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제27장. 혜검(慧劍) (1)
“정말 진도건과의 십수논검에 참여 안 할 셈인가?”
청명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요.”
위정오 부자가 동시에 아쉬운 얼굴을 하며 잠깐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 또 일 안 하시고 뭐덜 합니까?”
농부가 소리치는 소리에 위정오와 위경서가 모두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손에 들려 있던 모를 제대로 고쳐 쥐고 물컹한 지면에 푹 꽂았다.
“밥때도 지났으니 일단 끝내놓고 얘기하시죠, 후후!”
“그럽시다!”
농부의 따가운 눈초리가 내리는 가운데 어느새 함께 논에 들어온 세 사람은 부지런히 모를 심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가 흘러 중천에 떴던 해가 고개를 슬며시 고개를 기울일 때가 돼서야 그들은 논둑으로 올라와 몸에 묻은 진흙을 털 수 있었다.
“고생들 하셨습니다. 저짝 개울가로 가면 울 마누라가 상차림 따로 내어드릴 겁니다. 모쪼록 드시고 가십시오들.”
“고맙습니다.”
논으로 물을 대는 개울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팔다리에 묻은 진흙을 물길에 씻어 보냈다. 옷도 대충 물로 닦아내고는 내공으로 말려 버리고 따로 잔가지들과 땔감을 모아 모닥불을 지폈다.
식사 거리는 금방 가져왔다.
농부들에게 핀잔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일손이 늘어 미시(未時)가 한참 지나서 끝날 양을 한 시진 가까이 일찍 끝내준 셈이었다. 그래서 같이 일했던 농부들 모두 고마운 마음들이 있었다.
다들 허기졌기에 식사부터 마치고는 숨을 돌렸다.
“오늘 안 하면 모레는?”
“고민해 보겠습니다.”
“혹시 패배를 두려워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지면 그게 자네 첫 패배 아닌가?”
“그럴 리가요.”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패배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목숨을 잃는 일도 없는 비무의 하나일 뿐인데.
“패배는 이미 천서은 소저께 당해 봤습니다. 손 쓸 새도 없었죠.”
“천 소저가 그 정도입니까?”
위경서가 놀라 물었다.
천무경의 딸이라니 분명 무공이 뛰어날 거로 생각하면서도 여자의 몸이었기에 얕잡아 본 것도 없잖아 있었다.
“후후! 단신으로 흑풍신마를 몰아붙이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합니다. 그분을 감당할 수 있는 고수는 이 넓은 강호에서도 아주 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맹주의 딸이라고 너무 높이 평가하는 건 아니고?”
“직접 보시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위경서는 두 손을 펼쳐 손가락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천하오절 모두 화경에 든 고수라죠? 맹주 천무경, 창천단주 구치상, 검림 총수 강정학, 구룡문주 금태하, 철갑권왕 안효철. 거기에 정파 고수도 그 반열로 평가받는 사람이 두 분이 계시죠. 무당파의 소요자와 당문의 당혁수. 그리고 또…….”
“더한 강자는 찾다 보면 더 나오겠지요. 하지만 1, 20년 후쯤에는 천 소저도 그 반열에서 함께 회자될 지 모릅니다.”
“자네가 그 정도로 보았다면 그런 거겠지. 진도건은 어떤가?”
“잘 모르겠습니다. 천 소저와 다툰 이후의 흑풍신마는 확실히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쉬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흑풍신마를 마무리한 것은 그 사람이니……. 저도 전장에서 한 번 본 게 전부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천 맹주와 비무했을 때를 보면 확실히 무공은 대단해 보였습니다. 특히 그 피처럼 붉은 기류는…….”
위경서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흑풍신마와 대결했을 때는 그보다 더했습니다. 흑풍신마나, 진도건 그 사람이나…….”
