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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19화 (119/432)

119화 - 제24장. 역천마제(逆天魔帝) 단원진(段源辰) (1)

감히 사람의 셈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먼 옛날.

태초의 대지가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가운데 지표면의 거대한 융기(隆起)가 일어나 이 천산산맥을 형성하였을 때, 용암도 함께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고도를 형성하기까지의 장대한 시간과 지표면의 두께 등의 요인으로 용암은 결국엔 분화하지 못하고 식어가며 다시 지하로 가라앉았다.

그 고대 역사의 흐름이 양자성의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공동(空洞)의 벽 표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무덤? 제단? ……성?’

설명하기 난해한 공간이었다.

둥그렇게 녹아내렸으면서도 비스듬히 기울어진 지형에 사람의 손길이 닿아 계단식 구조로 층을 나누었다. 이런 구조가 반원의 형태로 벽면을 따라 만들어져 있었는데 각층에 사람인지 괴물인지 모를 기괴한 조각상이 두 눈으로 불꽃을 피워내며 서 있었다.

조각상들은 모두 10개였는데 제각각 형상이 달라 마치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각상 발 앞에는 누군가의 위패가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는 황금으로 제작된 듯한 향로가 있어 향을 피우고 있었다. 그 주변으론 제법 녹아내린 초의 심지 위로 불꽃이 흔들거렸다.

각층의 벽면에는 또 다른 통로처럼 보이는 곳들이 있었으며 마치 창을 내놓은 듯 사각꼴의 구멍을 뚫어 놓은 곳이 벽면을 따라 수십 개에 달했다. 그리고 이런 창은 조각상이 서 있는 네 개 층보다 더 높은 곳까지 뚫렸으니 이 모든 지형지물을 바라보는 양자성의 눈에는 무덤, 제단 그리고 지하 속에 잠든 암흑성(暗黑城) 같은 느낌도 들게 하고 있었다.

“이곳은 무엇이오?”

“글쎄. 설명하기에 따라 이곳의 성격은 바뀐다네. 일단 전대 혹은 전전대의 구주마종의 마두들의 시신을 안치하고 그들의 마령(魔靈)을 위로하기 위한 제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다른 의미도 있소이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도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지.”

권영서는 잠시 상념에 젖는 듯 말꼬리를 흐리며 뒷짐을 진 채 조각상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양자성으로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각상 쪽이나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뒤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어디선가 흘러내린 물길이 잔잔하게 바닥을 적시면서 무심코 뒤돌아선 양자성의 시선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곳은 조각상 쪽을 주로 비추고 있는 불빛들이 닿지 않아 마치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어둡게만 느껴졌다.

참방거리면서 그 어둠을 향해 걸어가는데 점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공기의 흐름이 그를 점점 빨아들이는 느낌이 들었다.

“멈추시게.”

권영서의 부름에 양자성이 멈칫하였다.

휘이이이-!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바람에 휩싸이면서 강력하게 빨아들이는데 그 소리가 마치 귀곡성을 듣는 듯하여 소름이 끼쳤다.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젖은 바닥 때문에 자칫 미끄러지면 왠지 어둠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았다.

“거기서 몇 걸음만 더 가면 절대 돌이킬 수 없는 무저갱으로 빠지게 될 걸세. 돌아오시게.”

그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서 있던 양자성은 눈이 어둠에 조금씩 적응해 가는 것을 느꼈다. 뒤쪽의 아른거리는 불빛을 빨아들이면서 주변 지형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서너 걸음 앞 바닥 쪽의 새까만 구멍은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대여섯 명의 건장한 남성 정도는 단번에 삼킬 수 있는 큰 구멍은 주변 지형에 새겨진 흔적으로 미루어 바로 용암이 흘러내려 갔던 곳이었다.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권영서조차도 그곳에 바닥이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을 정도로 가늠할 수 없는 곳이었다.

지금 양자성이 선 위치에서부터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빨아들이는 기류가 급격히 강해지면서 그곳에 빠지면 누구도 예외 없이 하강기류를 뚫고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해 버리는 지옥의 출입문 같은 곳이었다.

불길한 느낌을 인지한 양자성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경공이 뛰어난 절정고수의 허리에 튼튼한 밧줄을 감아서 내려보낸 적이 있었는데 내려간 사람도, 밧줄을 붙잡고 버티던 사람도 같이 빨아들인 이후로는 누구도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이지.”

“후우……!”

권영서의 설명 때문이 아니더라도 불안정한 느낌을 충분히 받은 터라 양자성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벅저벅-.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양자성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자신과 권영서는 가만히 선 채로 그 지옥문을 바라보고 있었던 상황에서 들려온 발소리였다.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의 것이었다. 소리를 추적해 보면 다소 거리가 떨어진 곳이었으며 그들이 서 있던 곳보다 다소 높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는 양자성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계단을 따라 올라가 3층의 좌측 통로 쪽에 이르렀다. 불빛에 드리워진 통로의 그림자 사이로 인영이 보이고 마침내 그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오, 이게 누구야? 권 각주 아니신가?”

칼칼하면서도 늙수그레한 음성이 호탕하게 터져 나왔다.

얼굴에 짙은 검상이 흉터로 새겨진 노인이 권영서에게 손을 흔드니 권영서는 깊이 허리를 숙이며 포권지례를 올렸다.

“일월신마께서도 계셨습니까?”

