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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39화 (139/432)

139화 - 제27장. 혜검(慧劍) (3)

“도건, 너의 무(武)는 무엇이냐?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 무엇이 너를 더 강하게 만들 것이며, 네 앞을 가로막았던 벽을 부술 수 있겠느냐?”

천무경이 다시 진도건에게 물었다.

“저는…….”

진도건은 입을 떼다 말고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펼쳐 낸 손바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안에 어떤 상상과 의지를 담아내야 할까 잠시 고민해 보았지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때 불현듯 손바닥의 피부를 타고 기억 속 익숙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바닥 위로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나,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검(劍).

찌르고 베기 위해 만들어진 철제 무기.

첨단까지 납작하고 곧게 뻗은 검신과 양쪽 어디로든 벨 수 있게 벼려진 양날.

가장 잘 다루는 것이기에 검으로 가능한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고, 또 거기에 진도건이라는 무사의 근간이 있다 할 수 있었다.

검객(劍客) 또는 검사(劍士).

무사(武士)라는 단어보다 그를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였다.

그것은 하나의 껍데기가 되어, 때로는 장벽이 되어 진도건이라는 무인을 둘러치고 있었다.

진도건이 고개를 들어 천무경을 바라보았다.

“저의 무는 ……검입니다. 저는 검을 들 때, 비로소 저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검이 저를 가로막는 한계고 벽입니다.”

천무경이 왼쪽으로 손을 뻗었다.

스르릉.

그의 손짓에 따라 허공섭물에 의해 검집에서 빠져나온 흑검 군자검이 허공을 유영하여 진도건 앞에 떠올랐다.

“만류귀종. 그 너머에도 결국엔 검이 있으리라. 잡아라.”

진도건을 향해 손잡이가 가도록 흑검이 허공에서 돌아갔다.

진도건은 손을 내밀어 검을 쥐고 팔을 펼쳐 그 검 끝을 허공을 향해 겨누었다. 무의식적인 동작 속에서 그의 머릿속은 고도로 집중하며 수많은 상념이 얽혀 들어가고 있었다.

“생사의 대결을 펼치듯 머릿속에서 상상을 그려라. 네가 상대해 본 가장 강한 적을 상정하고 너의 검이 어떤 힘을 발휘해야만 이길 수 있는지 떠올려 보아라. 생각, 의지, 본능…… 그런 것들이 결합하여 지금껏 싸워왔다면 그 흔적은 너의 신에 제대로 새겨져 있을 터이니. 눈을 감아라.”

천무경은 숙녀검을 띄워 천서은에게 보내었다. 그리고 손짓으로 그녀를 불러 진도건의 뒤를 가리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 등지고 돌아서서 반대 방향으로 검을 내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무경은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

무거운 흑검을 쥐고 앞으로 내민 채 서 있다는 것은 일종의 고행이었다. 피로와 통증은 수양이 얕은 자에겐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걸림돌이 되곤 하지만, 수양이 깊은 자에겐 목적의식을 명확하게 하여 집중력을 높여 주기도 하였다.

이미 천무경이 늘어놓은 이야기의 말미서부터 진도건은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는 정(靜)의 상태에 접어들었다.

고요하다.

‘최강의 적이라.’

적으로 싸웠던 가장 강한 적은 누가 있었을까?

기습으로 펼쳤던 혼신의 일격은 일월신마에게 적중당했지만, 그의 검력으로도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선사하기에 부족했었다. 그가 일으키는 강력한 역장의 기괴함은 필사의 일격을 불러내었지만, 결국 그의 손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흑풍신마 야율재의 소용돌이치는 마기는 그 위력이 지나치게 파괴적이어서 검신이 휘말리면 손쉽게 부러질 정도였다. 천서은이 먼저 상대하여 힘이 빠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의 흑체를 이룬 바람결 사이를 검으로 갈라냈던 그 일은 불가능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겪은 최강의 적은 천무경이었다.

직접 겨룬 것은 아니었지만, 천무경을 상대하는 혈마의 공포가 그의 기억과 감정에 녹아들어 있었다.