청명도 천무경과 진도건의 비무를 보았지만, 위경서가 느낀 감상에 미치지 못했다. 흑풍신마와 진도건의 대결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그 괴이한 현상들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어땠는지 궁금해지긴 하는군. 십수논검 할 땐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렇습니까?”
“기준을 어디에 두냐에 다를 수 있겠지만, 쾌도에 인생을 바친 나로서는 ‘완성에 가까운 검도’라고 보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위정오의 말은 청명에게 작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흑풍신마와의 대결, 천무경과의 비무에서 본 진도건은 섬뜩하리만치 붉은 기운을 마구 뿌리던 모습만 보았던 터라 해남파 무공을 제대로 이은 위정오의 평가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위정오는 청명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궁금했네. 내가 볼 때는 쾌검이나 강검으로는 누구도 그를 꺾을 수 없어. 공력을 마음껏 발산하는 싸움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무당파의 태극검은 경지를 이루면 유검을 넘어 이화접목의 이치까지 발휘할 정도 아닌가?”
“그래서 제가 오늘은 할 생각이 없다고 하니까 두 분이 그렇게 아쉬워한 것이군요?”
“아버지가 졌는데 저라고 상대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청명 도사님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해서 같이 왔지요.”
그동안 십수논검에 대해 다소 무신경한 눈치로 두 사람을 대했던 청명의 얼굴에 처음으로 흥미로워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진도건에 대한 인상은 계속 섬뜩한 무언가로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위정오의 그런 의외의 평가는 그를 묘하게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위정오는 인물평에 있어서 냉담하면서도 솔직한 편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파 무인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인식을 보여왔었으나 창천단주를 맡은 구치상이나 맹주 천무경에 대해선 경외심을 늘어놓기도 했었다.
그런 사람의 평가였으니 솔깃할 만했다.
“위 대협의 말씀이 그러하다면 모레엔 참가해 보겠습니다.”
“그럼 이참에 지금 가서 실력을 한 번 관전하는 것이 어떤가?”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 오늘 내일은 거기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대응하기 힘들 텐데.”
위정오는 진도건의 쾌검을 떠올리며 걱정하였다.
“하하하, 쾌검에 대한 대응은 이미 천 소저에게 호되게 당해본 적이 있어서 방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 소저의 쾌검도 위 대협께서 충분히 놀라실 만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천서은에게 생각이 미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청명은 무당파 도사로서 소요자의 뒤를 이어 후대를 빛내 줄 후기지수로 큰 기대를 받고 있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이성에 대해서는 항상 거리를 두어왔었는데 천서은의 아름다운 미모와 거침없는 여협(女俠)의 성정, 뛰어난 무공은 절로 호감이 들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천무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그랬다.
무당파를 향한 무거운 책임감과 이미 연인이 있는 천서은을 향한 어설픈 마음 사이에서 청명은 작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자신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여인이었으나 그렇다고 의심스러운 사내 옆에 있는 모습은 자꾸 신경 쓰이게 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진도건에게 묘한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진도건에게 마도의 흔적이 닿아있어 의심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대비되는 위정오의 평가는 분명 공존하기 힘든 인상이었다.
* * * *
오후의 십수논검은 평이하게 흘러갔다.
일곱여 명의 도전자들 모두 다섯 합을 채우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같은 날 연달아 이렇게 한 사람이 단 한 번의 패배도, 무승부도 없이 이기기만 했던 적은 없었기에 창천단 내에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진도건은 그런 감정의 물결과는 무관하게 평이한 사무를 마무리하듯 끝내며 연무장을 나섰다.
그는 잠시 도시 안을 둘러보며 바람을 쐬었다.
붉은 머리카락이 워낙 눈에 쉽게 뜨였기 때문에 뒤로 묶어 놓고는 두건을 둘러서 가렸다. 그래도 눈썹과 눈동자가 붉어 가끔 지나치듯 눈이 마주칠 때면 사람들이 놀라곤 했다.
