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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38화 (138/432)

138화 - 제27장. 혜검(慧劍) (2)

그것은 마치 사막에 단비가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점점 메말라 가는 가슴에 끝나지 않을 것처럼 퍼붓는 비는 모래의 날카로움을 죽이는 대신 진흙의 부드러움을 안겨 줬다.

그 단비는 생각보다 많이 내렸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오로지 아직 물기에 적셔진 진흙의 토대 위에 한 송이 피어오른 꽃 한 송이를 지켰으면 하는 게 그의 작은 소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눈앞의 사내가 그 꽃을 양지바른 좋은 토대에 옮겨 심어서 잘 가꿔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네 스승인 조강선의 이야기는 알면 알수록 공감이 가더구나. 그의 처지에서 공동으로 가르치던 제자를 자신의 손으로 끝내는 고통이 겪었으니 너를 아끼는 마음이 얼마나 컸겠느냐? 나에게서 널 지켜내고 기어코 이렇게 살려냈으니 그 마음은 내가 쫓을 길이 없다. 나는 무공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마음이 메말라 갔는데 그는 나보다 높은 경지에 있으면서도 헤아림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덕이 우리 천가에도 미치는 셈이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한 줌뿐이던 제 목숨을 스승님께서 살려 주셨고, 보잘것없는 저에 대해 맹주께서 가치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절 믿고 포용해 주시고 기회를 주시니 저야말로 이 감읍한 마음을 어찌 갚겠습니까? 서은이가 제게 마음을 열어 준 것도 부모의 덕이 있지 않아서였겠습니까?”

“자네 말이 진심 같아서 듣기 좋구나.”

천무경과 진도건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따뜻한 수선차 한 모금 기울이면서 조강선의 넋을 위로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지난 일들에 대한 담소를 나누었다. 터놓고 얘기할 시간이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천무경과 진도건은 서로의 입장에 대해서 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드르륵.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천서은이 들어왔다. 그녀는 천무경과 진도건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에 놀랐다.

“뭐죠, 이 분위기는?”

천무경이 껄껄 웃음을 흘렸다.

“남자들끼리의 비밀이다.”

비밀이라는 말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천서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천무경이 헛기침했다.

“엣헴, 운기조식은 잘 마쳤느냐?”

“……예, 한결 가벼워졌어요.”

“그럼 식사 마치고 나서 쉬다가 저녁에 부르면 연무장으로 다시 오너라.”

달이 떠오르고 어둠이 하늘에 자리 잡았을 때, 세 사람은 맹주전 연무장에 다시 모였다.

서로를 마주 볼 수 있도록 삼각꼴로 선 채로 진도건과 천서은은 천무경에게 주목하였다.

기실 천서은은 천무경과 같이 완성된 무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내외공이 균형 있게 발달하였고, 특히 파천신공의 연성만 꾸준히 이뤄내면 능히 천무경의 뒤를 쫓아가기 충분한 재능이었다.

진도건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파천신공을 익히긴 했으나 그것은 내공의 축기 수준에 머무를 뿐, 실전에서는 기실 본능적으로 기의 흐름이 발현되는 것 딱 그 정도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지만, 파천신공의 운기를 외부로 어떤 방식으로 발현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렇지 않은 때와의 차이는 천양지차(天壤之差)라 할 수 있었다.

이와 별개로 진도건은 확실한 강점이 있으니 어떤 상대든 압도할 수 있는 체화된 검술이 있었다. 천무경이 보기에도 신검합일의 경지에서 진도건보다 앞선 사람은 강호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거의 유일한 수준으로 백령신검 강정학 정도만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하는 정도였다.

