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제26장. 다시 화산혈마사(華山血魔史) (5)
제갈씨도 여러 갈래가 있었지만, 이 가운데서도 강호 무림에 적을 두어 융중산(隆中山)에 산장을 세운 제갈세가는 문무 양면에서 모두 뛰어난 면모를 보였다. 그리고 간헐적으로 지모(智謀)가 특히 발달한 인재가 나타나곤 했는데 제갈무문(諸葛武文)이 바로 그런 평가를 받았다.
정파 세력이 오랜 세월 봉문으로 잠적했음을 고려했을 때, 촉한의 제갈량이 유비에게 임관하기 전 평가가 그러했듯 제갈무문도 ‘복룡(伏龍)’이란 별명으로 지역에 그 명성이 은연중 알려져 있었다.
“복룡 선생.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무문의 별명이다.”
홍두형은 간단하게 그에 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 범굉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그러나 어찌 사파 대표 격인 검림의 총수이자 천하오절의 고집을 정파 세가 가주의 조언 따위로 돌려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강정학이 움직일 시점을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도록 두 개의 작은 포석을 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변수를 차단할 세 번째 포석이지요.”
범굉대사는 네 번째 손가락까지 접고는 손을 내렸다.
“첫째로는 행방불명된 양자성은 강 총수께서 아들만큼이나 아끼는 제자였는데 그를 찾기 위한 노력을 개방과 하오문이 하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한 정기 서신이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만약 그 서신에 유의미한 정보가 담겨 있다면 강 총수의 발걸음을 조금 늦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양자성……!”
천서은이 굳은 표정으로 나직이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와 양자성 사이에는 분명한 은원이 있었고 그건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것이었다. 비록 강정학에게는 묵인하고 넘어가겠다고 했었으나 적어도 그녀로선 멀쩡하다는 소식조차 듣고 싶지 않은 자인 건 분명했다.
그녀의 반응을 느낀 천무경도 그 이유를 곧장 이해했다. 그는 바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직접 입을 열었다.
“두번째로 진도건, 너를 강 총수에게 보일 것이다.”
“절 말입니까?”
“강 총수는 나와 오랜 경쟁 관계지만, 최소한 검에 관한 한 나는 그 영감에게 한 수 접어 줘야 하겠지. 오로지 검 하나만 보고 평생을 살면서 검림이라는 조직까지 세울 정도의 인물이니 나와 다르게 너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야.”
“도건은 천무방의 사람인데 그분이 도움을 주겠습니까?”
“강 총수는 일찍이 이 녀석이 가진 특이함에 큰 관심을 가졌었다. 두 제자를 잃은 상실감을 생각한다면 ……특히 양자성과 같은 또래의 후기지수를 본다면 그동안 억눌렀던 후진 양성의 욕심을 자극할 수 있을 거 같더구나.”
천무경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강정학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날 직접 검림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강정학의 모습은 절대로 심상치 않았다.
마무리 짓지 못한 염황신마와의 혈투, 둘째 제자의 죽음, 믿었던 셋째 제자의 배신 가능성, 검림 구성원들의 죽음 등은 이제 곧 여든을 바라보는 노장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주는 대목이었다.
강정학이 비혈단을 통해서 염황신마와 염황종을 추적하고, 창천맹의 개방, 하오문을 통해서 양자성의 행방을 추적하는 모양새는 마치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서산에 지려는 황혼을 떠올리게 했다.
중원 무림 통틀어서 그만한 고수가 없었기에 천무경은 강정학이라는 무림 선배가 허투루 쓰이길 바라지 않았다. 구주마종 외에도 마교주가 있었고 태상교주도 살아 있다고 했다. 또 구주마종과 버금가는 실력자지만,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은 강적도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정학이라는 최상의 패를 고작 상대의 포석 하나 잡고 버리는 식의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야율균은은 천무경과 두 부맹주가 설명하는 내용의 섬세함에 깜짝 놀랐다.
‘흑풍대에 있으면서 야율재나 야율신 모두 천마신교를 두려워하고 경계하였는데, 이들은 진심으로 물리칠 고민을 하고 있구나.’