그렇게 종종 알아보고 눈길을 보내는 창천단원들이 있긴 했지만, 백성들 대부분은 그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는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걸으면서 기분이 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걷고 있던 와중에 찻집이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종류의 찻잎을 잘 말려서 좌판에 진열해 놓았는데 싱그러운 향기가 콧속을 자극했다. 한쪽에는 목함에 종류별로 포장해 놓은 것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진도건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바로 한 상자를 구매하였고, 곧 상인이 그의 머리카락 색과 닮은 빨간 보자기로 묶어서 손에 들려주었다.
진도건은 오래 돌아다니지 않고 맹주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무실에 들어가 사무를 보고 있던 천무경에게 인사를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맹주님.”
“그래, 고생했다. 거기 앉아라.”
천무경이 서한들을 만지던 손을 들어 맞은 편에 있는 원탁을 가리켰다. 그가 진도건이 차분히 앉는 모습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서은이 운기조식이 끝나면 같이 식사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진도건은 대답하면서 조심스럽게 붉은 보자기를 싸맨 상자를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차분히 앉아 눈을 감고 기다렸다.
천무경은 맹주실로 들어오는 전서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진도건에게 주었다가 원탁 위에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게 뭔가?”
“무이수선차(武夷水仙茶)입니다. 화산에 있을 때, 스승께서 즐겨 드셨던 차입니다. 잠시 시내에 바람을 쐬다가 보고 맹주께서 좋아하실까 하여 사와 봤습니다.”
“그래? 기특하군. 자네에게 그런 걸 다 받게 될 줄이야. 저 책장 가운데 보면 차대가 있네. 한번 달여 보겠나?”
진도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책장에서 차대와 찻주전자, 다기 등을 꺼내어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화산에서 조강선의 수발을 들 때를 떠올리며 천천히 준비했다.
이내 정무실 안에는 깊은 향기가 맴돌았고 천무경도 웃으면서 손에 든 전서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 잠깐 다도를 즐겨 볼까?”
천무경은 원탁에 마주 앉아 진도건이 건네는 찻잔을 받았다. 푸르게 우려낸 수선차의 찻물은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향을 즐기면서 한 모금 음미했다.
“좋군.”
진도건도 한 모금 마시면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고통에 신음하던 그의 회복을 정성껏 도와주고, 또 지도를 아끼지 않던 조강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깎아지른 절벽 너머 운해에 휩싸인 화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검무를 추는 조강선의 모습은 어릴 적 보던 때와는 다르게 성숙한 관점의 영감을 주곤 했었다.
흘끔 훔쳐보는 시선으로 진도건의 미소 속에 품은 뜻을 헤아렸을까.
“네 스승 조강선 선배를 화산에서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폭주하는 너의 끝내려는 찰나 날 막아섰던 그의 모습과 느낌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지.”
이야기에 진도건이 고개를 들어 천무경을 바라보았다.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그건…… 마치 갓난아기를 보는 것만 같은 새로움이랄까? 헤아릴 수 없이 특별하여 나 자신이 더없이 평범해지는 기분. ……으하하하!”
천무경은 민망했는지 웃음을 터뜨리면서 턱을 긁적였다.
진도건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가 가면서도 난해한 부분이 있었다. 그런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그의 얼굴을 본 천무경이 피식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거 아느냐? 이 정도 위치에 이르면 사람에 대한 감상은 사실 흥미로울 것이 없어진다. 화경이라는 깨달음은 인간으로서, 무인으로서 사고의 영역을 확장해 주지만, 한편으론 평범한 걸 무신경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특별한 것도 평범하게 느껴지게 되어버린단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훗. 그래, 넌 아직 멀었지. 사실 그래서 나에겐 내 아내만큼 소중한 것이 없었다. 한때 투신(鬪神)이라 불릴 정도로 무감각해진 감정을 가지고 싸움터에 전전하던 내가 아내를 만나 첫눈에 반하고 아내의 말에 쩔쩔매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는 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