강호에서 흔히 절정고수라 불리는 뛰어난 실력자들에게도 진도건의 그런 검술은 충분히 먹혀들 수 있지만, 이른바 화경에 올랐거나 거기에 근접한 자들이 펼쳐 내는 호신강기의 방벽은 쉽게 뚫어낼 수 없었다. 절정고수들이 펼쳐 내는 것과는 수준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건아, 네 검의 경지는 충분히 정점에 올라와 있다. 과거보다는 높아진 내공으로 어느 정도 강기를 구사할 수준은 된 것 같다만, 그 정도로는 앞으로 네가 상대해야 할 적에겐 부족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네가 파천신공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길 기대하는 건 무리다. 또 그것이 네게 맞는 옷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단계로 나아가야지만, 진정한 강적들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묻겠다. 초식이란 무엇이냐?”

진도건은 잠시 생각했다. 별도의 초식을 익혀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천뢰삼검식이나 조가의 창술을 떠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자세…… 연결 동작 같은 것들을 하나의 형식으로 만든 것 아닙니까?”

“뭐, 비슷하다. 일반적인 무공의 초식이라 함은 특정 상황들을 상정하여 효과적인 움직임을 구사하기 위한 형식을 말함이지. 이 초식은 아주 직관적일 수도 있고, 변칙적일 수도 있으며, 다음 초식을 위한 허초가 될 수도 있지.”

천무경은 설명하면서 검을 들고 몸을 돌려 세 가지 초식을 차례로 펼쳐 보았다.

가장 직관적인 것은 간결한 베기 속에 찌르기를 담은 천뢰삼검식의 일섬뢰.

변칙적으로 칠점을 점하면서 급소를 노린다는 목적이 뚜렷한 북천검법의 칠성광검.

현란한 움직임으로 적의 감각을 교란하는 야천유운검의 무무풍랑.

두 사람 모두 익히 아는 초식들이었다. 진도건은 쾌검법인 천뢰삼검식만 수련해보긴 했으나 사실 천서은과 대련하면서 자주 보았던 익숙한 초식들이었다.

“다르게 이런 것도 초식이다. 이렇게 기운을 분출하여 검기나 검강 따위를 만들어 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직관적인 초식이라 보는 것이야.”

천무경이 검을 들어 보이자 검신을 타고 푸른 기운이 맺혔다. 그리고 종국에는 유형화하면서 광휘에 휩싸인 검강을 만들어 냈다.

“보통은 이를 하나의 경지처럼 얘기하지만,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어떻게 기운을 운용하고 방출시키며 내 의지에 따라 검에 머물게 하고 또는 발사시킬 수 있도록 하는지, 그런 의지와 생각의 정형화(定形化)에 따라 달린 것이기에 이 또한 초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파천신공으로 예를 들면.”

천무경은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향해 질렀다.

팡!

일렁이는 기운이 동작에 따라 장심에 모였다가 허공을 때리는 순간 충격파가 터졌다.

“아주 일반적인 기법으로 기운을 방출하면 이렇게 장풍(掌風)이 발현되지만, 이걸 파천신공의 운기법을 적용하여 생각의 정형화를 통해 구사하면 이렇게 벽력장이 된다.”

콰릉!

이번에는 달랐다.

역시 허공을 때리는 단순한 동작뿐이었지만, 같은 동작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팔을 감싸면서 전류의 불꽃이 튀었다. 허공을 격하는 순간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심장을 두들기는 듯했다.

“파천신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제일초 벽력장. 어떠냐? 내가 말하는 초식에 대해 이해하겠느냐?”

“아……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는 파천신공의 절초들을 단 하나도 배워 보지 못했기 때문에 천무경의 말을 통해 인지하고 있는 상상의 파편이 쉽게 구체화하기 어려웠다.

아리송한 반응을 보이는 진도건의 표정이 이해가 간다는 듯 천무경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벽력장 정도는 내가 흐름만 느끼게 해줘도 쉽게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천무경이 두 손을 가만히 아래로 늘어뜨렸다.

