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제25장. 창천쌍검(蒼天雙劍) (2)
창천맹주의 서신이 전달되면서 천무방과 하북팽가는 빠르게 인원을 구성했다.
흑응대 산채 규모가 제법 크긴 했지만, 고수라 할 만한 자들의 수는 많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민란의 성격으로 칼을 쥔 백성들은 보호해야 했기에 실력 있는 고수들로 파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천무방은 적멸당 30인이 파견되었고, 하북팽가도 소가주 팽상복(彭相福)을 필두로 가문제자 9인이 함께 석불사로 향했다. 관군은 창천맹의 답신을 받자마자 석불사로 군사들을 파견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그믐달이 어렵게 밤을 비추고 있던 4월 중순 어느 날. 무림인 40인과 병사 100명은 마침내 석불사에 모여들었다.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아무래도 산지를 가로질러 와야 했던 천무방이었다.
팽상복은 병사들과 함께 석불사 경내에서 서성거리다가 산문을 넘어 들어오는 붉은 무복 차림의 천무방 사람들을 맞이하였다.
“천무방 적멸당 고수분들이시오?”
“그렇습니다.”
“귀하가 지휘자입니까? 전 팽가의 소가주 팽상복이라고 합니다.”
“팽 소협께서 직접 오셨군요. 전 적멸당 무사 장학이라고 합니다.”
팽상복과 장학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정파의 봉문 해제 이후로 팽상복은 빠르게 하북, 산서 일대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쌓았다. 천무방이 체제를 개편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동안 하북팽가는 산서지역 치안까지 협력에 힘썼는데 팽무양, 팽상복 부자의 위명이 이때 알려지게 되었다.
이중 팽무양은 오호단문도라는 가문의 도법 명을 별호로 불렸으나 북부초원 전쟁에 참전하면서 명성이 알려질 기회가 적었다. 반면, 팽상복은 두 지역에서 크게 활약한 덕에 호방한 성정과 협의심이 강한 모습을 평가하여 민중들은 팽호협(彭豪俠)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팽상복은 장학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면식이 있는 인상에 미소를 지었다.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인제 보니 작년에 적멸당 수련을 견학했을 때 뵌 분들이 많으시군요.”
“후후, 적멸당은 100명밖에 되지 않아 대부분 보셨을 겁니다. 저도 소협과 인사를 한 적이 있었지요.”
장학도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렇군요. 그때의 견학에 제가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덕분에 무공이 크게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아버지께선 전장에서 돌아오시더니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며 타박하시더군요. 실전경험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면서 쫓겨 나왔습니다.”
“아아, 이번에 팽무양 가주님께서 흑풍신마와 몽골족과의 전쟁에 다녀오셨지요? 무탈하십니까?”
“다행히 건강하십니다.”
장학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보았다. 뒤에는 적멸당 이전의 천혼당 때부터 가장 가까이 지냈던 동료들이 있었다.
그중 특히 관무영, 장우태, 하소정과 장학은 바로 화산에서 벌어진 일월신마 및 마교 도당들과의 혈투 이전에 종남산에서 일월신마와 직접 마주치고 생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세 사람을 잃었다.
다른 당원들보다 더 가까운 동료였던 나자룡, 천무방 내 가장 신망 높은 삼장로 노지신, 그리고 특별한 재능을 가졌던 동료 진도건.
천서은이 창천맹에서 파견된 500명의 고수를 데리고 북상하던 날에 그들은 지나가는 소리로 그간 잊고 지냈던 진도건의 이름을 들었다. 정신적 고통에 신음하던 천서은 때문에 그 이름을 입밖에 담기에 조심스러웠던 3년이란 시간 뒤에 갑자기 그 이름이 언급된 사실은 묘한 기대를 할 만했다.
