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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31화 (131/432)

131화 - 제26장. 다시 화산혈마사(華山血魔史) (1)

“살아 있다는 게 사실이었군요.”

좌영각이 떠나자 여태껏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구치상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맹 내 정무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다만 창천단주로서 언제고 사천으로 출발해야 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어야 했기에 동석했을 뿐, 평소라면 단원들의 수련을 봐주거나 개인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을 터였다.

“뜻밖의 주제에서 구 단주님의 목소리를 듣는군요.”

뜻밖이라고 하기엔 충분히 흥미가 동할 만한 주제였고, 그건 범굉이나 홍두형도 다르지 않았다.

좌영각이 떠나기 전, ‘사람’을 보낸다는 말을 전한 것에 있어서 범굉은 그게 누군지 몰랐기에 천무경에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사람의 이름은 바로 진도건과 천서은이었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진도건이었으니, 그가 일월신마를 상대하고 화산에서 혈마가 되어 천무경과 격전을 벌인 일은 이미 창천맹 내에서도 꽤 알려져 있었다. 물론 그 소문의 결말로 떠올릴 수 있는 건 죽음뿐이었으나 오늘날 살아 돌아와 흑풍신마 처치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비무제에서 그자와 맹주 따님의 무공은 특별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네 사람 모두 진도건과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었다.

천무경은 두말할 필요 없이 천무방의 방주로서 그리고 혈마의 대적자로서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고, 범굉은 화산혈투 현장에 있던 사람이었기에 혈마 진도건에 대한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홍두형은 화산 장문인 묵허자의 도움으로 조강선과 함께 은거 중인 진도건을 찾아가 본 적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이지를 상실하여 조강선에게 치료받을 때였고, 두 번째는 이듬해에 진도건이 몸을 꽤 회복한 뒤였다. 그때 검을 다루는 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아 제자인 최현걸을 보내게 되었다.

구치상은 비무제를 지켜보면서 우승 후보로 첫 손에 꼽히던 양자성을 패퇴시키던 진도건의 검술에 큰 인상을 받았었다. 게다가 혈마가 되어 천무경과 혈투를 벌였다는 소문까지 덧대어져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흑풍신마를 상대로 전장에서 활약이 컸다고 하니 지금은 어느 정도 실력인지 궁금합니다.”

“흐음, 그렇겠지.”

천무경은 팔짱을 끼면서 등받이에 기대었다. 비스듬히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눈앞에 화산에서 혈마로 변해 버린 진도건과 혈투를 치렀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대사님.”

“예, 맹주님.”

“정무청에서 중원 각지에 벌어지는 사안들을 접하고 이를 논의하여 해결도 하고 그러고 있으면 세상일이라는 것, 손에 잡힌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내 손으로 죽음에까지 몰아넣었던 녀석이 다시 살아서 내게 돌아오고 있는 걸 보면 과연 나의 선택들이 하늘이 선택한 것과 얼마나 맞아떨어지고 또 빗나가는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아미타불. 사람의 이치가 하늘의 이치에 얼마나 성립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고통(苦)을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맹주의 고뇌(苦惱)는 범용한 일이나 열반(涅槃)으로 가는 바른길은 아니니 크게 마음 쓰지 마시지요.”

범굉대사의 설교가 원론적이긴 하나 핵심을 찌르는 부분이 있어서 천무경이 듣기에도 위안이 될만했다. 그것과 별도로 무공에 대해선 그런 열반과 가까운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하는 화경에 도달했으면서도 일상적인 인사(人事) 속에서의 고민거리에 울고 웃게 되는 건 완전자(完全子)로서의 길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깨닫게 했다.

이제는 천하제일인이라 칭송받는 천무경도 가까운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에선 평범한 사람들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맹주도 인격자시긴 합니다.”

“허허, 갑자기 듣기 부끄러운 칭찬을 하십니까?”

홍두형의 말에 천무경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 내가 본 진도건을 본 시간은 무척 짧지만, 그래도 내 사람 보는 안목 하에서 괜찮은 청년인 건 맞소. 하지만, 어쨌든 혈마화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던 사람이고 또 맹주 손으로 목숨을 끊기 직전까지 갔다면 그가 혹시 원한을 갖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은 가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런데 따님에게 운을 띄워서 만날 수 있도록 보낸 것은 무슨 믿음이었습니까?”

“의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제가 천무방을 맡으면서 스스로 세운 원칙 중 하나가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정직해야 만이 신의(信義)가 뒤따른다는 겁니다.”

“천무방을 성장시킨 비법을 공개하시는 겁니까?”

홍두형이 짓궂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허허허! 이런 게 어디 공개할만한 비밀이겠습니까? 다만 이런 것은 있습니다. 만약 나란 사람이 진도건을 대할 때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었다면 홍 방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 녀석을 의심부터 했을 것입니다. 녀석이 제게 가질 신의란 조금도 없었을 테니까요. 물론 이런 선택에 대한 책임은 선택한 자의 몫. 만약 녀석의 인격이 비뚤어져 나중에 절 향해 칼을 겨눈다면…… 제 부덕의 소치겠지요.”

홍두형이 범굉대사의 팔을 툭 건드렸다.

“소림사 불상 치워버리고 천 맹주 조각상 하나 깎아서 올리는 게 어떻소?”

“으흠!”

범굉대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홍두형을 쏘아보았다. 홍두형은 범굉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킬킬대며 웃었다.

천무경 아래서 천무방이 사파제일방임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에게 신망이 제법 있었던 것은 그들이 실리적일지언정 위선적인 행태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천무경이 이런 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아내 주약화의 영향이 가장 컸으니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을 불확실한 가능성에 걸어버린 선택은 그가 자신의 기준에 대한 확신이 얼마나 강한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과연…….’

