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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27화 (127/432)

127화 - 제25장. 창천쌍검(蒼天雙劍) (3)

그들 다섯 사람은 바로 조가장을 떠났던 진도건, 천서은 일행이었다. 최현걸, 영은성뿐만 아니라 야율균은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기주부사는 바로 조태번이었다. 그는 종전 직후에 금 황제로부터 기주 부사로 부윤에서 승진하게 되었었다. 그는 진도건 등이 떠난 직후에 과거 화북지방에 큰 피해를 준 흑응대의 이름을 딴 흑응채라는 도적무리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진도건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흑응채 도적무리를 쫓아 이곳까지 이른 것이었다.

이들 여섯 사람은 도적들이 흑응채 울타리 안에 모두 모이길 기다렸다가 들이쳤다.

조태번은 곧장 기주부사의 명패를 들고 호령하여 백성들을 기죽였고 다섯 사람은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흑응채 핵심 인물들을 빠르게 제압하였다.

백성들은 크게 혼란스러워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는데, 조태번의 호랑이 장수 같은 위엄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진도건의 인상적인 모습, 천서은의 기품 넘치는 미모는 곧장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버렸다. 영은성과 최현걸도 정파의 협사로서 기개가 있었으며 야율균은도 한족의 복장을 하고 있었기에 흑풍대, 거란족의 인상보다는 북방계 미녀로 보이면서 두려움을 덜어냈다.

이런 각각의 매력들은 혼란과 두려움을 가진 백성들을 안심시키는데 좋은 바탕이 되었다. 거기다 무림인들을 압도하는 무공은 환상을 보는 듯하니 자연스러운 경외심을 품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적멸당과 팽가 무사들이 합류하고 100명의 병사까지 더해지자 더더욱 일사천리로 일은 마무리되었다.

일부가 그들 손에 죽거나 크게 다치긴 했지만, 나머지는 두려워 항복했기에 조태번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하였다. 처형이나 옥살이 대신에 노역(勞役)과 군역(軍役)을 지우기로 한 것이었다.

조태번의 무공도 대단히 뛰어난 편이어서 일신의 안위를 지키는 데 문제가 없었고 그의 기백은 무림인들도 압도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이 같은 판결을 안도하였다.

“다섯 분이 도와주기로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만 부윤과 창천맹에서도 힘을 실어주었으니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돌아가시는 길 안녕히 가십시오.”

조태번은 진도건 등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의 복귀 행렬은 혹시 모를 반동에 대비해서 팽가에서 협력하기로 하였다.

팽상복은 부친인 팽무양에게서 진도건과 천서은에 관한 얘기를 들었으므로 그들을 직접 마주할 수 있어서 기뻤지만, 행보가 늦어 실력을 견식할 기회를 놓친 걸 크게 아쉬워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적멸당과 함께 곧장 천무방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최종 목적지는 창천맹에 있긴 했었지만, 천무방에 있는 오랜 동료들과 장로들께 안부를 전하는 것이 도리였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무척이나 떠들썩했다.

특히 종남산과 화산에서의 일을 모두 겪었던 장학, 관무영, 장우태, 하소정 등이 느끼는 감회는 더욱 깊을 수밖에 없었다. 노지신과 나자룡이라는 가까운 동료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 매우 컸는데 진도건이 생환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영은성과 최현걸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곧 적멸당원들과 잘 아울렸다.

두 사람이 진도건에게 보냈던 시선이나, 적멸당원들이 천혼당 시절에 진도건에게 보냈던 시선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공감대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달라진 진도건의 분위기도 주목했다.

말투나 화술에 있어서 다소 우회적으로 표현하던 과거에 비해 이제는 좀 더 직접적으로 얘기하게 되었다. 거침없이 표현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장우태의 이런 지적에 대해 진도건의 혈마 폭주 사태를 겪고 나서 그 영향을 받은 것 같다는 해명에 모두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적멸당이 가까이서 본 진도건의 머리카락과 눈썹, 눈동자는 피처럼 붉어서 그들이 입고 있는 무복보다 더했다. 게다가 전체적인 기백이 이전보다 더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으니 그런 성격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인지하게 되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의 관계가 깊어진 부분에 대해서는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우린 그리되실 줄 알았습니다!”

