부터 뜻을 공유받은 진도건도 소요자의 존재를 느꼈다.
“흐압!”
그가 혼신을 다해 검광을 부챗살처럼 펼쳐내며 칠흑의 존재 손발을 묶었다.
그 순간 소요자의 태청검이 칠흑의 존재를 뒤에서부터 내리 갈라 버렸다.
키아아아아!
소름 끼치는 괴성과 함께 검은 기류가 일렁였다.
태청검의 일격에도 사라지지 않은 그 존재는 일시 존재 영역을 넓혀가며 삽시간에 진도건과 소요자를 집어삼켰다.
사위를 뒤덮는 그 끔찍한 마기 속에서 진도건은 눈앞에 검을 바로 세운다.
부동심.
원류검결 또한 주백자와 조강선이 함께 세운 무당의 일맥이라.
“흐아아아!”
마침내 결의를 분출시키는 소요자와 진도건의 부동심, 부동의(不動義)가 공명하니 깨달음이 부족한들 어떠하랴. 이미 그들의 의식이 하나가 되어 주백자에 이르고, 조강선에 이르렀으니.
태극혜검 상청검.
마침내 파사제마(破邪制魔)의 십자백광(十字白光)이 어둠을 뚫고 사위를 덮었다.
* * * *
똑, 똑, 똑……!
“구경열반(究竟涅槃)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범굉대사는 눈을 감고 목탁을 두드리며 반야심경을 벌써 108번째에 이르기까지 외우고 있었고 이제 그 막바지에 점점 다다르고 있었다. 승포가 땀에 젖을 정도였고 입술은 말라붙었다가 갈라져 피 맛이 배어 나올 정도로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기약 없는 시간 속에서 철저하게 부동심을 유지하며 염송하던 범굉대사는 무엇에 이끌렸는지 자신도 모르게 모든 걸 멈추고 힘겹게 눈을 떴다.
“오오……!”
그동안 아무런 변화도 감지하지 못했었던 범굉대사의 눈가에 눈물과 함께 감격의 표정이 떠올랐다.
차례대로 소요자, 진도건, 천무경, 천서은 이상의 네 사람을 중심으로 신묘한 느낌의 바람이 맴도는 듯하더니 그들에게서 동시다발적으로 알 수 없는 잿빛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러다 아주 찰나의 일순간에 진도건의 육신으로 눈부신 광휘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일렁이던 잿빛 기운은 그 광휘에 일거에 사멸하고 진도건의 머리 위로 피처럼 붉디붉은 세 개 꽃잎의 형상이 떠올랐다.
꽃잎 색의 진원이야 그것에 기인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믿을 수 없는 현상은 그대로 범굉대사의 눈에 비춰 줬으니 경이롭지 않을 수 없었다.
“삼화취정(三花聚頂)이로구나!”
나직이 감탄을 늘어놓는 사이, 마침내 네 사람이 동시에 의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범굉대사는 부르튼 입술에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을 합장하면서 안도하는 마음으로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