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32화 (132/432)

132화 - 제26장. 다시 화산혈마사(華山血魔史) (2)

“창무대?”

최현걸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에 희미한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다. 그리고 그런 그를 일깨우려는지 군중들 속에서 곧장 반응이 터져 나왔다.

창무대.

영천성 내에는 영강(潁江)이 가로질러 흐르는데 북서쪽 강폭이 넓은 지점에는 작은 섬이 떠 있었다. 그곳 가운데의 나무들을 베어내고 넓은 단을 세웠으니 창천단만 들어가 정기적으로 비무를 벌이는 곳이었다. 그곳의 비무 방식은 과거 사패련 때 비무제를 했던 것처럼 내공 사용은 최소한으로 제한한 채 목검 등으로 겨루는 것이었는데 이는 무공 정진에 있어서 외공의 중요성도 상기시키기 위한 규칙이었다.

“설마 맹주님이랑 화산에서처럼 싸우려는 거 아냐?”

군중들 일각에서 흘러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이 끌어낸 관심은 지대했다. 중구난방 의견들이 오고 가는 사이에 대두된 천무경과 진도건의 비무는 창천단 무인들에게 솔깃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그리고 그 웅성거림을 듣는 천서은은 갑자기 걱정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께서 왜 거기로 오라고 하셨는지 아시나요?”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네.”

그렇게 대답했지만, 흥미로워하고 있다는 감정을 엿볼 수 있는 표정.

모두가 기대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천서은과 진도건만이 부담을 갖게 되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3년 전 천무방이 사패련으로 많은 군중을 끌고 입성했던 것처럼 진도건과 천서은도 졸지에 군중들을 이끌고 창무대로 향하게 되었다. 그랬던 기억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던 그녀가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네요. 도건을 아버지께서 데려왔고 이후에 절 비롯한 사람들을 데리고 비무제 참가를 위해 사패련으로 갔었죠. 이번엔 제가 도건을 아버지와 비무를 위해 창천맹으로 데려가는 꼴이 되어버렸네요. 그저 말 몇 마디 세게 하실 줄 알았는데 이러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마간의 후회 섞인 말이었지만, 그녀도 피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 봐야 알 텐데, 뭘.”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진도건도 주변 분위기를 통해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간 진도건은 창무대 위에서 뒷짐을 지고 선 천무경의 모습을 보고 더는 이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창무대 주변엔 십수 개의 목검들이 둘러서 널브러져 있었고 천무경은 이미 목검 한 자루를 뒷짐 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진도건과 천서은을 보자마자 한 마디 던졌다.

“진도건, 목검 한 자루 들고 올라오너라.”

단도직입적인 말에 천서은은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잠깐 저랑 얘기 좀…….”

“서은이는 가만히 있거라.”

천무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딸이 올라오려는 걸 제지했다. 그 상황에 진도건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에 찬 군자검을 풀어 천서은에게 건네주었다.

“걱정하지마.”

진도건은 그녀를 다독여 주고는 목검 한 자루를 들고 천천히 창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가 올라가는 속도에 맞추어 사방은 어느새 창천단 무사들 수백 명이 가득 차 관중이 되고 있었다.

진도건이 천무경을 마주 보며 섰다. 그의 모습은 과거 그때와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건장한 체격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얼굴 주름이 줄어든 것만 같은 용모는 그의 무공이 갈수록 깊어져 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듯했다.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좌중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천하오절, 천하제일인, 파천무봉, 창천맹주…….

그를 나타내는 수식어 어느 하나도 그를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상징성을 온몸으로 보여 주는 남자였다.

“제자 진도건이 방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진도건은 목검을 놓고 천무경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렸다.

정식으로 사제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진도건의 몸 안에 내재한 파천신공의 흐름을 심어준 것은 다름 아닌 천무경이었다. 실질적인 초식들의 가르침은 없었을지라도 파천신공으로 인해 얻을 수 있었던 힘의 크기를 생각해 본다면 조강선 다음의 스승으로 여김에 부족함이 없었다.

“일어나거라.”

시간이 흘러도 고개를 들지 않는 진도건의 모습에서 천무경은 그가 다하고자 하는 공경의 예를 느낄 수 있었기에 내심 만족했다.

진도건은 주의 깊은 몸짓으로 바닥에 놓아둔 목검을 들고 일어나 천무경을 마주 보았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이제는 진도건으로서만 거기에 서 있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네 모습은 내가 본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천무경이 보기에 진도건의 모습은 혈마로 폭주했을 때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다. 눈빛에 이지(理智)가 있고 없고의 차이만 있을 뿐, 오히려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의 붉은색은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색을 띠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직접 격돌한 당사자로서 그의 시선은 정확했다.

“그때는 제 몸을 빼앗겼었다면 지금은 온전히 제가 쥔 상태에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때처럼 폭주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확신하느냐?”

“자기 자신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다만 만약의 사태가 다시 벌어진다면 기꺼이 칼을 받겠습니다.”

“나에 대한 원망은 없느냐? 내가 널 죽음으로 몰고 갔는데.”

“제 몸을 혈마에게 빼앗겼지만, 전 모든 걸 보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방주께서는 딸을 찌른 절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폭주하는 절 막아 세워야 할 책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진 데에 대한 책임을 저도 갖고 있으니 원망보다는 나약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만이 있습니다.”

진도건은 대답을 하면서 망설임 없었다. 지난날의 걱정과 후회 등은 이미 천서은과 만남에서 모두 털어 버린 뒤였다.

만약 첫 만남이 천서은이 아니라 천무경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발언할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천무경은 진도건이 자신의 앞에 서기 위해 들고 온 태도를 높이 평가했다.

