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제27장. 혜검(慧劍) (5)
소요자가 범굉의 두 손을 꼭 쥐며 당부했다.
“소승 성심을 다하여 염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범굉대사는 소요자의 진심에 감격하여 진지해진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서은은 천무경의 등에 손을 대려다 잠시 멈추고 소요자를 보았다.
“모두 잘 풀리겠죠?”
지금의 상황은 이후를 예견할 수 있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소요자에게 신뢰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숙조가 계셨다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지금은 서장이나 신강 쪽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 오는 건 불가능하지요. 빈도의 능력은 그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니 확답은 못 합니다.”
천서은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오를 때, 소요자는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모두 무사할 수 있도록 빈도의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부족함이 없도록 할 것이니 우리 서로를 믿어봅시다.”
“……알겠습니다.”
범굉대사는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승포를 정돈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목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똑… 똑… 똑똑똑…….
“마하반야바라밀다(摩訶般若波羅蜜多)…….”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염송 소리가 울림을 가진 채 들려오기 시작하자 천서은은 천무경의 등에 조심스럽게 두 손의 장심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내력을 흘려보내면서 머릿속에서 잡념을 지우기 시작했다.
소요자는 다소 긴장된 얼굴로 진도건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잠시 호흡을 고른 후에 반야심경의 염송을 잠시 머릿속에 담았다. 그리고 힘없이 무릎 위에 올려진 진도건의 두 손을 맞잡으면서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천문(天門)이 열렸다. 사숙조께서 내게 선술을 조금이나마 가르치셨던 것은 이때를 위함인가? 제가 과연 잘할 수 있겠습니까? ……원시천존이시여! 제자, 피하지 않겠나이다!’
주백자는 이것을 가리켜 선술(仙術)이라 하였다.
하단전에 축기하는 행위는 인간의 소유욕에 따라 자연의 기운을 인간의 성정과 작위적인 노력으로 변질시키는 것.
하지만, 의식을 이런 욕심에 집중하지 않고 자연을 향해 개화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육신의 껍질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무위(無爲)하고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선경(仙境)에 머물 수 있다고 하였다.
무위하면 기꺼이 동화(同化)되리라.
소요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 바다 위로 의식의 배를 띄운다. 의지로 밀어붙여 배를 천서은에게까지 인도하니 있는 듯 없는 듯 포근하게 끌어안아 배에 동승시켰다. 그리고 조용히 귓전으로 들려오는 불문의 염(念)은 생문을 여는 등대 삼아 조용히 바다의 물결 위로 배를 맡겼다.
물길 속에서 배는 잔잔하게 흘러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유영한다.
소요자와 천서은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불길한 느낌이 점점 선체를 타고 그들을 엄습해 오고 있음을.
탐욕과 적의가 가득 찬 불가사의한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 * * *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그곳은 피에 가라앉은 땅이었다.
그곳은 피로 뒤덮인 하늘이었다.
천지가 온통 피로 물들고 눈앞은 어둠으로 가득한 영역이었다.
피부를 찌르는 듯 파고 들어오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욕(殺慾), 식욕(食慾), 투욕(鬪慾)을 느꼈다.
적어도 소요자가 느끼기엔 그러했다.
“허억!”
가느다란 비명에 돌아보니 천서은이 혼란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을 일그러진 얼굴에 한껏 나타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요자가 급히 그녀의 어깨를 짚자 새하얀 광휘가 두 사람을 감쌌다. 그러자 비로소 천서은도 그런 고통에서 해방되면서 떨림을 멈추었다.
“하아, 하아……! 이게 대체 뭐죠?”
“어쩌면 진도건의 의식 또는 혈마의 의식 속일 수 있겠습니다.”
천서은은 그 끔찍한 느낌들에 다시 한번 몸서리쳤다.
이것이 진도건의 의식 속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보다 본능적인 감정이 송곳처럼 파고 들어오는 것으로 봐서 혈마의 의식이 아닐까 짐작했다.