파천신공이 하단전의 기운을 전신으로 벼락처럼 뻗어 나가도록 하였듯이 천무경의 파천진기는 그의 전신에 잠재된 기운을 격렬하게 파괴하였었다. 조강선의 손에 의해 거의 모두 회복되었다고 하나 기혈 안에 새겨진 파괴의 상흔은 아직 은밀하게 남아 있었다.

고도의 집중.

그것으로 진도건은 다시 혈마를 마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처럼 혈마를 무의식 속에서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그 마성과 공명하듯 그 내면이 진도건에게로 투영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투명한 옷 한 꺼풀이 딱 맞게 지어져 그의 육신과 영혼을 동시에 품는 것과 같았다.

사투의 기억.

패배의 공포.

내력의 폭주.

파괴의 상흔.

화산에서 겪었던 최후의 기억은 마치 그의 것이 아닌 양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부유하다가 마침내 온전히 진도건과 하나가 되어갔다. 몽골 초원 어느 절벽 아래에서 혈마를 받아들였던 진도건은 마침내 과거의 동떨어진 기억까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일순 그의 진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하나로써 동작하는 삼단전속에서 파천신공과 파천신공이 부딪쳐 몸에 새겨진 상흔에 따라 새로운 진기의 흐름이 만들어졌다.

파천과 역파천.

거스르는 진기의 물결은 혈마의 마성을 자극하여 더욱 농밀하게 섞여 들어가니 마침내 색을 물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로 녹아들어 성질을 변화시켰다. 그 기운은 일거에 정기신 전체를 관통하니 마침내 신(神)에 동하여 신(身)에 깃들었다.

진도건에게 있어 검과 육신은 하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진도건은 자신의 기혈을 통하여 검과 피부를 타고 일렁이는 혈기(血氣)를 보았다. 그 기세는 겉보기에 너무나 약하여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팅!

그 순간 뒤에서부터 머리 위로 옥패 하나가 지나가며 시야에 잡혔다. 진도건이 깨어났음을 느끼고 천무경이 품에 있던 걸 던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의도대로 진도건은 본능적으로 옥패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슈칵-!

그것은 마치 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칼날과 같았다. 흑검에서부터 분출된 선명한 칼날의 궤적이 닿기도 전에 먼저 두 동강 나버린 옥패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 흔적을 쫓아 또다시 거대한 붉은 검기가 마치 화룡이 토염(吐炎)하듯 뿜어져 나갔다.

콰르릉!

반응하기 어려울 만큼 한순간에 일어난 현상. 천장과 석벽이 그 검격에 잘려 나가며 부산히 흩어지는 흙먼지 사이로 월광이 새어 들어왔다.

“너……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냐?”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천무경의 목소리에 진도건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며 천무경에게 대답하는 말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그, 그게…… 맹주님을 떠올렸습니다.”

천무경은 어안이 벙벙해져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천서은도 갑작스러운 일에 집중을 못 하고 바라보았다가 두 사람의 문답을 듣고 놀라 진도건을 쳐다보았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다 마침내 천무경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수선차를 함께 마시며 나누었던 우리의 대화는……. 하아! 내게 감정이 남아 있다면 지금 얘기하거라.”

그의 탄식에 진도건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요, 용서하십시오!”

천무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도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의 눈동자가 움찔하더니 조금씩 위로 향했다. 그리고 그 시선 끝으로 조금 전 소란이 일 때, 진도건의 머리 위로 나타났던 현상의 잔상을 쫓았다.

물론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눈동자만 돌려 천서은을 보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진도건에게 다가가 타박하기만 할 뿐 그가 보았던 걸 보지 못한 눈치였다.

‘화경에 이른 내 눈에만 보인 것인가?’

백회를 뚫고 솟구친 핏빛 기운이 천장이 잘려져 드러난 하늘에 닿았다. 그것은 보통의 진기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진도건의 백회에서 솟은 그 붉은 기운에 일시적으로 밤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였다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상단전이 열려 신이 하늘로 통한다는 말은 있지만, 그런 직접적인 현상이 관측되는 예는 없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피로 물든 하늘(血天)이라! 범상치 않은 징조로구나!’