전쟁이 끝나고 파견되었던 고수들은 각자의 위치로 복귀했지만, 천서은은 아직 창천맹이나 천무방 어느 쪽으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천무방 내에서 여전히 훈련에 매진하고 있던 터라 바깥소식을 들을 길이 없던 그들은 하루빨리 천서은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관무영 등은 장학이 왜 자신들을 쳐다보는지 이해했다. 그렇기에 하루빨리 이 임무를 처리하고 다시 복귀하여 소식을 기다리고 싶은 것이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바로 출발하실까요? 개방의 첩보에 따르면 놈들은 오늘 낮에 하북 장가촌(張家村)을 약탈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아마 술과 잔치로 잔뜩 취해있을 거라고 합니다. 병사들로 길목을 포위하고 저희가 침투한다면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저희는 임무를 빨리 마치고 돌아가고 싶었거든요.”
“좋습니다. 만 부윤님, 출발하시지요.”
병사들을 이끄는 만충(萬忠)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인솔을 시작했다.
그들은 빠르게 야음을 틈타 북상하기 시작했다. 산세는 험하고 이제 봄이 시작되면서 숲도 녹음이 적절하게 끼어 있었다. 그믐달 아래 밤은 어두워 백 명이 넘는 인원의 이동도 쉽게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험준한 산세를 타고 넘어와 마침내 흑응채에 이르렀다.
부윤 만충은 병사들을 삼분하여 퇴로가 될만한 숲길을 막았다. 그리고 장학이 이끄는 적멸당 무사들과 팽상복을 포함한 팽가 도객들은 입구 근처에서 잠시 숨은 채 흑응채의 경계상태를 살폈다.
산문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는데 안에서는 꽤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떠들썩하진 않았지만, 북적거리는 분위기는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차피 산채 출입문은 한 곳이니 조용하게 들어갔다가 반응하는 자들이 나오면 제압합시다. 민간인들도 많으니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고.”
팽상복은 고개를 끄덕였다.
40인은 조용하고 빠른 걸음으로 입구에 도달했다. 그리고 장학은 울타리에 바짝 붙어 안쪽의 동태를 살폈다.
“응?”
“왜 그러십니까?”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장학의 말에 팽상복도 고개를 내밀어 안쪽을 살폈다.
그의 말마따나 사람들이 촘촘히 모인 채 더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마다 수군거리고 있었다.
장학은 일행들에게 손짓하며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 뒤를 팽상복과 적멸당, 팽가 무사들이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산채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본 상황은 묘했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어느 한 지점을 중심으로 넓고 둥그렇게 서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이나 허리, 등 어디에도 무기로 보이는 건 없는 거로 봐선 낫 대신 칼을 들었다던 백성 무리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장학 등이 가까이 접근해도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장학은 앞에 보이는 한 사람에게 일부러 뒤로 접근했다.
“무슨 일이오?”
“……판결 중입니다.”
“무슨 판결?”
“기주부사께서 오셨는데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시기로 여기 채주를 민란의 수괴로 지목하셔서.”
장학이 뒤를 돌아보았다.
잠깐 부윤 만충을 찾은 것인데 퇴로를 막고 있음을 곧 깨달았다. 그는 다시 팽상복을 보았다.
“기주부사가 누군지 아십니까?”
“기주부사? 아, 그…… 이번 북부 전쟁에서 복귀한 장수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 부윤이셨다가 진급하셨다고 들었는데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장학은 잠시 생각했다.
기주부사가 이곳에 있어서 판결 중이라는 건 이곳 흑응채의 문제를 어떻게 먼저 알고 와서 이미 해결을 했다는 얘기가 되었다.
‘기주부사라면 병사들을 끌고 왔을 법한데 전투 흔적은 없고…….’
장학은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싸울 일은 없을 것 같소. 일단 한 사람을 보내서 만 부윤을 모셔오고 우리는 들어가서 상황을 확인합시다.”
“알겠습니다. 임 무사가 갔다 오시게.”
팽상복의 지시로 팽가 무사 한 사람은 만충 부윤을 부르기 위해 곧장 산채를 다시 나섰다.