고급스러운 흑포를 두른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일월신마였다. 그의 뒤로 건장한 체격의 남성과 묘령의 아름다운 여인이 그림자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는데 권영서가 일월신마에게 취한 것처럼 그들도 권영서를 향해 깊이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런 그들을 권영서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바로 일월신마를 감시하고자 무영각에서 보낸 국과 연이었다.

목적은 분명 ‘감시’였으나 일월신마만이 아주 예외적으로 두 사람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물론 권영서는 그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일월신마를 따르고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권 각주가 선관자로서 나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저 꼬맹이가 바로 단 태상이 찾던 녀석인가 보지?”

“그렇습니다.”

일월신마는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양자성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양자성은 바짝 긴장했다.

‘이 자… 위험하다. 마치……’

양자성은 일월신마를 보며 염황신마를 처음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위압감이 다시금 느껴졌는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일월신마의 눈빛 속에서 어쩌면 염황신마보다 더 위험한 자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벅.

마침내 일월신마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들은 한 걸음 내디디며 손을 뻗으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빤히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감내하면서 양자성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름이 무엇이냐?”

“……양자성이오.”

“양자성?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백령신검 강정학의 삼제자입니다.”

“아아! 생각이 나는구만. 크하핫!”

권영서의 설명에 일월신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팔짱을 낀 채 양자성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허리춤의 검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것을 보면서 입가에 씩 미소가 그려졌다.

“검을 뽑아 봐라.”

“왜 그러시오?”

일월신마가 얼굴의 검상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널 보니 생각나는 놈이 있는데. 뭐 너와는 상관없는 놈이었겠지만, 네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지는구나.”

양자성은 쉽게 검을 뽑을 수 없었다.

일월신마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데다가 마도의 힘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온 입장에서 마치 적대하는 듯한 상황을 벌이는 것이 맞는 일인지 의문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의 검법을 시험해 보겠다는 일월신마의 말도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일월신마는 빈손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자성이 주춤거리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일월신마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슈욱!

일월신마가 갑자기 거리를 순간 좁히면서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이 일월신마의 손아귀는 뱀의 아가리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큿!”

양자성은 내심 화들짝 놀라면서도 본능적인 반응으로 허리를 꺾으면서 일월신마의 손아귀를 피해냈다. 그러고도 모자라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는데 등 뒤에서 마치 무저갱으로의 길을 열어둔 지옥문에서 그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느낌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런 그를 향해 일월신마가 조소 어린 웃음을 지었다.

“크크크! 아가야, 우리 권 각주가 널 데려오긴 했어도 과연 기준에 들만한 녀석인지는 이렇게 시험해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인 게다. 그러니 어쩌겠느냐? 권 각주의 눈이 틀릴 일 없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놈이라면 무저갱에 던져 버려야 하지 않겠느냐?”

일월신마의 말에 양자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잠깐 시선을 돌려 권영서를 보았는데 그는 조용히 국, 연과 함께 멀찍이 물러나고 있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양자성은 일월신마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일월신마가 웃으며 그를 향해 손짓했다.

“크크! 전력을 다해 봐라. 얼마든지 받아주마.”

“후회하지 마시오.”

양자성은 천천히 검을 뽑으며 일월신마를 향해 경고하였다. 그의 주변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리고 차츰 그 기운들은 점점 백화(白化)되어가면서 아주 차갑고 섬뜩한 기백으로 뿜어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좋은 투기로구나!”

일월신마도 꽤 감탄하여 소리쳤다.

그가 앞서 양자성을 보며 떠올렸던 자는 다름 아닌 진도건이었다. 그리고 내공보다 외공에 더 강점이 있던 그와 다르게 양자성의 강력한 내기가 검기처럼 뿜어져나 오는 것을 보면서 또 다른 질을 느끼고 있었다.

백령검법 일섬탈백.

순간적으로 분출된 검광이 어둠을 찢으며 일월신마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검속에 충분한 자신이 있었기에 죽일 생각으로 날렸으나 일월신마는 뒤로 물러나면서 허리를 젖히는 것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제법 빠른데?”

양자성은 자신을 얕보는 일월신마를 당연히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력을 보이라고 할 만큼 그 말을 후회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백령검법 백무풍호.

쉴 틈을 주지 않고 쫓아가 원형의 참격들을 뿌리니 그 검광을 쫓아 사방에 작은 검기의 조각들이 꽃잎처럼 피어났다. 그리고 그가 베어내는 궤적을 쫓아 바람처럼 휘몰아치면서 일월신마를 덮쳤다. 그 기세가 시야를 모두 덮을 정도였던 데다가 그 위험함이 거리를 둔 채 지켜보던 권영서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일월신마가 검광을 피해 내면서 두 손을 허공을 감싸듯 둥그렇게 펼쳐졌다가 모으니 휘몰아치던 검기들이 양자성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파앙!

일월신마의 역장에 검기가 분쇄되면서 무의미한 기운들로 사방에 흩어졌다.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수법에 초식과 검기를 와해되자 양자성은 깜짝 놀랐다.

그런 그의 반응을 우습게 여기면서 일월신마의 두 손이 우악스럽게 양자성을 향해 뻗어 나갔다.

터터텅!

양자성이 급히 물러나면서 검기를 두른 검으로 일월신마의 두 팔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부에 닿지도 못하고 튕겨 나가는데 그 충격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뭐지? 강기도 아닌 것이……!’

경기든 강기든 기운의 충돌 끝에는 반발이 있기 마련이지만, 마치 알 수 없는 힘이 접촉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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