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제26장. 다시 화산혈마사(華山血魔史) (3)
혈마진기.
그렇게 통칭하기도 우스운 것이 진도건의 내공 근간은 천무경처럼 파천신공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혈마의 마성은 그의 내공에 색(色)을 물들여 성질을 바꿔버렸다.
파천신공의 벼락과도 같은 직선적이고 무자비한 파괴력의 성질이 혈마의 마성에 물들어 좀 더 원초적이면서도 탐욕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성질은 지금도 계속 변하는 중이어서 진도건이 원류검결을 통해 선천진기가 아주 크게 성장했기 때문에 영향이 적은 것일 뿐이지, 일반인이었다면 벌써 미쳐가면서 다시 혈마에게 자아를 빼앗길 것이 분명했다.
천무경도 지적할 정도의 잠재적 위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나 현시점에서 진도건이 마성에 다시 잠식될 우려는 없다고 있었다.
강기까지 펼쳐 낸 것은 아니었지만, 기운을 마음껏 표출함으로 인해서 그들의 움직임은 더 빨라지고 사위로는 경력의 충돌이 연신 일어났다.
강대한 힘을 지녔을수록 제한적인 기준 아래에서 힘을 다루는 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천무경은 큰 무리 없이 최선을 다하는 진도건의 검세에 맞춰 힘을 조절하고 있었다.
직전까지 진도건의 검속에 압도되는 모습을 보였던 그도 충분히 인지조절 가능한 범위까지 힘을 표출하기 시작하자 능히 검을 맞댈 수 있었다. 붉은 기류와 푸른 기류에 휩싸인 두 자루 흑검이 거칠게 충돌하는 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살 떨리는 기분까지 느낄 정도였다.
카카앙-!
마치 검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금속성에 지켜보던 자들은 전율이 일었다.
말로만 전해 들었던 ‘화산혈마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과장과 거품이 섞이면서 불신의 골이 깊어졌었다. 그러나 이 싸움으로 왜 발언자들이 그 싸움에 강한 인상을 받았는지에 대한 이유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카각!
움직임의 결을 따라 형성되는 핏빛 검기들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천무경의 기운을 갈라놓았다. 검격이 연달아 부딪치면서 천무경이 대등하게 맞서는 형국이었으나 위협적인 검격은 진도건의 검 끝에서 나왔다.
그의 호신강기를 믿고 마음껏 공세를 퍼붓는 진도건의 검격은 벌써 몇 번이나 천무경의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끄떡도 하지 않는 천무경의 경이적인 무공에 경외를 표하는 한편으로 왜 진도건의 검이 주목을 받았는지에 대한 대목도 그대로 드러났다.
누구보다 이들의 격전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구치상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나에게 이만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오절 외에는 찾기 어려울 거로 생각했는데……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젊은 청년에게서 새로운 지평을 엿볼 줄이야. 저것은 나도 도달하기 어려운…… 그런 경지다.’
단순 강함으론 천하오절 외에도 몇 더 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진정한 무학의 깊이를 가늠해본다면 일평생 칼 한 자루에 미쳤던 구치상으로선 천하오절 가운데서도 경이적이라 여기는 천무경과 강정학 외에 또 언제 감탄을 자아낸 자가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였다.
진도건을 주목하는 이유로 어디 화산혈마사뿐이랴?
이 창천단에는 북부 전쟁에 참전했던 인물들도 있었으니 영은성과 최현걸뿐만 아니라 다른 한쪽엔 청명도 무당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창천단에 남아 있었다. 천무경과의 비무는 흑풍신마와 펼쳤던 대결까지 떠올리기에 충분했고, 새롭게 보게 된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창무대 위로 얽혀 들어갔다.
텅!
일순간 틈을 노리고 뻗은 천무경의 좌수에 군자검의 칼날이 붙잡혔다. 흑검의 날카로움도, 혈마진기의 거친 기류도 천무경의 손아귀 안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
천무경은 단숨에 내공을 방출했다.
파바바방!
격렬하게 터져 나가는 폭음과 함께 진도건이 뿜어내던 검기들이 모조리 흩어져 버렸다. 천무경도 그 이상으로 힘을 쓰지 않은 채 여전히 왼손으로 검을 봉한 채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능력을 갖췄고 상당한 내공도 얻었지만, 아직 그 칼날이 갈리지 않은 느낌이구나. 하긴 지난 3년의 세월이 가볍지만은 않았겠지.”