* * * *

그믐달이 중천에 뜬 새벽, 적멸당은 천무방으로 조용히 복귀하였다. 영은성, 최현걸, 야율균은은 외원에 빈객들이 머무는 사랑채의 방을 주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은 내원에 있는 천서은의 별채로 향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녀들을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똑똑똑!

“아가씨! 돌아오셨어요?”

문을 두드리며 하녀 영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깊이 잠들어있던 진도건과 천서은은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철컹거리면서 문이 들썩거렸지만, 문고리가 걸려있었기에 바로 열리지 않았다.

“아가씨?”

“잠깐만 기다리렴.”

다시 부르는 영란의 목소리에 천서은이 대답했다.

두꺼운 이불을 걷고 나니 두 사람의 하얀 나신이 고스란히 드러냈다. 천서은은 진도건을 보며 배시시 웃고는 손바닥으로 그의 등을 때렸다.

찰싹!

“윽!”

“어머?”

요란한 소리에 진도건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고, 밖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영란은 화들짝 놀랐다.

천서은도 소리가 크게 나자 깜짝 놀라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서 옷가지를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강 옷차림이 갖춰지자 천서은이 문으로 다가가 잠가 놓았던 문고리를 풀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 영란은 천서은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근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보지 못했기 때문에 반가워할 만도 했지만, 영란에겐 그건 더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두 손으로 천서은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방 안으로 머리를 들이민 그녀는 붉은 머리 사내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영란은 모시는 아가씨의 방 안에서 들려온 남자 목소리 때문에 정신적으로 공황에 빠졌었다. 그러나 붉은 머리 사내의 얼굴을 놀란 눈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는 익숙한 인상에 더듬거리며 입술을 떼었다.

“지, 진…… 위사님?”

“오랜만이다, 영란아.”

진도건이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영란은 곧장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아아앙!”

영란은 천서은을 옆에 두고도 울면서 진도건에게 달려가 와락 안아 버렸다. 진도건은 천서은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대성통곡하는 영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천서은은 자신을 앞에 두고 진도건의 품에 안겨 버린 영란을 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나 곧 미소 띤 얼굴로 문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지켜보았다.

영란은 곧 울음을 멈추고 진도건에게서 떨어졌다.

“죄송해요, 아가씨.”

영란은 천서은에게 꾸벅 인사를 하며 사과했다. 천서은은 괜찮다는 듯 손짓으로 화답했다.

영란은 그제야 눈가에 눈물을 닦으면서 진도건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외형적으로 너무나 많이 변하긴 했으나 특유의 선명한 인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머리카락 색깔 등이 너무나 낯설긴 했지만, 따뜻한 미소는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남음이 있었다.

영란은 다시 울상이 되었다.

“흐아앙! 위사님 죽은 줄 알고 아가씨께서 얼마나 힘드셨는지 알아요?”

“안다. 그래서 많이 혼났어.”

“이젠 죽을 때까지 떨어지시면 안 돼요! 아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마세요!”

영란이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엄포를 늘어놓자 천서은이 까르르 웃었다.

“어머? 너 진 위사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영란이 기죽지 않고 천서은을 새침한 눈으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한 침대 쓰셔 놓고 절 혼내시면 안 되죠, 아가씨! 진 위사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혼냈을 거라고요.”

천서은은 아차 싶으면서도 영란의 마음 씀씀이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영란은 천서은이 슬픔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곁을 지켜주며 위로했던 사람이었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진도건에 대한 천서은의 마음이 깊었음을 그녀가 모를 리 없던 것이다.

