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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36화 (136/432)

136화 - 제26장. 다시 화산혈마사(華山血魔史) (6)

후웅!

진도건의 목검이 하단을 쓸어오자 놀란 위정오가 급히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가 펼쳐 냈던 초식과 비슷한 수법으로 진도건의 검격이 솟구치며 달려드는데 몸을 띄운 이상 도망칠 수가 없었다.

타타탕!

도검이 부딪치는 와중에 진도건의 목검이 위정오의 어깨와 옆구리,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일부러 때리지 않고 힘을 조절할 만큼 여유가 있다는 소리였다.

“큭!”

사실상 승부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위정오는 쉬이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덤벼들었다.

사상도법 냉소단파(冷笑斷波).

달리 사상쾌도(四象快刀)라고도 불리는 쾌도법답게 위정오의 목도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삼연격을 퍼부었다.

밀집된 연격은 그만큼 살상력이 높지만, 범위가 좁으니 피할 공간이 나온다. 그러나 그걸 상쇄할 만큼 압도할만한 속도가 받쳐준다면 빈틈이랄 게 있겠는가.

가볍게 말아쥔 진도건의 목검이 위정오의 앞에서 일순 흔들거렸다.

따닥, 딱-!

명쾌하게 울리는 소리와 목도를 쥔 손바닥에 느껴지는 감각이 믿어지지도 않지만, 마지막 소음이 채 귓가에 가시기도 전에 목을 둘러서 스쳐 지나가는 감촉에 위정오는 소름이 쫙 끼쳤다. 진도건이 눈앞에 잔상만을 남긴 채 그를 지나쳐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느껴지는 존재감은 살면서 처음 느껴본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게다가 너무 전력을 다해 목도를 휘둘렀기 때문일까, 목에 느껴진 쓰라린 통증이 가져온 충격 때문일까.

툭.

뻗어낸 팔과 손등에 가려져 목도가 부러졌다는 사실을 그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난 소리를 듣고서야 눈치챘다.

위정오는 낮게 눌러 놓았던 자세를 세우면서 왼손은 무심결에 목을 쓰다듬고 오른손으론 부러진 목도를 내려다보았다.

목도가 부러지고 뜯겨 나갔는데 단면의 절반 정도는 철검으로 자른 듯이 반듯했다.

‘기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는다. 외공만으로 이 정도가 가능한가? 아니, 이건 내외공의 문제가 아니다. ……베고자 하는 방향과 검날의 방향, 타점이 모두 완벽했다. ……40여 년 칼을 잡은 내 솜씨가 보잘것없다 느껴질 정도로.’

해남도에서 섬 밖으로 나간 적도 없이 오로지 해풍에 맞서서 칼을 휘둘러 왔었다. 해적들이나 대륙에서 건너온 무법자들을 상대로 싸운 거 외에는 실전 경험이 나이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라고는 하나 적어도 칼과 몸이 하나를 이룰 정도의 경지는 이뤘다고 자부해 왔었다.

그런 자부심이 일격에 무너진 순간, 위정오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달라진 해남파의 위상이나 창천단에서의 소속감 따위에 취해있었던 기분을 날려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수행에 대한 열의와 당위성을 되찾은 느낌이 그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내가 졌네. 좋은 검도일세.”

“좋은 쾌도였습니다.”

“자네만 하겠나? ……잠깐 실례 좀 하지.”

위정오는 진도건에게 다가가 들고 있던 목검을 놓고는 손을 내밀어 그의 팔을 만졌다. 어깨, 가슴, 복부, 허벅지 등을 스스럼없이 주물러보거나 찔러보자 진도건도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마지막으로 손바닥을 만져보던 위정오는 그 손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보물과도 같은 신체로군. 무릇 명검이라 불리는 것들은 장인이 어떤 노력을 쏟아부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많이 배웠네.”

위정오가 물러나자 진도건이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음으로 하실 분 계십니까?”

좌중에 적막이 흘렀다.

십수논검은 사람마다 사용하는 시간은 반 각도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보통 열 차례 정도 순환이 일어나곤 하는데 네 번째로 나선 위정오 이후로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보던 진도건은 다시 좌중을 향해 포권을 올렸다.

“그럼 오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각에 마무리된 십수논검이었지만, 승패의 두려움과 개별로 적잖은 충격을 받으면서 결국 자리는 해산되었다.