그때였다.

“허억! 헉! 헉!”

진도건이 갑자기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도건, 왜 그래요?”

어느새 진도건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히고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가는데 겉보기에도 심상치 않았다. 천서은이 당황해할 때, 천무경이 어느새 진도건의 뒤로 나타나더니 장심을 그의 등에 대었다.

‘기혈이 날뛴다…! 서둘러 바로 잡지 않으면……. …아니, 이건?’

천무경은 손을 떼고는 진도건을 바로 가부좌를 틀게 하여 앉혔다. 그리고 등 뒤에 똑같이 앉아 두 손을 진도건의 등에 다시 대었다. 그리고 천서은을 바라보는데 그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넌 나가서 이곳을 폐쇄하라. 내가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라.”

“아버지……!”

천서은이 놀라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불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천무경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천서은은 어느 때보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맹주전 내원을 배회하고 있었다.

천무경의 말마따나 연무장 출입문을 닫아걸고 빗장을 내렸다. 진도건의 검격에 무너져 버린 벽도 두 부맹주와 창천단주, 함께 온 일행들을 불러서 급히 돌무더기를 쌓고 진흙을 발라 대충 가려 놓았다.

구치상은 창천단원들 일부를 돌려 맹주전 부근 일대를 촘촘히 경비하도록 조치하였다. 맹주전 안에는 부맹주들과 구치상이 번갈아 왕래하며 함께 호위를 보았지만, 천서은만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온몸으로 걱정을 표출하는 이유는 천무경과 진도건이 벌써 사흘째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미타불. 천 소저, 이런 때일수록 진정하며 마음을 추슬러야 합니다.”

“그게 쉽게 되질 않아요.”

범굉대사가 차분한 표정으로 불호를 외면서 천서은을 다독였다.

“천 맹주는 화경의 고수이며 입신의 경지에 이른 분입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본인의 딸이 믿지 못하고 있으면 후에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차분하게 기다리십시오.”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했단 말이에요.”

천서은의 반응이 꽤 날카로웠기에 범굉대사는 그녀 정도 되는 위인이 왜 이러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3년 동안의 고통을 겪어 본 후유증은 조급함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부친이 본인 입으로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였음에도 벌써 사흘째 감감무소식이라면 혹시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커지는 게 그녀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감정의 격동은 보통 생각하는 불안감의 수준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한편 맹주전 밖에서 주변을 경호하는 창천단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꽤 당황해하고 있었다. 특히 십수논검을 하기로 한 진도건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데다가 경호의 위치도 하필 맹주전이니 사안이 가볍지 않음을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정무전에서 맹주전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청명도 겉으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적잖은 걱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천서은이 맹주전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는 소식에 경호를 자청하여 창천단원 중 유일하게 혼자만 이틀 밤을 꼬박 새워 지금까지 경호하고 있었다.

내공이 깊어 지금까지 버틸 수는 있었지만, 정신이 조금 몽롱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를 가지고 눈을 비비면서 힘겹게 앞을 살피던 그의 시선에 누군가의 모습이 들어왔다.

‘헛것이 보이는군.’

멀리 있는 사람을 발견한 터라 청명은 피곤해서 착각한 것이라 치부하며 옷소매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눈에 꾸욱 압력을 가하면서 눈알을 굴려 피로를 날려내고는 다시 팔을 치우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어느새 많은 거리를 좁혀 놓은 상태였다.

청명은 그 사람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는 걸 뒤늦게 인지하면서 솜털이 쭈뼛 서며 절로 긴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그 사람이 청유(淸幽)한 분위기의 인상을 준 노인임을 인식하고 그 복색이 자신이 주로 입던 도포와 같다는 것까지 차례로 인지하였을 무렵엔 어느새 청명의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청명아.”

청명은 이제야 눈앞의 노도사를 알아보고 깜짝 놀라 깊이 허리를 숙였다.

“스, 스승님께서 예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서둘러 예의를 갖추는 청명 앞에 나타난 노도사는 바로 무당제일검이자 태극검선이라 칭송받는 화경의 절대 고수, 소요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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