진도건의 등장은 곧장 천무방 전체로 퍼져 나갔다. 때마침 월무협에서 남월당, 백무당의 훈련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서 이장로 장태환과 남궁평까지 귀방한 상태였기에 천무경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은 모두 모인 셈이었다.

방주대행 천준은 아침에 바로 이 모두를 대청으로 소집하였다. 오랜 가족들과 함께 조식을 먹기 위해서였다.

천준이 상석에 앉았고, 백두기, 장태환이 좌우 차석에 위치하였다. 남궁평과 이혁성, 각 당의 부당주들, 총관 서일헌도 모두 배석하여 진도건을 맞이하였다. 이 자리에는 영은성 등 함께 온 일행들도 모두 초대되었다. 천서은은 진도건이 앉을 빈자리 옆에 바로 앉아 있었다.

진도건은 모두를 향해 엎드려 절을 올렸다. 특히 진도건 개인으로서는 두 장로와도 관계가 가까웠기 때문에 예의를 최대한 갖춰야만 했다.

“서은이가 전쟁터로 떠났을 때, 너의 뜬소문이 있어서 개방을 추궁했더니 사실이라 하더구나. 그 말도 쉽게 믿어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널 보고 있으니 꿈인가 싶구나.”

“고얀 놈 같으니라고. 살았으면 진작에 얼굴을 비춰야 하지 않겠느냐? 사내새끼가 뭐가 그리 죄스러워서 숨어지냈단 말이냐?”

천둥처럼 울리는 백두기의 목소리와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냉담한 장태환의 훈계에 진도건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두 장로님께 특히 죄송한 마음이 컸습니다.”

“흥! 내 노 장로의 죽음이 가치가 있었는지 직접 한 번 시험해 봐야겠다. 네놈의 그 해괴한 몰골도 어이가 없는데, 실력도 형편없다면 그대로 목을 베어주마.”

장태환이 콧방귀를 끼며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노지신의 죽음은 그만큼 그에게 충격적이어서 진도건에게 앙금이 깊이 남아있었다.

“장 장로님!”

“공녀가 어쭙잖은 태세로 녀석을 보호하려 든다면 이 장모와 결딴을 낼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것이오.”

장태환이 으름장을 놓자 천서은이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장로들의 성정은 모두 달랐다. 백두기가 천무경과 닮아서 태산 같은 위엄을 보인다면 장태환은 아주 냉철하고 자비심이 없어서 방의 무사들은 백두기보다 장태환을 더욱 어려워했다.

물론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정도 늘어가기 마련이라 장태환이 무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또 한다면 하는 인물이기에 천서은은 그가 진도건과 진심으로 다툴 것을 걱정한 것이다.

“하하하! 천 공녀에게 미안하지만, 우린 장로님과 진 위사의 비무가 너무 기대되는군.”

남궁평이 웃으며 얘기하자 옆에 있던 이혁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당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혁성은 여기에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장로님과 끝나면 나와도 붙어보자.”

“알겠습니다.”

진도건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개방에 앞서서 천하제일방으로 일컬어지는 천무방이었다.

조직을 개편하면서 4개의 당을 맡은 두 장로와 두 당주들의 무공은 3년 전과도 또 달라서 가히 일가들을 이룰 만하였다. 특히 이혁성은 3년 전부터 진도건과 함께 쾌검의 달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니 다시 자웅을 겨뤄보고 싶은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진도건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만큼 그의 생환은 천무방에게 있어서 너무 반가운 일이었다. 이를 조용히 지켜보던 영은성이나 최현걸도 진도건이 방 내에서 갖는 지위에 비해 신망이 두터운 걸 보고 놀랄 정도였다.

곧 대청 안으로 숙수와 하인들이 들어왔다. 하인들은 긴 탁자를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향미를 자극하는 많은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침에 미리 소식을 들은 천준이 특별 주문을 넣은 것이었다.

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짝짝!

“자자, 못다 한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더 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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