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제24장. 역천마제(逆天魔帝) 단원진(段源辰) (6)
권영서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지만, 양자성은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다시 기문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긴장감이 이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싸움이 오래 이어지진 않을 것이다…….’
불과 시간을 세어보지 않아도 짧은 시간 동안 보통의 고수들보다도 더 많은 합과 치열한 격돌을 할 것이었다. 둘이 하나를 상대하는 싸움이었고, 무리수는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경륜이 깊은 노고수들이었어도 치열한 생사결은 더 많은 부담을 강요받게 되어 있었다.
“헉!”
물끄러미 기문진을 바라보던 양자성이 놀라 침음성을 삼켰다.
뿌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기문진 안쪽에서 열십자 휘광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마주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서 되새기니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기문진이 영역을 분리하지 않았더라면 주백자의 상청검이 양자성에게도 닿았을 뻔한 것이었다.
짧은 순간이나마 그런 기분을 겪고 나니 기문진에 가까이 있던 자신의 위치가 불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주춤주춤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다 조심스럽게 돌아섰다.
“안으로 피해 있지.”
양자성의 그런 모습을 보며 권영서가 말했다.
두 사람은 이내 돌아서서 통로를 따라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에 무엇이 있소이까?”
“조금 전에 본 조각상들 뒤로 10개의 수련동이 있네. 각각엔 술진이 짜여져 있는데 구주마종의 수장이 새롭게 된 자들은 해당 수련동으로 가서 내면의 마성을 깨우고 마정을 재구축하는 일을 거치지. 그 모든 것이 바로 단용후 조사님과 단원진 태상교주께서 안배해 둔 것이고.”
“마성, 마정…….”
“마성이라고 하니 두려움이 일 수도 있겠지만, 자네가 보기에 태상교주님과 일월신마께서 미친 사람으로 보이던가?”
“아, 아니오.”
“마공이 그런 마성 때문에 점점 정신잠식이 일어나 주화입마에 빠진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무공의 경지가 화경에 이른다면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자라도 대마의 유공(劉公)께서 성공적으로 제작한 명현단으로 충분히 제어할 수 있으니 재능만 있다면 경지에 이르기까지 안전하게 힘을 키울 수 있다네.”
“명현단……, 홍천환은 어떻소?”
양자성은 문득 비무제 직후 강정학 등과 함께 홍천환의 확보를 위하여 길을 떠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염황신마와의 격돌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홍천환이 마도와 관련되어 있음은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다.
“홍천환. 대마의께서 최초로 만든 영약이지만, 어떻게 보면 명현단과 정반대로 주화입마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위험천만한 영약이지. 강한 힘을 안겨주는 건 틀림없지만, 그 끝에는 파멸로 이어지는……. 내가 알기론 종남산에서 발견된 홍천환이 마지막이라네.”
“그건 어찌 되었소?”
“일월신마께서 확보하셨다가 천무경 제거를 위해 진도건이란 자에게 복용시킨 후에 폭주시켰다고 하더군.”
양자성은 내심 깜짝 놀랐다. 설마 여기서 진도건이란 이름이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의 여정은 오랜 시간 동안 고독하고 고립되어 있었기에 중원 소식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놈은 어떻게 됐소?”
“아는 자인가보군. 글쎄, 천무경이 살아 있으니 그자는 죽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아무도 그가 죽은 걸 보지 못했지만, 그렇게 마기가 폭주하면 자아를 잃고 내공이 모두 소진되고 선천진기까지 소진할 때까지 힘의 방출을 멈추지 않으니 신선이 내려오지 않는 한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봐야겠지.”
권영서의 말에 양자성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진도건이 그에게 있어 철천지원수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에게 패배한 것이 강한 자극제가 된 것은 틀림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힘을 얻었을 때, 가장 먼저 꺾고 싶은 자가 진도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도 헛헛함이 감돌기도 했다.
키기기기긱!