이런 판을 그려 놓은 복룡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증이 일었고, 이렇게 이념이 다른 정사 인물들을 조정하는 천무경이 가진 매력이 어떤 것인지도 조금은 느끼게 되었다.
‘사파 절대고수로서 상징성에서 따라올 수 없는 위치, 정파의 인물들도 신뢰를 보낼 만큼 직관적이고 솔직한 사고방식. 이 사람만 굳건하다면…… 어쩌면 천마신교라도 중원 정벌의 뜻을 이루지 못할 수 있겠구나.’
야율균은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천무경은 진도건에게 시선을 집중하였다.
“그렇다면 나도 강 총수에게 널 선보이기 위해선 최소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진 말아야 할 것 아니더냐? 너의 검술은 그 자체로도 분명 빛나는 것이지만, 너도 그동안 적지 않은 사투를 벌이면서 느꼈을 것이야. 내공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그렇지 않더냐?”
“분명 그렇습니다.”
“그러니 강 총수에게 보이기 전에 내가 먼저 널 다듬어놔야겠다. 내공의 형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루는 것은 내가 강 총수보다 나으니 그 길을 터주도록 하마.”
“제자가 어찌 보답해야 하겠습니까?”
“제자는 무슨. 구배지례도 안 하지 않았냐?”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올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장차 장인이 될 사람이 사위가 될 녀석에게 사제 간의 예까지 따져 뭐하겠느냐?”
“아!”
진도건과 천서은이 동시에 놀란 표정으로 천무경을 보았다.
생각하지 않고 연속으로 내뱉다 보니 막 나온 것이었는데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천무경은 조금 머쓱해진 기분이었다. 그는 곧바로 표정을 굳히고 으름장을 놓았다.
“혼인이란 건 인생에 다시 없을 중대사인데 비바람 한 번 같이 겪어 보지 않고 예식을 치를 수는 없는 법이다. 강호 무림에 환난이 지대한데 너희는 응당 맡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당장의 혼약은 사치스러운 일이니 정진할 생각만 하여라.”
“예, 맹주님.”
진도건은 차분히 대답했지만, 천서은은 대답하지 않고 배시시 웃으면서 천무경을 쳐다보았다. 천무경은 딸의 그런 눈길을 애써 피하면서 진도건에게 들으라는 듯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낮에는 십수논검을 진행하여 혹시 추가로 일행에 합류할만한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 저녁엔 나와 함께 파천신공을 수련할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후후! 잘 부탁하네.”
구치상도 진도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 * * *
십수논검.
창천단에 모인 무사들은 모두 그 실력이나 명성 면에서 상당한 수준을 갖춘 자들이었다. 게다가 각 문파나 혹은 정사 사이에 저마다의 자존심을 구축하고 있다 보니 결코 단합된 조직이라 볼 수 없었다. 그렇다 해서 구치상도 이런 차이를 억지로 단합시키려고 들지도 않았다.
단내 분쟁으로 발발하는 정도가 아니라면 자유롭게 실력을 겨루고 경쟁하면서 다양한 문파, 다양한 인물들이 가진 특징들을 경험하고 익히라는 취지였기 때문이었다.
창천단은 실내 연무장을 별도로 갖고 있었다.
성내 치안의 관리를 위하여 주마다 무작위로 명단이 교체되는 4개 조가 번갈아 임무를 수행했고 그렇게 하는 동안 저마다 자율적인 시간을 누리거나 수행을 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2개 조는 오전 오후 한 시진씩 하여 십수논검에 참가하곤 했다.
200여 명이 모인 실내.
보통이라면 창천단 무사 두 사람이 나와 논검을 치르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오로지 진도건만이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초식을 시연하는 사내를 바라보는 진도건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십수논검의 규칙은 이러했다.