천상 무골인 구치상의 눈에 그런 천무경의 모습은 존경심을 품을 만했다. 칠성파의 위상이나 천하오절이라는 개인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또 그의 나이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창천맹에 상주하여 돕겠다고 청하고 창천단주까지 맡은 건 그런 마음에 기반한 것이 컸다.

“검림에 보낸다고 하신 건 강정학 총수에게 선보이고 싶기 때문입니까?”

“검에 관련해선 나보다 일가견이 있다 할 수 있으니 녀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따로 또 전할 소식이 있고…….”

천무경이 말꼬리를 흐렸다. 때마침 청백색 무복을 입은 창천단 무사가 정무청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맹주님, 천서은 공녀 일행이 영천성에 곧 들어선다고 합니다.”

“후후후! 구 단주, 그들의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천무경이 구치상에게 얘기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말입니까?”

“창무대(蒼武臺).”

* * * *

창천맹주의 딸 천서은과 화산혈마사(華山血魔史)라고도 불리는 짧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진도건이 온다는 소식은 이미 창천단 안에도 퍼져있었다. 그렇기에 천여 명의 창천단 안에서도 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은 그 얼굴을 보기 위해 성문 쪽에 나와 있었다.

성내 치안을 담당해 주는 그들이 그렇게 나와 있자, 일반 백성들도 무슨 일인가 하면서 같이 군집하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서 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절색이라는 천서은의 미모에 대해 미리 예찬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진도건은 피에 젖은 귀신같은 몰골을 하지 않을까 하며 설레발을 떠는 자도 있었다. 사패련 비무제에서 그들을 직접 봤던 일부 사람들만이 옛날 기억에 의존해서 이런저런 예상을 내놓기도 했다.

성문에 거의 도착해가는 진도건과 천서은에게도 성 내부의 그런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사패련 갔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래도 그때는 천무방 깃발을 들고 일부러 군중들을 모아가긴 했었는데.”

“그랬었지.”

“하지만, 이번엔 주인공은 형님과 형수님 아니겠소?”

“주인공은 무슨.”

최현걸의 말에 진도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는 그런 것보다는 천무경을 곧 만날 생각 때문에 조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어떤 태도를 보이실지, 어떤 말을 하게 될지 그로선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하늘의 운명을 기다리는 느낌과 같달까?

성문으로 들어서자 길 좌우로 모여든 군중들의 모습이 보였다.

“창천단까지 왔네.”

유일하게 창천맹에 와 본 적이 있던 최현걸이 모여든 무사들의 통일된 청백의 무복 차림을 보고 말했다.

여기저기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천서은의 미모는 사내들의 혼을 빼놓기 충분했기에 예상된 반응이었지만, 진도건의 적발적안의 용모는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괴물 같은 외모를 갖진 않았지만, 그 붉은 머리카락과 혈마라는 단어가 결부되면서 그를 바라보는 무림인들의 눈빛엔 묘한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영은성이나 최현걸의 용모와 차림새는 그들에 비하면 평범해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야율균은이 북방계 미인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어서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었다.

잠시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던 그들은 곧 말을 멈춰야만 했다. 군중들의 소란이 일제히 잠잠해졌는데 바로 창천단주이자 천하오절인 구치상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 등은 모두 말에서 내려 그를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를 알아본 천서은이 입을 열었다.

“구치상 창천단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오랜만이다. 비무제에서 잠깐 봤었지?”

“예.”

“적발의 청년이 진도건이겠군.”

“진도건이 구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구치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찬찬히 그의 모습을 뜯어보았다.

‘확실히 비무제 때와 느낌이 사뭇 다르군. 그때는 숨은 진주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절정고수로서의 면모가 다분해.’

구치상은 다른 사람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익숙한 얼굴도 있군.”

“소개 최현걸이 창천단주님을 뵙습니다.”

“개방주께서도 와계신다. 이쪽 도사는?”

“화산의 영은성이라고 합니다.”

“묵허자가 아끼는 제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제 스승님이십니다.”

“역시. 자네에게서 올곧은 기백이 느껴지는군. 이쪽 낭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

“야율균은이에요.”

야율균은이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구치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일행 모두를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참 재밌는 조합이군. 아름다운 여걸과 혈마가 될 뻔한 사내, 도사와 거지 그리고 적과의 동침을 하는 여인이라.”

야율균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왕 범의 아가리로 들어왔으니 기습보단 선전포고 정도는 해 주시죠. 그래야 나도 후회 없이 활개를 칠 수 있을 테니.”

“허허. 그럴 일 없을 테니 편하게 머물다 가시게. 그러나 이 성내에 간자가 없다고 볼 수는 없으니 주의는 해야 할 걸세. 물론 창천단이 경호는 해 줄 테니 걱정은 덜어도 좋겠지만.”

야율균은은 일그러졌던 미간은 풀었으나 다소 굳은 표정으로 구치상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간자’라는 것은 마교의 첩자를 일컫는 말일 터였다. 그들이 배반자의 존재를 인지한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치상은 다시 시선을 진도건과 천서은에게로 돌렸다.

“맹주님께서 찾으시네. 거기까지 내가 안내를 해 주겠네. 특히 진도건 자네와 하고 싶은 얘기가 많으신 모양이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엔 약간의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그런 진도건에게 천서은이 얼굴을 비추며 미소를 지었다.

옆에 있던 최현걸이 손을 들었다.

“맹주전이나 정무청으로 가는 것 아닙니까? 단주께서 직접 여기까지 행차하신 게 조금 의외라서.”

“아니네, 우린 창무대로 갈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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