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129화 (129/432)

129화 - 제25장. 창천쌍검(蒼天雙劍) (5)

해 질 무렵이 되면서 이제 막 녹음의 옷을 입고 있는 나무들 사이로 황혼이 부서졌다.

천무전 뒤로 높게 솟아오른 절벽 위에는 천가를 비롯한 천무방과 깊은 인연이 있었던 주요 인물들의 묘가 함께 안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노지신과 나자룡의 시신도 함께 묻어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각각 비석 앞의 향로에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천준과 함께 백두기, 장태환, 서일헌이 올라와 지켜보고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때때로 시체조차 챙기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야산의 이름 없는 한 줌 흙이 되어 버리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 측면에서 노지신과 나자룡의 시신이 동료들의 손에 거두어져 그 영령을 위로할 수 있었던 건 그들에게 큰 행운이고, 남은 동료들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천서은의 어머니인 주약화의 묘 앞에도 섰다. 그리고 진도건만 조용히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천서은의 표정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천가의 선대까지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발걸음을 돌려 천준과 장로들 앞에 섰다.

장태환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진도건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오전보다는 표정이 많이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노 장로와 나자룡을 죽인 일월신마가 널 그 꼴로 만든 후에 맹주님 손에서도 살아 돌아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군.”

“제 잘못이 큽니다.”

“흥, 안다. 그래, 흑풍신마를 네가 끝냈다고 들었다. 일월신마는 흑풍신마와 비교하면 어떠냐?”

장태환의 물음에 진도건은 잠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3년이라는 여백이 있었으니 판단하기에는 이르지만, 일월신마는 본질적으로 더 기괴하고 강력한 면모가 있었다.

“일월신마가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넌 그자와 다시 만나면 또 패배하겠구나.”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흥! 입만 살았구나.”

장태환이 몸을 휙 돌리고는 산에서 내려갔다. 그 모습에 백두기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항상 정진할 수 있도록 해라. 나와 장 장로가 환도신마를 만나 패퇴시켰지만, 죽이는 데 실패했다. 아마 다시 돌아오겠지.”

“그럴 겁니다.”

“마종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 보니 제각각 마공들이 괴이하기 짝이 없어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넌 그중 둘이나 상대했으니 나보다 더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이가 있어서 위에 남아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너와 서은이는 아직 앞길이 창창하니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우리보다 더 큰 역할을 맡아줄 수 있어야 해.”

“벌써 부담을 주고 그러세요.”

“농담이 아니다. 우리도, 마교도 조만간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너희 두 사람의 재능은 내 경험 속에서도 단연 특별하다. 절대 자만하지 마라. 정사가 연합하여 창천맹을 세웠다. 허나 정파는 아직 고수가 많지 않고, 사파는 3년 전의 일로 꽤 큰 충격을 받았다. 너희 같은 아이들이 빨리 치고 올라가야 해.”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두기가 진도건의 어깨를 다독였다.

“내일 바로 떠날 것이냐?”

천준이 천서은을 보며 물었다.

“네, 그렇게 하려고요. 같이 온 사람들도 따분해하는 것 같고요.”

“그래, 맹주님께서 너희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아마 또 다른 임무를 주실 것 같다. 단단히 준비하고 가거라.”

“네, 삼촌.”

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백두기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발을 떼지 않고 진도건과 천서은을 두루 바라보았다.

“맹주께서는 너의 생존도 꽤 일찍 눈치채신 모양이다. 그랬으니 서은이 널 북으로 올려 보내신 거지. 가거든 약혼(約婚)을 하겠다 하여라.”

“할아버지!”

백두기가 씩 웃으며 두 사람의 허리춤에 매달린 군자검과 숙녀검을 힐끗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창천맹의 깃발 아래 모인 중원의 무림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연인 검객이겠구나. 창천쌍검(蒼天雙劍), 어떠냐? 내일 개방과 하오문에 미리 이 별호를 퍼뜨리도록 일러둬야겠다. 하하하!”