초식의 형을 겨루는 데 기초하면서 공방을 겨루는 것이 기본. 엽전의 앞뒷면으로 공방의 순서를 결정한 후, 공격자는 방어자에게 첫 시작의 초식이 어떤 형태인지 눈앞에서 시연을 한 차례 보여야 한다. 방어자는 종소리가 다섯 번 울릴 때까지 어떻게 방어할지, 다음은 어떻게 반격할지 고민한 후에 그 초식을 시작으로 열 합 안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종소리 간격은 약 5, 6초 가량으로 그 안에 공방 사이의 흐름을 예측하여 짧은 시간 동안 승부를 보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에 승부가 결정지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정말 소수의 몇 명만이 상대적으로 승리의 전적을 꾸준히 쌓고 있을 뿐이었다.
해남파의 사상도객(四象刀客) 위정오(魏丁吳)는 바로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해남파는 남해 해남도에 위치하기에 중원에서 그 명성이 약했으나 정파의 위상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천하를 돌아다녔던 주백자에 의해 그 실력을 입증받아 육파일방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그렇다 해도 같은 정파 내에서는 실력에 대한 의구심이 꾸준히 있었는데, 그 의구심을 해소해 준 사람이 바로 창천단에 합류한 위정오였다.
위정오는 벌써 50줄의 나이에 가까워지는 사내였는데, 해남파 정통검법인 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보다 사상도법(四象刀法)에 심취한 독특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아들 위경서(魏更瑞)에게 사상도법과 더불어 강호의 경험을 쌓게 해 줄 생각으로 창천단에 입단한 것이었다.
진도건이 천무경과 비무 했을 당시에 비번이었던 그와 달리 위경서가 비무를 지켜보았었는데, 그에게 와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위정오도 호승심이 일어 십수논검에 참여한 것이었다.
사상도법 비환초무(悲歡招撫).
슬픔과 기쁨을 어루만지는 칼춤.
사상(四象)의 해석은 기본적으론 사시(四時)로 얘기하지만, 위경오는 이걸 사람의 감정을 설명하는 희로애락(喜怒哀樂)에도 담아내어 변화를 더 하였다.
‘흐음.’
위정오가 천천히 펼치는 초식은 어딘가 무겁고 느릿한 동작들은 겉보기에 위협적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빠르게 짓쳐 드는 목도의 위세는 섬찟한 느낌이 있었다. 정말 빠르면서도 무겁고 끈적이게 옭아매는 듯 기이하게 꺾여 들어오는 연속 참격의 형(形)은 진도건으로서도 처음 보는 형이었다.
진도건은 일보 후퇴하면서도 도세 속으로 목검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따닥! 딸랑!
목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연이어 종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울린 종소리가 시작을 의미하는 첫 번째 종소리임을 고려한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시위하는 듯했다.
보통 칼을 흘린다면 칼날의 중앙이나 끝 지점을 쳐내어 그 궤적을 살짝 비켜나가게 만드는 것이라면, 진도건은 깊숙하게 검을 넣어 호수와 가까운 칼날을 쳐냈다.
마치 목도를 쥔 손을 빠르게 노려지는 듯이 하는 바람에 위정오는 동작 중에서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진도건의 무거운 검격까지 가미되었다.
슬픔이 헛바람처럼 진도건에게 닿지도 못하고 훌훌 날아가 버렸다.
목도는 옆으로 크게 벗어났고 진도건의 목검만이 가슴팍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헛!”
놀란 채 급히 뒤로 물러나 피해내는 위정오를 진도건은 충분히 노릴 수 있음에도 일부러 쫓지 않았다.
‘최대한 받아주면서 해라.’
구치상의 당부가 있었기에 그저 걸음만 앞으로 전진시키면서 압박감을 더했다. 그 의도가 느껴졌던 위정오는 자존심이 상했다.
사상도법 건풍작도(乾風灼刀).
마른 바람에 칼날이 불길로써 작열한다. 하단을 쓸어냄과 동시에 맹렬히 쏟아내는 도격의 연속은 촘촘하면서도 거침없이 확산했다.
‘불길은 뿌리부터 잘라내야지.’
지근거리에서 솟구치는 도격들을 쳐내면서 반보 물러나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무릎을 중심으로 빙글 도는데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 마냥 그를 쫓는 도격들을 쳐내는 모습에, 지켜보는 군중들의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