“심호흡하고 의식을 여세요. 하던 데로 파천신공을 운기해도 좋고. 본인의 의식이 단단하게 잡혀 있어야 혈마의 의식에 침습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서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식을 집중하며 운기했다. 하단전에서 폭발적으로 뻗어 나가야 할 내공은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충만하게 채워지는 느낌이 들면서 조금 전까지 느꼈던 두려운 감정들이 대부분 해소되었다.
소요자가 손을 치우자 광휘는 사라지면서 다시금 그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충분히 떨쳐낼 수 있는 심적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의식을 분명히 하고 의지를 다지면 이런 영역 속에서 존재를 명료하게 다질 수 있습니다. 정신을 절대로 놓지 마세요.”
소요자의 말에 천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대답 대신 다른 걱정에 찬 말을 꺼냈다.
“범굉대사님의 염송이 들리지 않아요.”
생문이라 하였기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요자는 차분히 그녀를 다독였다.
“제 머릿속엔 들려오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서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발을 들었다 뗄 때마다 바닥에 고인 선명한 핏물이 끈적거리도록 달라붙어 댔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핏물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이제 어디로 가죠?”
“따라오십시오.”
소요자가 걸음을 떼자 천서은이 그 뒤를 따라갔다.
소요자는 분명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는지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 게 끝도 없이 이어질 거 같던 어둠 속에서 흐릿한 잔상과 함께 희미한 소음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게 뭐죠?”
“심상치 않군요.”
자그맣게 들려오는 굉음과 희미한 잔상들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좀 더 분명해졌다. 그리고 소음의 주인이 누군지 식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츄아악!
하늘에서, 땅에서 핏물이 쏟아지고 솟구치더니 수백 개의 송곳이 되어 두 사람에게 쏟아졌다. 천서은이 당황하여 멈칫거릴 때, 소요자가 앞으로 나서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손안에 새하얀 빛무리로 이뤄진 검이 나타났다.
태극혜검 태청검.
소요자가 휘두르는 태청검을 따라 새하얀 광휘의 파도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혈기가 그 광휘에 밀려 닿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두려워하지 말고 심지를 바로 세우시기 바랍니다. 이런 의식 속에서는 오로지 그것만이 자기 존재를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소요자의 일격이 효과적이었던 것일까, 더는 위협적으로 날아오는 것들은 없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걱정 어린 마음으로 소요자의 뒤를 따라가던 천서은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다시 한번 매우 놀랐다.
어둠을 밝히는 푸른 벼락과 소용돌이치는 검붉은 폭풍우가 맹렬하게 다투고 있었는데 그 속에 선 남자는 그녀가 찾던 사람 중 하나였다.
“아버지!”
그녀의 목소리가 닿지 않은 것일까?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일까?
천무경은 뒤돌아보지 않고 연신 파천신공의 공력을 쏟아내면서 폭풍우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반면 소요자의 시선은 다른 것을 먼저 쫓았다.
미증유의 격돌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 속에서 천무경이 다투고 있는 장소의 머리 위.
피로 물든 하늘 속에서 유달리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검은 구멍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검은 기운들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걸 천무경이 공력으로 태워 버리는 중이었다. 그 기세가 너무나 맹렬하고 위태로워 보였는데 천무경이기에 버티고 서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요자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천서은의 팔을 붙잡았다.
“저 구멍이 뚫려 버린 백회혈인 것 같습니다. 파천신공은 겁화멸마의 공능이 있으니 천 맹주가 역할을 하는 듯합니다. 천소저가 함께 도우십시오. 그동안 제가 수를 내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겠지만, 결국 어떻게 의식하느냐에 따라 달린 일입니다. 의지가 명료하면 마치 현실에서 무공을 발휘하듯 싸울 수도 있는 일이고 깨달음이 깊은 자라면 더한 능력도 구사할 수 있는 것이 의식의 공간입니다. 타인의 의식 속이고 닫힌 공간이라 하나 그 본질은 동등하게 적용되는 법입니다. 소저는 재능과 의지를 두루 갖추고 있으니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천서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신을 집중하였다. 오래 걸리지 않아 정말로 그녀는 진기를 뿜어낼 수 있게 되었고 이내 천무경의 곁으로 달려갔다. 천무경도 그제야 천서은을 알아보았는데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놀라면서도 쏟아지는 마기를 태우기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계속 공력을 퍼부었다.