이 비무를 모두 지켜보고 나서 천무경의 촌평을 들은 사람이라면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천무경의 기준에서는 그러했다.
천무경은 들고 있던 흑검을 들었다. 검신을 바라보았을 때, 음각되어 은연중 거무튀튀하게 빛나는 ‘숙녀’라는 글씨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칼날을 쥐고 있던 손을 틀어 진도건의 흑검 검신에 새겨진 ‘군자’라는 글씨도 보았다.
천무경은 피식 웃으면서 진도건의 검도 손에서 놓아주고 숙녀검도 그에게 던져 건네주었다.
“군자숙녀, 한 쌍의 흑검이라. 잘 어울린다.”
진도건이 숙녀검을 받아들며 미소를 지었다.
두 자루 흑검을 타고 흐르는 열기와 피부에 맺힌 땀방울이 격동하는 심장 박동만큼 비무의 격렬함을 더 잘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천무경의 웃음과 그 말을 들은 진도건으로서는 이 두근거림이 비무의 격렬함 때문인지,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의문이 있었다.
천무경은 다가와 진도건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의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잘 돌아왔고, 내 딸 잘 부탁하마.”
천무경은 진도건을 지나쳐 창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천서은에게 다가가 안아주었다.
“인사들 나누고 맹주전으로 오거라.”
“네.”
천무경은 다음으로 구치상의 어깨를 툭 치면서 눈빛을 주고는 자리를 조용히 떠났다.
천서은은 즉각 올라가 진도건에게 다가가는 사이 구치상은 모인 창천단 인원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면서 진도건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내일 오전 진시(辰時) 쯤에 연무장에 와 십수논검(十數論劍)에 참여해 주겠나?”
“십수논검이 뭡니까?”
“최대 10수 정도 안에 초식을 겨뤄 보는 걸세. 자네에게 부탁할 건 각지에서 이름 좀 날렸던 창천단의 무사들 몇 사람 기를 꺾어주면 되네.”
“단주님이 지휘하시는 데 그런 게 필요합니까?”
“글쎄, 내 훈수가 어떤 이들에겐 벽에 막힌 것처럼 들리지 않아. 아마 내 이름값에서 비롯된 간극 때문일 테지. 내 보기에 자네 정도면 딱 적당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진도건과 구치상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최현걸은 개방 방주 용두형에게 다가가 오랜만의 사제상봉을 이루었다. 영은성은 창천단에 합류한 화산파 사숙들이 있어 해후(邂逅)의 기쁨을 나누었다. 한쪽에 있었던 청명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천서은에게 인사를 건넸다.
“천 소저.”
“청명 도사도 창천단에 합류했네?”
“예. 좀 더 강호의 경험을 쌓는 것도 필요하고, 마교의 발호를 잠재우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 싶기에……. 저, 전장에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게 되어 아쉬웠습니다.”
“아, 그랬었지. 미안해.”
“아닙니다.”
청명은 고개 숙여 대답하면서 진도건을 흘끔 쳐다보았다. 구치상과 대화하는 중이었는데 ‘십수논검’의 이야기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청명은 다시 인사를 하고는 진도건을 지나쳐 창무대를 내려갔다.
이 장소에서 어떤 인연도 찾을 수 없는 야율균은은 진도건과 천서은에게 시선을 주고 있다가 청명의 태도를 볼 수 있었다. 가만히 있던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창무대에 올라가 천서은에게 다가갔다.
“너도 한눈팔지 않게 조심해야겠는걸?”
천서은은 처음엔 그녀가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장 자리를 떠나던 청명이 뒤를 돌아보면서 다시 눈을 마주쳤을 때, 비로소 그녀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이었는지 이해했다.
“쓸데없는 충고네요.”
“글쎄다. 도사란 족속이 어떨진 모르겠지만, 우리 초원의 무당들은 혼인하지 못하는 신분임에도 어린 여자들에게 찝쩍거리는 모습을 한두 번 봤어야지. 저 도사 무당파잖아?”