그때 괴이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파열음을 인지하는 순간, 등 뒤에서 엄청난 빛이 쏟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깜짝 놀라 돌아서는 순간, 양자성은 기문진에 안개 위로 균열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
“기문진이 깨지다니……!”
권영서가 놀라 중얼거렸다.
술자가 해제한 것이라면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겠지만, 저렇게 균열이 일어난다는 것은 안에서 발생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 버린다는 소리였다.
“아, 앞을 막아야 하네!”
권영서가 놀라 소리치자 양자성은 서둘러 그 앞을 가로막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앞에 강기의 벽을 형성하였다.
콰자자작-!
콰앙!
그 직후 기문진이 완전히 깨어지며 폭발했다.
“큭!”
경력의 폭풍이 휘몰아치면서 양자성의 강기 벽을 때렸다. 어찌나 강력했던지 충격의 반동 때문에 공력을 유지할 수 없을 뻔했다.
우르르!
통로의 입구도 그 여파로 부서져 입구를 반쯤 막았고 천장에서도 돌무더기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폭발이 끝날 때까지 다행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공포에 질리기엔 충분했었다. 제아무리 무공이 강하다 한들 용암공동이 통째로 무너진다면 살아남을 도리가 없었다.
“허억, 허억……!”
양자성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잠시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폭발과 진동은 멈추었고 가루들만 떨어지며 머리카락을 더럽히고 있었다. 지대가 안정되었음을 깨닫자 조심스럽게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돌무더기로 반 이상 막혀 있었지만, 바깥을 살피고 나가기엔 충분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
“크으으……!”
입구에 가까이 가자 바깥에서 신음이 미약하게 들려왔다. 고통에 가득 찬 소리였는데 그냥 듣기엔 누구의 것인지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입구에 다다라 돌무더기 위로 올라가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바깥을 살피던 양자성은 깜짝 놀랐다.
주백자를 사이에 두고 단원진과 일월신마가 양옆에 서 있었다. 그들은 주백자는 양팔을 펼쳐 두 사람과 장심을 맞대고 있었는데 떨어질 기미가 없어 보였다.
‘내력 대결을 하는구나! 저것으로 끝장을 볼 참이야……!’
양자성은 집중해서 상황을 살폈다.
어느 쪽으로 승패가 기우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바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백자와 단원진 그리고 일월신마.
셋 다 몰골은 정상이 아니었다. 기문진 안에서의 격돌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의복은 여기저기 터져 나가 성한 데가 없었고 각혈을 하지 않은 자도 없었다. 또 내력 대결을 펼치고 있음에도 그 여파가 바깥으로 표출되면서 세 사람이 선 지면이 짓눌려 패여 있을 정도로 격렬했다.
“양자성……!”
양자성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랐다.
목소리의 주인은 주백자였다.
“이 자들의 목을 베어라……. 그것이 너의 스승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 큭!”
주백자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양자성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말을 꺼낼 정도로 일말의 여유가 있다는 건 일월신마와 단원진을 동시에 상대하는 주백자의 내공이 바다처럼 넓고 깊음을 의미하기에 심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저 잇지 못했을 땐, 다른 사람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단원진 때문이었다.
어느샌가 그의 신체가 칠흑의 광휘에 희미하게 덮여 가는 듯하더니 일순 그의 겉으로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사라진 것이었지만, 단순히 기척의 확장처럼 느끼기에는 단원진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한 모습이 동공에 각인되었다.
그 순간 직후에 주백자가 신음과 함께 입가로 다시금 피를 머금었다.
일월신마는 마치 힘에 짓눌리듯 버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단원진과 주백자가 맞붙은 팔은 부들부들 떨면서 격동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크으……!”
주백자는 이 맞닥뜨린 대결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세 사람은 천지가 무너질 것처럼 격렬하게 충돌했고, 십단금과 함께 마침내 기문진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그런 경천동지한 충돌 속에서 일월신마가 가까이 접근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력 대결로 이어졌을 때는 어렵지 않게 억누를 수 있었다.