백두기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진도건과 천서은은 싫지는 않은 듯 멋쩍게 웃었다. 세 사람도 하산하기 시작했다. 내려가면서 백두기는 두 사람에게 당부를 멈추지 않았다.

“천하를 넓게 경험하여라. 언제나 침착할 것이며 냉철해야 한다. 위기를 맞닥뜨리거든 오직 손에 든 검과 서로를 믿음으로써 타개하여라. 너희의 명성이 더 높아져 다시 내 귀로 소식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 * * *

뜨거운 물에 목욕 재개 후에 정갈하게 도의(道衣)를 입은 영은성은 필요한 짐을 마저 챙기고 방에서 천천히 나왔다.

밖에는 야율균은이 나무에 기댄 채 앉아 있었는데 표정엔 지루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벌써 나왔습니까?”

“지루해.”

“후후, 그래도 오늘은 떠나지 않습니까? 천무방에 왔으니 아무래도 진 대협과 천 낭자가 바쁠 수밖에 없었죠.”

“최 거지는 왜 안 나와? 빨리 좀 출발했으면 좋겠는데.”

야율균은이 조용히 투덜거렸다. 그러자 방문이 드륵 열리며 최현걸이 나왔다.

“내가 거지는 맞는데, 너무 거지거지하지는 맙시다. 듣는 거지 괜히 기분 나쁘네.”

최현걸이 쏘아보며 투덜거리자 야율균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맞은편 쪽을 슬쩍 가리키면서 얘기했다.

“여기서 저렇게 꽁냥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심통이 나겠어? 안 나겠어?”

최현걸은 야율균은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슬쩍 보았다. 그곳에선 천서은이 진도건의 옷매무새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미소를 주고받고 있었다.

“킥킥! 이곳에 있는 동안 마음에 드는 남자는 못 찾았소?”

“그러게. 이 정도 남탕에 잘생긴 사람 찾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영 도사가 제일 낫던데?”

야율균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영은성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을 받은 영은성은 당황하여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최현걸이 킬킬대며 웃었다.

야율균은은 썩은 표정과 함께 콧방귀를 뀌었다.

“흥! 사내구실도 못 하는 놈한테는 관심 없으니 걱정 마라.”

“내, 내가 도가 수행 중이라 여자를 멀리하는 것이지 구, 구실은 충분히 할 수 있소이다.”

“우리 영 도사야, 그리 주장할 거면 화산으로 돌아가서 속가제자로 살겠다고 고하고 와서 얘기해라. 흐흐흐!”

“넌 쓸데없는 농담 좀 하지 마라.”

영은성과 최현걸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야율균은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강호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무작정 이들을 쫓아오긴 했으나 곧바로 진도건과 천서은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도 들뜰 수밖에 없었다.

벌써 27세로 혼기가 충분히 찬 데다가, 흑풍대에서 한굴렬과의 혼약 얘기가 오고 간 게 불과 두 달여 전이니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젠장, 또 그 자식 얼굴이 떠올라 버렸네.’

하필 한굴렬의 추레한 얼굴이 흐릿하게 눈앞에 떠오른 야율균은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엉덩이를 탁탁 쳐서 옷에 묻은 흙먼지와 함께 털어내었다.

사랑채 정원을 나오는 세 사람까지 모이자 서일헌은 하인들을 시켜 말을 끌고 오게 했다.

“다섯 명이라 일행도 가벼우니 부지런히 간다면 이틀 후에는 창천맹에 도착하겠군요. 그리고 맹주님께는 미리 전서를 띄워 놨습니다.”

“고맙습니다. 총관님.”

천준이 천서은에게 다가와 서신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건 맹주님께 드리는 서신이다. 직접 전해 주어라.”

“뭐예요?”

“새로 개편했던 4개의 당 조직 구성이 완료되었다는 보고다. 수련 일정도 두 달 후면 완료되니 그 뒤로는 언제 출정해도 상관없다는 말씀을 드리거라.”

“아버지께서 든든해 하시겠어요.”

“그러셔야지.”

푸히힝-!

“워어!”