“하, 그 ‘무당(巫堂)’이 아니라 ‘무당(武當)’이에요. 억양이 다르다고요?”
“그래? 에이, 김샜네.”
천서은의 설명에 그녀를 약 올리러 올라왔던 야율균은의 표정이 다시 심드렁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천서은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소 고요한 분위기를 간직하던 맹주전은 오랜만에 사람으로 북적였다.
천무방에선 맹주전의 주인인 천무경을 비롯하여 그의 총관으로 일을 하게 된 주유현 그리고 진도건과 천서은이 들어왔다.
두 명의 부맹주와 함께 홍두형의 제자인 최현걸과 진도건과 가까운 인연이 되어버린 영은성도 동석했다. 창천단주 구치상과 빈객으로서 야율균은도 함께 자리하여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으니 평소 하인들을 제외하면 혼자서 시간을 보냈던 때와 비교해선 확실히 북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푸짐한 만찬을 즐긴 열 명은 빈 그릇을 치우고 정리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미 진도건, 천서은과는 나름의 합의를 창무대에서 끌어냈기에 천무경은 조금 편한 마음으로 야율균은에 시선을 던졌다.
“흑풍신마의 사촌 여동생이 맞소?”
“그래요.”
“듣기엔 강호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들었소. 그 뜻을 의심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흑풍마종 최후의 생존자라면 마교로 돌아갔을 때, 대우를 받을 수도 있을 텐데.”
“……하나로만 단정 지을 수 없겠죠.”
“하나로만?”
“마교도 어쨌든 사람이 모인 집단. 자기들의 분파 최후의 생존자에게 아량을 베풀어 줄 자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반대로 패배한 죄를 물어 사형시킬 수도 있겠죠. 혹은 다른 식으로 이용하다 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요.”
“흐음. 그럼 그대의 생각은 두 번째나 세 번째에 가까운 것이오?”
“그런 것도 없잖아 있지만, 결정적으로 저희의 뿌리는 요국에 있지 천마신교에 있지 않아요. 어쩌다 선대가 천마신교에 연이 닿아 마공을 익히게 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지만, 우린 언제나 요동과 몽골 초원을 달렸지 그들을 한 뿌리로 여겼던 적은 없어요.”
“소속감이 약했단 말이로군.”
홍두형이 이해가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경은 가만히 야율균은이 가진 능력을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가진 마기는 범상치 않아 상당한 고수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진도건과 천서은에게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소저의 실력은 어느 정도라고 볼 수 있소? 흑풍신마 야율재와 비교했을 때는 어떻소?”
“야율재와 비교하면 당연히 부족하죠. 하지만, 저 두 사람을 상대로 마상 싸움이라면 둘 다 감당할 수 있고 두 발을 딛고 겨루는 거라면 하나는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야율균은이 영은성과 최현걸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했다.
“으이씨, 붙어 볼래?”
최현걸이 발끈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딱!
야율균은도 발끈해서 받아치려는 찰나 홍두형이 지팡이 삼아 들고 다니는 신물 타구봉(打狗棒)이 번쩍이며 최현걸의 뒤통수를 때렸다.
“이 한심한 놈아, 둘이 상대해서도 못 이겼다고? 품에서 떠나보냈더니 제대로 나태해졌나 보구나. 떠나기 전까지 너와 영은성은 내 아래에서 지옥훈련을 좀 해야겠다.”
“저, 저도 말입니까?”
“노부의 개몽둥이맛을 봐야 정신 차릴 게 아니냐?”
홍두형의 불호령에 영은성과 최현걸은 원망과 난감한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최현걸이 다시 한번 발끈했다.
“사부님도 말 타고서는 저 여자 못 이길걸요?”
“뭐 이놈아?”
딱!
“윽!”
다시 한번 최현걸의 눈앞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뇌를 관통하는 듯한 고통에 신음하며 머리를 싸매는 사이 홍두형이 야율균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내 제자가 그동안 꽤나 무례했을 것 같은데 사과드리네.”
“후후, 괜찮아요. 오히려 제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 송구하네요.”
야율균은의 태도가 중원의 것과 사뭇 달랐지만, 그래도 뭔가 예의를 차리려 하는 노력이 엿보이자 홍두형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