“서은이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대충 얘기는 들었다만…….”

“……서은이를 사랑합니다. 그러니 호위무사 직은 내려놓고 죽을 때까지 곁에 있을 생각입니다.”

천무경은 말꼬리를 일부러 흐렸다. 진도건의 분명한 답변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진도건은 거기에 대해 응답했다.

천무경이 피식 웃었다.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느냐?”

“허락을 받아내 보라고 목검을 들고 오라 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푸하하하! 그걸 그렇게 해석한단 말이냐?”

“화산에서의 일. 지난 3년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감내해 왔습니다. 그 감정이 저만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서은이도 그러했더군요. 그렇다면 서은이의 아버지 되시는 방주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에 대한 싫은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화산에서 폭주하는 저를 죽음으로 멈추려 했던 결심에 어떤 부담이 있으시지 않았을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더냐?”

“가족에게만큼은 누구보다 진심이시지 않습니까? 항상 들고 다니시던 술 든 호로병도 안 들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저에게든, 서은이에게든 그 결심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있으실 터. 이 자리는 그 응어리를 풀어내는 좋은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흐음.”

천무경은 차분한 시선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지난 3년. 사람의 인생을 통틀어서 본다면 짧은 시간인데, 그사이에 상상하지 못했던 평지풍파(平地風波)를 목숨으로 겪었으니 바뀌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었겠지.’

천무경은 손에 든 목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진도건을 보았다.

“그런 이유로 목검을 들라고 했던 건 아니지만, 너의 말처럼 좋은 자리가 되긴 하겠구나. 그럼 준비는 되었느냐?”

천무경의 물음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다. 네 검이 썩었는지 살아 있는지 시험해 보마. 만약 날 이기지 못한다면…….”

천무경은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즉석에서 생각한 발언이었기 때문에 어떤 어휘를 사용할지 정리할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곧 생각을 정리한 천무경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날 이기지 못한다면 내 딸과의 사이를 허락하지 않겠다.”

“감히 받아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데 있어서 한 번도 소곤거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크지 않은 소리는 아니었지만, 이곳에 모인 창천당원들과 기타 관계자들 모두 뛰어난 무공을 가진 고수들이었기에 듣지 못할 리 없었다.

그들의 대화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았다.

천무경은 이미 마음으로 진도건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와 딸의 관계가 이미 깊은 관계로 발전했음을 파악하고 있었고, 천무경도 진도건이란 청년을 인정하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내심 인정하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것 사이엔 엄연한 차이가 있는 법이었으니 이 자리를 물릴 생각이 없었다.

그것과 별도로 천무경은 진도건과 천서은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어느 정도 고민을 끝내놓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갖는 강호에서의 지위, 명성 등을 명확한 위치에 올려놓는 작업이 필요했다.

천서은은 이미 천무경의 딸이라는 상징성과 사패소룡비무제에서 우승한 상징성이 명확했다.

남은 건 진도건이었으니 정사 가리지 않고 각 문파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 고수들의 관심 속에서 그와의 대화를 통해 관계를 정리하고 이 비무를 통해서 실력을 입증한다면 향후 창천맹이 포석을 놓는 데 있어서 중요한 흐름을 만들기에 주요한 작용을 일으킬 것으로 보았다.

오늘의 비무가 실력을 검증한다는 가치 측면에선 미미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이미 흑풍신마를 제거했으며 그 전쟁까지 종결시키고 돌아왔으니까.

이것은 단지 축제일 뿐이었다.

천무경과 진도건은 격렬하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천무경의 의도가 그러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속에 품은 생각일 뿐, 진도건에게 있어서 이 자리는 시험받는 자리라는 게 명확했다.

진도건의 검격은 단호하고 빨랐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빨랐다.

천무경이 왼팔과 두 다리 모두를 방패처럼 써서 막아내고 있을 정도로 진도건의 검은 훨씬 더 빨랐다.

검기도, 검강도 사용하지 않는 창무대 위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자유롭게 춤을 추는 진도건의 검뿐이었다.

천무경의 검법도 누구 하나 상대할 엄두를 못 낼 정도로 훌륭함에도 그의 사지를 오로지 검 하나로만 상대할 정도의 위력을 선보인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일까?

진도건은 정말 마음 놓고 초심으로 돌아가 원류검결만을 운영할 때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3년 전보다 더욱 빠르고 발전된 형태로 뿜어져 나왔고 천무경의 시선에서조차 신선함을 안겨 주고 있었다.

내공을 억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절제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비무가 격렬해질수록 진기의 흐름을 제어하는 데 집중을 할애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빠악!

두 사람 모두 경력이 일순 목검에 쏠렸고, 부딪치는 순간 일제히 폭발하여 터져 나갔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각각 허공섭물과 염력을 이용하여 손에 새로운 목검을 끌어당겼다.

오오!

그 놀라운 광경에 군중들이 일제히 감탄을 터뜨리는 순간, 두 사람의 격돌이 다시 시작되었다.

빡!

빡!

연달아 터지고 부러지면서 다시 목검을 끌어당기는 일이 반복되었다.

네 번 연속 반복되자 천무경과 진도건은 잠시 비무를 멈추고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천무경은 천서은을 바라보며 외쳤다.

“서은아, 검을 던져라!”

천서은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고, 아버지의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군자검과 숙녀검을 뽑아 두 사람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진도건의 손에 군자검이, 천무경의 손에 숙녀검이 쥐어졌다.

“이번엔 제대로 놀아 보자.”

피처럼 붉게 타오르는 혈마진기와 푸른 벼락을 동반한 파천진기가 동시에 창무대 위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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