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40화 (140/432)

140화 - 제27장. 혜검(慧劍) (4)

소요자는 바쁜 걸음으로 서둘러 왔지만, 그래도 제자의 얼굴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피로가 극심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냐?”

“아, 그…… 자리를 떠나기엔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흐음.”

소요자는 맹주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편치 않구나.”

“예?”

청명이 되물었으나 소요자는 말을 더하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바람처럼 맹주전을 향해 날아갔다.

피로감으로 정신이 둔해져 있긴 했었지만, 조금 전 소요자의 시선과 목소리에 담긴 근심으로 인해 그가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소요자는 이번 맹주전의 소란에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청명의 짐작대로 소요자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분명 거기에 있었다.

맹주전의 문이 벌컥 열리자 안에 있던 범굉대사와 천서은이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천서은은 처음 본 노도사였지만, 범굉대사는 일찍이 면식이 있었기에 그를 반기면서도 뜻밖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아미타불! 소요자께서 어떻게 예까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원시천존. 범굉대사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소요자라는 말에 천서은이 깜짝 놀랐다. 맹주전으로 급히 쫓아 들어오는 청명의 등장이 그 신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천서은이 소요자께 인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소요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서은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보이진 않았지만, 바깥으로 맹주전을 둘러싼 창천단의 기척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복도 끝 연무장에 닿았다.

“이 사단의 원인이 저곳에 있지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소요자가 발을 떼자마자 천서은이 앞을 가로막았다.

“……어떻게 알고 오신 거죠?”

오른손이 허리춤의 숙녀검에 옮겨갔듯이 그녀의 목소리엔 경계심이 가득했다.

가끔 안을 들여다보면서 파악한 바로는 천무경과 진도건은 여전히 처음 봤을 때 그대로였다. 천무경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진도건의 기혈을 다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인데 정파의 고수가 느닷없이 나타나 들어가겠다고 하니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청명은 난감한 상황에 급히 소요자 옆으로 다가왔다.

“처, 천 소저. 스승님은 분명 도우러 오셨을 겁니다.”

“소식이 바깥으로 새어나감이 없도록 지시하였는데 무당산에 있으셔야 할 분이 왜 여기에 나타나셨지? ……아니면 네가 소식을 전했니?”

천서은의 싸늘한 시선이 꽂히자 청명은 크게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대꾸할 방법도 없었을뿐더러 사제가 동시에 의심을 받는 상황이 되자 해명을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았다.

“천 소저. 일단 소요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다.”

범굉대사는 소요자라는 정파의 상징적인 인물이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된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사흘간 천서은이 얼마나 걱정 어린 마음으로 자리를 지켜왔는지 봐왔기 때문에 그녀의 반응을 이해하고 있었다.

“소요자께서는 말씀해 주시겠소이까? 천 소저가 얘기했듯이 본맹은 이 일에 함구령을 내린 바 있습니다.”

소요자는 가만히 연무장 쪽을 바라보다가 천서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이 닿아있는 왼쪽 허리춤 검을 흘끔 보았다.

“얘기하기 전에 먼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지금 저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소요자의 물음에 천서은은 잠깐 혼란스러웠다.

청명이 소식을 전해서 왔을 거로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나올 질문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지 의심을 하면서도 일단 대답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제 아버지이신 맹주님과 진도건이 함께 있습니다.”

“진도건? 그게 누구지?”

소요자가 궁금증을 보이자 그녀의 얼굴에 다시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정말 모르는지 소요자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청명을 쳐다보았다. 스승의 시선을 받은 청명은 일순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고민했는데 그건 천서은이나 범굉대사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다.

“화산혈마사의 주인공.”

그때였다.

맹주전으로 부맹주 홍두형이 소요자의 물음에 응답하듯 말하며 들어왔다. 창천맹으로 소요자가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쫓아 들어온 것이었다.

“……아아.”

홍두형의 말에 소요자가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그는 인상을 쓰며 뭔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는가?”

“왜 진도건…… 그자가 여기에 있는지 빈도가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군요. 일단 설명하기엔 길어질 것 같고, 들어가려면…… 맹주의 여식께서 허락하셔야 할 것 같은데. 손을 내밀어 보겠습니까?”

소요자가 천서은을 보며 물었다.

천서은은 잠시 홍두형과 범굉대사를 번갈아 보았다가 조심스럽게 왼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검에 가져간 채였다.

소요자는 천서은의 손을 잡으면서 연무장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제 기운을 빌어 일시적으로 선안(禪眼)을 개안시킬 것이니 두 사람이 있는 곳을 보기 바랍니다.”

“그게 무슨……?”

천서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으려다가 손을 통해 들어오는 맑고 정순한 기운에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것은 내력과는 달라서 그녀의 내력에 의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거침없이 들어와 머리로까지 솟구쳤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밝아지는 걸 느꼈다.

바로 눈앞에 있던 범굉 대사에게서 웅혼한 기운이 그녀의 시각에 잡혔다. 붉은 듯 노란 듯한 주황빛의 기운이 피부를 타고 전신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여태껏 보지 못한 느낌의 인지 감각이라 어색하면서도 새롭게 느껴졌다.

“저곳을 보시오.”