말 울음소리와 진정시키려는 목소리들에 뒤를 돌아보니 야율균은이 어느새 말에 올라타 앞발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요란을 떨면서 천서은을 흘끔 쳐다보는 건 어서 떠나자는 무언의 시위였다.

천서은은 피식 웃고는 마중을 나온 사람들에게 포권을 취하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저흰 출발해 볼게요.”

“조심히 가거라.”

진도건과 천서은이 곧장 말에 오르자 야율균은은 말머리를 돌리며 휙하고 먼저 출발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심통 맞은 눈으로 쏘아본 천서은은 뒤이어 출발했다. 그리고 차례로 진도건과 영은성, 최현걸도 천무방을 떠났다.

출발하면서 천서은은 야율균은을 쫓아가 그녀의 말 옆에 자신의 말을 붙였다.

“떠나니까 이제 속 편해요?”

“편하긴. 앞으로도 둘이 계속 붙어 있는 걸 볼 텐데?”

“아아? 천무방이 불편한 게 아니라 저희 때문에 투덜거렸던 거였어요?”

“걱정하지마. 내 혈족이 모두 네 연인의 검에 죽었는데, 품을 정 따위 티끌만큼도 없어.”

“어머! 누가 걱정이나 한대요?”

“어머? 일부러 보란 듯 찰싹 붙어 있었으면서?”

최현걸은 두 여자 사이에 오고 가는 말과 함께 묘한 기 싸움을 느꼈다. 그는 진도건을 흘깃 보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씩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아니오, 그냥 형님의 미래가 조금 걱정이 되어서.”

“하하하.”

짓궂은 표정을 하는 최현걸을 보며 진도건이 웃음을 흘렸다. 최현걸도 같이 킥킥거리면서 무심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표정이 싹 굳어졌다. 천서은이 미소와 함께 살기 띤 눈빛으로 그의 동공을 푹 찔렀기 때문이었다.

“최 소협,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나요?”

“아, 아닙니다, 형수님. 설마 그럴 리가요? 하하하.”

“흐음……, 그러고 보니 개방의 항룡십팔장은 무림 최고의 강공이라 한다던데요.”

“아! 그, 그렇지요. 하하! 화산에 매화검법이 있다면, 개방에는 항룡십팔장이 있지요. 그걸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면 제가 소개 자리를 맡지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중요한 무공이지요.”

“그럼, 최 소협은 항룡십팔장을 정말 잘 펼칠 수 있겠군요.”

“그럼요.”

“그럼 오늘 밤에 저와 비무 한 번 하시죠. 파천신공과 항룡십팔장 가운데 어떤 무공이 강호 최고의 강공인지 비교해 보고 싶군요.”

“네. 그러시……, 네?”

“그럼 승낙한 걸로 알게요. 후후! 정말 기대되는걸요?”

천서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멍해진 최현걸은 눈앞에 천서은과 흑풍신마가 격돌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흑풍신마의 흑체를 뚫고 푸른 벼락을 동반한 장력을 퍼붓던 그 모습이 자신의 눈앞에 닥칠 것을 생각하니까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저, 저기요, 형수님?”

최현걸이 멋쩍게 웃으며 천서은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 앞만 바라보며 말을 몰았다. 오히려 그에게 시선을 돌린 사람은 야율균은이었다.

“쯧쯧, 한심하긴.”

야율균은이 혀를 차면서 비웃음을 날리자 최현걸은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을 피해 말을 뒤로 물린 진도건과 영은성이 그의 뒷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키득댔다.

그날 구름 한 점 없이 달과 별이 눈부시게 빛나던 밤, 산서지역 남쪽의 태행산(太行山) 근처 산기슭에서는 느닷없는 천둥소리가 자그마치 30여 분 동안이나 울려 퍼졌다.

그 귀신이 곡할 노릇인 현상에 대해 인근의 양성현(陽城縣)이라는 작은 마을에서는 이를 천신이 노하신 줄 알고 벌벌 떨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자정이 되자 급히 소를 잡아 이 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천제사(天祭祀)를 지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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