장학, 팽상복 등은 곧장 민중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섯 겹 사람들 사이를 지나고 나니 마침내 안의 전경이 눈에 확연히 드러났다.
흑응채를 거점으로 도적이 되었던 100명이 훌쩍 넘는 무림인들은 무장해제 한 채 무릎을 꿇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십여 명은 무엇에 호되게 당했는지 엉망이 된 몰골로 널브러져 있었다.
상석엔 기주부사로 보이는 갑주 차림의 거한이 언월도를 들고 서서 호랑이 눈으로 좌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장학의 눈으로 보기에 기주부사의 풍기는 기백이 엄청나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장수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병사들이 없군.”
그렇게 중얼거리던 장학은 병사들 대신 다른 사람을 찾았다.
기주부사로 보이는 자 뒤로 다섯 명가량의 남녀가 각각 앉고 선 채로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도검 등을 착장한 것으로 보아 무림인들로 보였다. 그 이상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서 기주부사가 병사들은 없이 무림고수들만 대동하고 온게 아닐까 생각했다.
장학과 같은 시야로 살펴보던 팽상복은 그 다섯 명 사이에서 비스듬히 서서 얼굴이 보인 사내를 알아보았다.
“최현걸? 개방 소개 최현걸인데?”
그의 목소리에 반응한 사내는 곧장 시선을 돌려보았다가 팽상복과 눈이 마주쳤다.
“팽 공자?”
팽상복이 알아본 대로 그는 최현걸이었다. 그리고 기주부사 뒤로 한 청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바로 영은성이었다.
영은성은 팽상복을 몰랐지만, 이름은 알고 있어서 최현걸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팽상복이 최현걸을 알아보았듯, 최현걸은 팽상복 옆 장학 등의 붉은 무복을 입은 사람들을 알아보았다.
“적멸당? 형수님, 천무방에서 왔습니다.”
그의 말에 장학 등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남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먼저 돌아선 건 바로 천서은이었으니 장학 등 적멸당 무사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공녀?”
“아가씨!”
불과 한 시진 전만 해도 빨리 임무를 마무리하고 복귀해서 소식을 기다리고자 했던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런 곳에서 마주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천서은 옆에서 등을 보이고 서 있던 사내도 돌아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믐달의 미약한 월광과 주변에 피운 횃불의 화광으로 인해 그때까지 미처 느끼지 못했던 붉은 머리카락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저……!”
눈썰미가 좋았던 하소정이 가장 먼저 알아보고 놀라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녀가 놀란 이유를 장학과 관무영 등 다른 적멸당 무사들도 하나둘 눈치채기 시작했다.
달빛과 불빛을 받아 묘하게 빛나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대다수 적멸당원들에겐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화산에서의 혈마혈전 자리에 있었던 일부에겐 이미 뇌리에 박힌 인상이었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 공포스럽던 혈마의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 붉은 눈동자는 살의와 광기가 가득 찼던 그때의 것이 아니라 이지(理智)의 총명함이 깃든, 그들이 똑똑히 기억하는 남자의 것이 머물고 있었다.
“진도건!”
그때 그날의 기억으로 적멸당원들 가운데 가장 감정이 널뛰었었던 하소정이 마침내 그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그리고 옛 천혼당, 지금의 적멸당원들을 향해 진도건은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서은의 모습에 적멸당원들은 정말로 진도건이 살아 돌아왔음을 하나둘씩 실감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정말 진도건이야?”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저 모습은 대체……!”
“저건 혀, 혈마가 아닌 건가?”
저마다의 생각으로 탄성을 내뱉으며 머뭇거림이 있었으나 그들은 곧 앞으로 뛰쳐나갔다. 장내의 상황은 신경 쓸 새도 없이 어느새 천서은과 진도건을 중심으로 둘러섰다. 그런 그들을 향해 진도건이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두……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