진도건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숙소로 돌아간 사이에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 채 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의견들을 꺼냈다.

“이거 소문보다 더 대단한데? 창무대에서 보여 준 것도 전부가 아니겠지?”

“넌 진도건과 십수논검 하겠다면서 왜 손 안 들었어?”

“저 정도일 줄 알았나?”

“나도 어떤 초식으로 겨뤄볼지 고민 좀 더 해야겠어. 뭐 고민도 없이 파훼하는데 내 참, 기가 차더라고.”

“이보시오, 위 대협. 직접 상대해 보니 어떻소?”

한 사람이 부러진 목도와 파편들을 주섬주섬 줍고 있던 위정오를 향해 물었다.

위정오는 그를 흘끔 보고는 지나가는 어투로 입을 열었다.

“……누구나 신검합일을 이루었다 자랑하곤 하지만, 그의 앞에선 한낱 말뿐인 허세일 듯하네.”

“신검합일이면 신검합일이지, 뭐 그런 얘기를.”

물어본 사람은 위정오의 대답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는지 툴툴거렸다.

위정오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슬쩍 보니 사파의 인물 같아 보였는데 으레 그렇듯 상대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 모습에 관심을 거뒀다.

“그럼 창천단의 누가 저자와 겨뤄볼 만하겠소?”

위정오는 그 말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오후의 십수논검에 속한 조에 누가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그는 바스러진 목도 파편들을 두 손에 잘 모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굳이 밖이 아니라 창천단 안에서 찾아야 한다면……, 청명 정도야 어울려 볼 수 있겠지.”

구룡문이 광혈종에게 습격을 받아 큰 위기를 겪을 때, 마침 가까이 있던 무당파는 일찍이 개방으로부터 연통을 받았다. 그리고 소요자가 도사들을 이끌고 하산하니 구룡문을 구원할 수 있었다.

소요자는 광혈신마를 쫓아냈을 정도로 천하오절급의 무공을 갖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수련한 무당파 도사들은 수가 적었으나 일신의 무공들이 뛰어났다. 그들이 구룡문이 겪었던 열세를 일거에 뒤집기도 했기에, 강호 무림에서는 부활한 정파의 육파일방 가운데 무당파의 잠재력을 가장 높게 쳤다.

청명도사는 무당파 안에서도 가진 재능을 인정받아 소요자가 직접 가르쳤던 제자였다. 단체로 지도받던 다른 도사와는 확연히 결이 달랐다. 무당파에서도, 창천맹에서도 주목할만한 인재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창천맹주 천무경이 2차로 북부 전쟁에 보낼 500인단을 꾸릴 때, 무당파에서 청명을 보내자 천서은 다음으로 그의 도호를 명단 두 번째에 작성했다. 그리고 이건 무당파의 젊은 후기지수를 위한 배려이기도 했었다.

천무경 등은 흑풍신마의 나이가 젊기에 구주마종 다른 신마보다 실력이 떨어질 거로 생각했으나 이번에 야율균은의 얘기처럼 결과적으로 오판한 셈이었다. 물론 초기에도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진도건이 전장에 참가했다는 정보가 당시 그 불안감을 상쇄한 측면이 있었다.

어쨌든 전장의 상황은 조태상의 계획으로 인해 예상보다 신속하게 전개되었고 2차로 출발한 500인이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소수는 천서은과 진도건이 흑풍신마 야율재와 치른 전투에 감명을 받았으니 청명이 바로 그들 중 하나였다.

청명은 다른 수준에서 생사결을 치르는 진도건과 천서은의 모습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종전 이후에 과반 넘는 인원이 저마다 사문으로 돌아갈 때, 그는 창천맹으로 돌아와 창천단에 참가하였다. 그는 곧 창천맹에서 가장 주목받는 재능이 되었다.

영천성 안에서 청명의 이름은 다른 방향으로도 유명했다.

백성의 어려움을 보고 모른 척하지 않았고, 문제를 해결해 준 이후에도 괜찮은지 세심하게 살폈다. 이런 의협심에 기초한 활동들은 다른 정파 인물들의 참여를 끌어낼 정도의 모범이 되면서 두루 인망을 얻기도 했다.

지금도 그가 열중하는 건 무공 수련이 아니라 두 팔을 걷어붙인 채, 농민들을 도와서 벼의 모를 심는 일이었다. 팔다리와 청백의 도복은 진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을 정도로 열심이었는데, 얼굴에 묻은 진흙도 미소년 같은 인상은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청명도사님, 줄이 비뚤어졌어요.”