소요자는 천서은을 보내 놓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진도건의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심안으로 둘러봐도 지면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존재감에 당황한 소요자는 자꾸 마기가 쏟아지는 불길한 검은 구멍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검은 구멍 중심에서 한 사람의 존재가 느껴졌다.
“저기에 있구나……!”
처음엔 심안으로 보지 않았기에 미처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었던 것을 깨달은 소요자는 다시 난관에 부딪혔다. 저 위로 올라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위를 올려다보는데 까마득하여 도약으로 닿을 높이가 아니었다.
‘허공답보를 펼친다고 생각해야 하나…….’
소요자는 태극신공의 심결에 집중하면서 기운을 끌어모았다. 무언가라도 시도해 보지 않으면 이 사태를 끝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거기까지.”
섬뜩한 목소리에 소요자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진도건이 서 있었는데 느낌이 달랐다.
적발적안의 모습인 건 매한가지였지만, 목소리부터 존재감까지 이 혈천지를 이루는 섬뜩한 느낌들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본능적으로 태청검을 꺼내 들자 진도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검지로 그것을 가리켰다.
“그거 싫으니까 날 향해 겨누지 마라, 도사.”
“당신은 진도건이 아니군.”
“난 혈마다. 그것 좀 치워줄래?”
소요자는 혈마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용의가 없었다. 그가 무슨 의도를 갖고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널 저 위로 올려주고 의식 밖으로 나가는 걸 도와줄 테니 치워라. 좀.”
혈마가 다시 한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하자 소요자는 태청검을 거두었다.
“저 위로 올려준다고?”
“그래, 여긴 진도건의 의식이 아니라 내 의식 속이니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소요자는 여전히 그가 의심스러웠으나 태청검은 손에서 거두었다.
이곳이 진도건이 아니라 혈마의 의식 속이라면 이 사태를 마감할 중요한 실마리는 그의 손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었다.
혈마는 그제야 찌푸렸던 인상을 풀었다.
“너, 능력 있는 도사구나.”
혈마는 나름의 진정성 있는 말로 소요자를 평가하면서 팔짱을 끼고 천무경과 천서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쳇! 겁화멸마 파천자(破天子)가 둘씩이나 들어올 줄이야. 다 내 힘이 약해진 탓이지. 천무경 저자는 날 죽일 뻔한 놈인데 딸년도 힘이 꽤 지랄 맞아. 이젠 밀리는 기색도 곧 사라지겠어.”
“당신은 이 상황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고 있겠군.”
“통찰력 있는 도사로군.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진도건과 나의 상황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저 검은 구멍은 나도 추정만 할 뿐이야. 뭐 이렇게 된 거 너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고 나갈 방법을 알려 주마. 그래야 나도 더 기회를 노린다고 헛수고할 필요 없이 내 마성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
“널 어떻게 믿지?”
“풉! 아니, 넌 날 믿어야 해. 나는 일종의 자물쇠. 열쇠는 너지만, 그 방법을 알려 주는 건 내 의지에 달린 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갈 방법은 너의 목숨을 이곳에서 산화시키는 길밖에 없어.”
“자물쇠, 열쇠?”
“그럼 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나갈 방법을 알려 주지. 너 방금 그 빛의 검. 그 이상의 것도 시도해 볼 수 있지?”
“뭐?”
“그건 깨달음이 동반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지혜의 경지. 거기까지 닿았다면 다음은 심혼(心魂)의 검일 터. 그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네가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겠지만, 딱히 방도가 없으니 시도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소요자는 혈마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가 얘기하는 것은 바로 ‘태극혜검 두 번째, 상청검’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주백자 사숙조께서는 역시 이런 상황에서도 저들을 꺼내 가는 건 일도 아니겠구나. 하지만 나는…….’
소요자는 혈마의 말을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얘기해 봐라.”
혈마가 씩 웃었다.
“크크!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