일순간 그의 몸을 타고 푸른 기운이 소용돌이치며 휘감아댔다. 손바닥을 펼치면서 내밀자 휘몰아치던 기운들이 팔을 타고 흘러가 장심 위로 다시 소용돌이쳤다. 그러다 주먹을 쥐자 픽! 하고 사라져 버렸다.

천무경은 이번엔 손바닥을 아래로 펼쳐 살짝 들었다가 아래로 휘둘렀다.

쿠쿵!

그 순간 그의 주변으로 느닷없이 전류를 머금은 푸른 기운이 나타나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바닥은 푹 패이고 그 주변이 검게 그을려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동작이라는 건 실로 별 것 없었으나 나타나는 기운의 형상이나 성질이 완전히 다르게 나타나 신기하기도 했다.

진도건은 그저 혈마로서 끓어오르는 기운들을 마구잡이로 폭주시켜 본 경험만 있을 뿐, 다양한 형태로 구현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유일하게 조강선으로부터 검기성강에 대한 요령을 배웠을 뿐이었다.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 주마. 내공심법이나 일부 무공들은 파천신공처럼 ‘신공(神功)’이라 부르는데 왜 그런지 아느냐?”

“……특별해서 아닙니까?”

“풉!”

옆에서 듣고 있던 천서은이 웃음을 지었다.

“네가 말해봐라.”

천무경이 이번엔 천서은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천서은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갑자기 자신에게 물어볼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 그…… 흠! 모르겠어요. 생각 안 해 봤어요.”

“도건이 아직 파천신공 운용에 대한 감이 없으니 집중해서 설명하는 것뿐이지, 네가 앞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선 지금부터 설명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하다. 그러니 집중해서 듣도록 해라.”

“알겠어요…….”

천서은은 기죽은 듯 목소리를 죽이면서 두 손을 모은 채 천무경에게 다시 집중하였다.

천무경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하단전은 기를 담아내고, 중단전은 정을 분출하며, 상단전은 신이 통한다. 파천신공과 같은 이른바 신공이라는 것들은 제대로 수행했을 때, 상단전까지 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다양한 관점이 있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 몸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운기라는 것도 이 머리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부로 분출하는 기운의 현상이나, 성질이나, 그 형색도 모두 이 머릿속으로 어떻게 구체화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라 할 수 있단다.”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갑니다만, 사실 상식적인 개념이 아닙니까?”

“상식적이고 자연스러운 상상의 발로이지만,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파천신공의 운기 흐름을 익히고 구결을 익히느냐? 하단전으로 축기한 기운이 성질을 갖게 하는 것이요, 육신의 껍질과 더불어 중단전과 상단전이 발휘할 역량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는 작게는 신체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크게는 인간이 갖는 범용의 한계를 초월함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천무경은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으며 말을 이어갔다.

“도가에서 상단전이 열리면 신이 하늘과 통한다 했다.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자연기나 축기한 내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사람은 저마다 성격이 다르고 또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닫혀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잠재력을 직관할 능력이 없다. 내공심법이나 이런 신공의 수양은 그런 능력을 개발시켜 주는 것에 그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천신공은 하늘을 부술 듯 울리는 천둥과 벼락을 구체화한 셈이라 볼 수 있지.”

많은 내용들이 천무경의 입에서 흘러나오긴 했지만, 진도건도 최소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화산에서 혈마로 폭주하였을 때, 그의 영혼은 육신의 지배력을 빼앗긴 채 선천진기의 장막 속에 숨어 자신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관조할 수 있었다.

그때는 워낙 혼돈에 빠져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혈마가 몸에 아로새겨놓은 그 섬찟한 상흔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했다.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명상을 하면서 수양했던 것이 이른바 선인의 풍술(風術)과 염력이었다.

두 가지 모두 상단전이 열리지 않으면 불가능한 능력이나 다름없으니 이미 진도건에게선 무의식적인 인도가 아주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이는 즉, 천무경의 목소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억이 반응하면서 혈마의 상흔이 혈관을 타고 천천히 온몸으로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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