뒷줄에서 같이 모를 심던 중년의 농부가 고개를 들고 청명 쪽을 힐끔 보다가 방향이 점점 어긋나는 걸 발견하고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옮겨 놓겠습니다.”

청명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자신이 심은 모들을 살펴봤다. 과연 뒷줄과는 점점 벌어지면서 앞줄에서 먼저 모를 심으며 치고 나간 농민의 것에 점점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다시 뒤의 농부를 흘끔거리며 살펴보았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여 모를 심고 있는 자세로도 곁눈질만으로 줄이 비뚤어졌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렵구나. 검을 반듯이 휘두르는 일은 쉬워도 모심는 일은 할 때마다 줄이 틀어지니 참 어려운 일이다.’

이미 심었던 걸 다시 뽑아 옮겨 심는 것도 조금 짜증도 나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다시 지나온 자리를 되돌아갔다. 그리고 심었던 모를 다시 뽑기 위해 허리를 숙이는 그때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선이라.’

검법이란 것은 결국 찌르고 베기 위하여 선을 그리면서 위치를 선점하는 작업이었다. 그것을 다양한 상황에 맞게 형으로써 정리한 것이 초식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무당파의 태극검법은 오묘했다.

살생이 잘못된 것이어도 강호의 비정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도교 무당의 검법도 결국엔 찌르고 벨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경지를 이루어내면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하고 출혈을 최소화하여 제압하는 걸 고민하게 되니 그래서 나온 게 태극권을 검으로 계승한 태극검법이었다.

태극검법도 찌르고 베지만, 그보다 더 많이 곡선을 그리는 형을 제시한다.

원을 그리는 동작은 검 끝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저 원일 뿐이지만, 검을 돌리는 손목을 중심으로 본다면 원뿔이 된다.

그리는 속도가 빠르다면 그것은 하나의 영역을 점유하게 되는 것이고, 수많은 선을 차단할 수 있다. 또 힘 조절에 능하고 상대의 힘의 세기까지 간파할 지경에 이르면 이를 역이용할 수도 있게 된다.

원이 아닌 다른 긴 곡선을 그리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펼쳐 내느냐에 따라 상대의 목숨을 위협하는 살초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틈을 지우는 장막이 되기도 한다.

논 위에 줄지어 심어진 수많은 모의 선들은 전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선이다. 모두 평행하다는 점에서 규칙적이지만, 시선이 좁아지면 청명처럼 엇나가게 된다. 또 공간을 정확히 인지하게 된다면 농부처럼 손쉽게 짚어낼 수도 있었다.

직선을 그리든 곡선을 그리든 결국 공간을 점유하고 제어하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지만, 결국 자신과 상대의 영역 안에서 이뤄지는 제한적인 관점에 불과했다.

문득 천무방에서 천서은과 잠깐 검을 겨뤘던 때를 떠올렸다.

전장에선 눈먼 칼에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이 새삼 다시 기억난다.

‘아무리 비무에서 상대를 이긴다 한들 그 이상의 공간을 시험해 볼 수는 없다.’

다른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천서은과 흑풍신마가 엄청난 기공 대결을 펼치는 광경.

마음껏 공력을 방출시켜 신외(身外)의 영역부터 상대에게 공격을 퍼붓는 건 확장된 공간으로 접근하기 위한 수단인 건 틀림없었다.

‘어렵구나. 아무리 무공이 한계를 초월하게 만든다고는 하나 결국 사람의 몸으로 하는 일인데.’

모심는 일에서 검에 생각이 미치자 청명은 자신도 모르게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상념에 젖은 채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아, 뭐 허요? 그렇게 가만히 서 가지고?”

답답한 농부의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다.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네요…….”

부끄러워진 청명이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하면서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손에 묻은 진흙이 그대로 머리카락에 엉겨 붙었다.

“하하하! 자네, 여기선 혼이 다 나는구만 그래.”

익숙한 웃음소리에 청명이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높은 논둑 위로 수염 희끗희끗한 도객이 옆에 젊은 청년과 함께 서서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 대협, 위 소협.”

위정오와 그의 아들 위경서의 얼굴을 알아본 청명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마다 팔에 묻은 진흙들이 바람결에 흩날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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