음양마기 특유의 폭발력은 분명 대단했지만, 아무리 세계 제일의 호수라고 하더라도 바다를 삼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단원진이 마치 기회를 붙잡은 듯 허를 찌르며 접근하여 그와도 내력 대결을 하게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힘의 우위는 주백자의 차지였으나 단원진이 가진 마기의 침투력은 정말 무시무시했다.
단원진을 보며 ‘만마본원’이라 외쳤듯 마도의 정점이 보여 주는 마기는 마치 상극처럼 힘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오히려 주백자의 기운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이 자는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무엇보다 기가 통하면서 주백자는 심안에 더한 영신의 공명으로 단원진의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었고,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일월신마도 그 본질을 볼 수 있었는데 단원진의 것은 분명 일월신마와 달랐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 없애야만 할 존재.
어떤 자비도 없어야 할 아주 불길하고 음습한 느낌이 머릿속을 휘감았다.
“양자성! 단원진, 이자를 찔러라!”
주백자가 검을 피를 토하면서까지 버럭 소리를 쳤다. 언제나 여유와 평온한 표정을 자랑하던 주백자의 얼굴이 처음으로 분노와 다급함에 일그러져 있었다.
스릉!
양자성은 돌무더기와 계단에서 뛰어내려 검을 뽑았다.
꿀꺽!
목으로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귀에 들려왔다.
양자성은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일월신마는 마침내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주백자도 점점 고통으로 일그러져가고 있으니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단원진과 맞붙은 왼팔은 마기의 침투로 검게 변색한 혈관들이 잔뜩 불거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원진을 보았을 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양자성은 흠칫 놀랐다.
주백자처럼 입을 뗄 수 없어 보였지만, 묘하게 미소 띤 얼굴이 사악한 최면을 걸듯 양자성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양자성의 발걸음이 단원진을 향했다. 검 끝이 명백하게 단원진을 향해 있었다.
“안돼! 주백자를 찔러라!”
권영서가 다급하게 돌무더기를 빠져나오며 소리쳤다.
‘저놈이 감히 태상교주님을……!’
권영서는 외침과 동시에 두 눈을 부릅뜨면서 들고 있던 검이라도 양자성에게 던지려다가 멈칫했다.
어느새 단원진에게 다가간 양자성이 갑자기 주백자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너…, 네 이놈……!”
주백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양자성이 검에 검강을 덧씌우면서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슈악!
양자성은 단호히 주백자를 향해 검을 찔렀다.
검강의 칼날이 피부를 갈라 심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파아앙-!
주백자를 중심으로 공력의 방출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터져 나가며 양자성을 밀어내었다.
단원진과 일월신마도 일제히 피를 토하면서 같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주백자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쿨럭!”
주백자가 검은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두 팔로 마기가 침투한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데, 직전의 상황보다 상태가 더욱 심각해 보였다. 양자성의 공격을 떨쳐내기 위해 어쩔 수 없어 무리한 것인데 그 순간 단원진과 일월신마의 마기가 동시에 체내로 대거 침투해 버린 것이었다.
“흐아압!”
양자성이 기합을 터뜨리며 주백자를 덮쳤다.
백령검법 백강염쇄.
새하얀 검강들을 꽃피워 내며 주백자를 향해 일제히 쏟아 내었다.
기습을 위해 짧은 순간이나마 최대한의 공력을 분출하기 위한 절초.
주백자는 그의 협조를 구했었지만, 양자성은 그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듯 필사적으로 절초를 쏟아내었다.
위력적인 검강이었지만, 지금 몸 상태의 주백자에게 그것은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좌우에서 짓쳐들어오는 섬뜩한 기운들이 있었다.
천마신공 무곡암염(無哭暗焰).
일월혼극마공 일월붕천굉.
그 위력적인 절초들이 거대한 압력과 칠흑의 불길로 형화하여 일제히 주백자를 덮쳤다. 거기에 양자성의 검강까지 덮치면서 중과부적(衆寡不敵)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