소요자의 말에 천서은이 연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문 너머로 천무경과 진도건의 형상이 흐릿하게 보였는데 진도건에게서 비롯된 붉은 기운이 머리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기운을 따라 고개를 들자 천장 너머로 희미하게 구름 뜬 하늘이 보였는데 그 피처럼 붉은 기운이 닿은 하늘이 국부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보았습니까?”

그 혈기에 시선을 빼앗겼던 천서은은 소요자의 목소리에 놀라며 손을 떼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에 보였던 것들이 사라지며 천장의 서까래만이 보였다.

천서은은 당황하며 서둘러 맹주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맹주전 지붕 너머를 살폈을 때, 조금 전에 보았던 혈선은 보이지 않았다. 이를 착각이라 여기기엔 너무나 현실감이 짙었던 기억이라 그녀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소요자의 팔을 붙잡았다.

“방금 그게 뭐죠?”

“빈도는 주백자 사숙조(師叔祖)께서 사사하여 선안을 열어 평범하지 않은 걸 볼 수 있습니다. 무당산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다 우연히 북동쪽에서 솟구친 붉은 기운을 보았는데 제자들 누구도 보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무척 불길했지요. 다음날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으니 그 진원지를 찾아야만 했고 그곳이 영천성, 창천맹이라는 걸 인지하였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천 소저, 이제 빈도를 들여보내 주시겠습니까?”

차분하게 이어가는 소요자의 설득에 천서은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명이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선안으로 보았던 그 붉은 기운이었다.

역시 그것은 혈마의 기운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속에 하늘과 가까웠던 화산 연화봉에서 섬뜩한 혈기를 마구 뿌려대며 폭주하던 진도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쫓아오는 그 불안감은 천서은에게 더 망설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오세요.”

천서은은 앞장서서 연무장으로 걸어갔고 소요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라갔다.

연무장의 문이 열리면서 조금 전 문에 투영되어 보였던 천무경과 진도건의 모습 그대로 나타났다.

“지금도 있나요?”

소요자는 진중한 눈으로 진도건과 천무경을 바라보았다.

손을 대보지 않아도 선안을 통해 그들의 상태가 어떤지 살펴볼 수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있다는 겐가?”

홍두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나 소요자는 이 상황에 대해 고도로 집중하고 있었기에 거기에 대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죄송하지만, 범굉대사와 천 소저 외엔 모두 문을 닫고 나가주십시오.”

“으잉?”

소요자의 표정이 단호하자 홍두형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는 사람들을 다시 물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무장의 문을 닫고 나갔다.

천서은이 불안한 시선으로 소요자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요점만 설명할 테니 잘 듣기 바랍니다.”

“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진도건의 내력은 마교도들의 마기처럼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의 안에는 진기가 두 가지 흐름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는 천 맹주와 흐름이 같고 다른 하나는 그와 정반대되는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건 주화입마나 화산혈마사의 이야기처럼 폭주할 때나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추측됩니다. 특히 이렇게 백회혈을 뚫고 기운이 하늘에 닿을 정도면 보통은 뇌가 녹아내려 칠공(七空)으로 피를 쏟아내며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 그런……!”

“아미타불……!”

“물론 화산에서의 폭주와는 상황이 다를 겁니다. 이건 마치 어떤 중요한 지점의 매듭을 풀어낸 효과라서 연쇄적으로 나타난 결과인 것 같은데…… 어쨌든 놀랍게도 진도건 이 자는 삼단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단전은 축기를 하는 개념으로서 그릇의 크기라는 게 있으나 중단전과 상단전은 좀 다릅니다. 이를 설명하자면 길고…… 어쨌든 그 백회혈에서 폭주한 기운을 이 연결된 삼단전이 받아내는 바람에 다행히 사망에 이를 정도의 충격을 피한 모양입니다. 다만 천 맹주의 의식이 지금 진도건의 무의식으로 빨려 들어간 상태로 보입니다. 내력의 운용은 관성적인 현상일 뿐, 이 시간이 길어지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깨워야 하나요?”

“그냥 깨워선 안 됩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어, 어떻게 의식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전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천 소저는 천 맹주와 내공의 성질이 같으니 운기를 돕더라도 저항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천 맹주의 뒤로 가서 그의 등에 장심을 대고 운기를 도우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러고 있으면 빈도가 수를 낼 것입니다.”

천서은은 불안한 시선으로 소요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천무경의 뒤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소승은 무엇을 하면 됩니까?”

범굉대사가 소요자에게 물었다.

정파의 양대지주로 소림과 무당을 꼽지만, 주백자와 소요자의 존재는 소림을 한 단계 낮게 보이게 했다. 그런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던 범굉대사는 과연 소요자가 그에게 무엇을 부탁할지 궁금했다.

“불경(佛經)을 외워 주십시오.”

“불경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심을 다한 염송(念誦)은 저희에게 생문(生門)의 역할을 할 거로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차라리 청명 도사를 불러 도가의 경전을 외도록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가와 불문이 아무리 결이 다르다고는 하나 진리를 구하는 의미에서 대동소이합니다. 대사님의 수양이 깊어 교문(敎門) 내 따를 자가 몇 없을 텐데 어찌 수양이 일천한 제 제자와 비교하겠습니까? 사자후로 환진을 깬 경험까지 있으시니 청명을 놓고 비교하는 건 무례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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