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제23장. 천마신교(天魔神敎)로의 여정 (5)
검투전에서 난투전으로 바뀌어 버린 상황으로 인하여 투기장의 열기는 어느 때보다 빨리 불타올랐고 또 어느 때보다 빨리 식어 버렸다.
양자성이라는 투기장 승자의 예상 밖의 무력은 관중들에게 어떻게 환호를 내질러야 할지 인지 부조화를 일으킬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게 교하토성은 신강 지역 가운데서도 제법 많은 사람이 모인 도시였지만, 무림이라는 세계를 마주하기에는 보는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의 인솔에 따라 양자성은 관청으로 들어섰다. 길을 지나는 그를 보면서 군중들은 경탄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런 시선을 느낀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에 나름의 희열을 느끼면서도 이런 상황을 가볍게 만은 볼 수 없었기에 양자성은 오히려 싸울 때보다 더 긴장하고 있었다.
병사들의 안내로 성주실에 들어선 양자성은 관중석에서 보았던 교하성주 부양과 선관자의 모습을 보다 가까워진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부양은 손짓으로 병사들을 물렸다.
“승리를 축하드리오. 존함이…… 장성일이시군. 맞소이까?”
“그렇소이다.”
부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서 있던 선관자를 보며 가볍게 목례를 취했다.
“그럼 말씀하십시오. 전 나가 있겠습니다.”
선관자가 목례로 답하자 부양은 조용히 성주실에서 나가 주었다.
양자성이 기척을 읽기 위해 집중해 보았는데 과연 가까운 지점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온 신경이 점점 선관자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선관자는 성주석에 앉아서 양자성을 바라보았다.
“장 공자의 실력이 뛰어나 검투전이 시시하게 흐를 우려가 있어 출전자들을 모두 투입하였네. 그리고 내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무공을 보여 주었어. 장 공자의 실력에 경의를 표하네.”
양자성은 누가 자신을 하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위치와 힘이 있는 자가 그럴 때나 인정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목적의식을 분명히 했다.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면 가벼운 거슬림까지 일일이 반응해서는 안 되었다.
‘내 기대 이상으로……?’
특히 선관자의 말에 담긴 진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였다.
“기대에 만족하는 결과였소?”
“그렇네. 오히려 한계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 더욱 만족스러웠지.”
“다행이구려.”
“자네의 검법은 무엇인가? 사문을 물어도 되겠는가?”
“……검림의 검법을 사사하였소. 스승은 청송검 서저위요.”
“중원의 문파인가? 그쪽은 잘 몰라서 말이야.”
“그렇소.”
“자네의 실력이 범상치 않은데 이 먼 곳까지는 무슨 일인가?”
“……불가피하게 동문의 제자를 살해하는 죄를 저질렀소이다. 속죄하고 싶었지만, 죽음을 요구하였기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소. 그들의 힘은 강하니 중원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오.”
“그렇군.”
대화를 하면서 양자성은 선관자 표정과 눈빛을 차분히 읽고 있었다. 노년의 평이한 용모 속에서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질문하고 답을 듣는 그 과정엔 어떤 어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고민하여 사실을 일부 꼬아 속였지만, 어떤 특기할 만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어떻게 되는가?”
“31세요.”
“젊은 나이에 이런 외지까지 고생하였겠군. 이 투기장에는 왜 출전하게 되었는가? 실력의 증명?”
“증명할 게 뭐가 있겠소? 그런 작은 이유로 굳이 귀찮은 일을 할 필요는 없지요. 난 이곳에 출전하면 새로운 힘을 얻을 길이 열린다는 말을 듣고 왔소이다.”
“호오, 그게 무엇인가?”
“당신은 선관자가 아니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맞네. 정확한 호칭으로 부르는군. 어디서 들었는가?”
“이 변방의 여정에서 염황문의 선배와 친해지면서 내게 추천해 주었소.”
“오호, 그런가?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후대선이라 하오.”
“아아, 기억이 나는 이름이로구만. 그가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해 주었다면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었나 보군.”
“그분은 자신을 염황종 내에서 별 볼 일 없는 위치로 묘사하곤 했는데 어떻게 기억하시오?”
“껄껄껄! 그런 의심을 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전제되어야 하네. 첫째, 후대선을 기억할만한 일이 있었는가? 둘째,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바로 그 일이 있던 사람인가?”
“……그렇겠지요.”
“후대선은 자네가 생각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네. 최소한 염황종 내에서는.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하찮은 존재는 아니지. 그리고 나는 이를 모를 수가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일세. 참고로 선관자라는 호칭으로 부를 사람은 신교 내에서도 나 하나 뿐이기도 하고.”
양자성의 눈빛은 선관자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 위하여 부던히 애를 썼지만, 실상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지금 선관자 스스로가 얘기한 말의 내용과 침착하고 여유로운 태도 앞에서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 그렇다면 자네는 마공을 배우고 싶은 겐가?”
“……그렇소. 당신은 내게 길을 열어 줄 수 있소이까?”
“길이라. 아마 그렇지 않겠나?”
“당신을 어떻게 믿겠소? 힘을 원하는 내 뜻과 다르게 당신의 위치가 천마신교 내에서 어느 정도인지 내가 알 길이 없는데 말이오.”
“자네, 날 보니 어떠한가?”
“무엇을 말이오?”
“자네의 실력이라면 나 정도는 쉽게 벨 수 있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양자성은 내심 움찔하여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듣기에 따라서 어쩌면 적대적으로 대하는 듯한 말이었기에 다소간 긴장감이 올라갔다.
“…… 내가 이유도 없이 뭐하러 그런 생각을 하겠소이까?”
“긴장할 필요 없네. 그저 자네의 판단이 어떤지 물어보는 거니까.”
“……자신 없다고 하진 않겠소.”
“껄껄껄! 좋아. 하지만, 나는 이렇게 얘기하겠네. 자네가 불온한 마음을 먹어 나를 해치려고 해도 그 시도는 절대 성공할 수 없네.”
양자성은 선관자의 말에 잠깐 혼란스러워졌다. 그를 경시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선관자의 마치 호언장담(豪言壯談)과 같은 어투의 의도를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선관자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뭐 믿거나 말거나겠지만 말일세. 자네가 나를 그렇게 보듯이 신교의 힘 있는 자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그러하네. 나는 그 유력자들보다 분명 낮은 위치에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보다 위에서 그들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지.”
짝짝짝!
선관자가 손뼉을 치면서 일어섰다.
그런 그를 양자성이 잠시 경계심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선관자로서 재능 있는 자를 만난다면 특별히 마도의 아홉 갈래 중 적합한 길을 제시해 주곤 하네. 그러나 내겐 더 큰 임무가 있지. 그저 재능이나 가진 실력만으로 셈할 수 없는 더 큰 가능성을 만났을 때, 그를 마도의 본류(本流)로 인도하는 것. 어떤가? 양자성, 자네는 그 거대한 파도를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양자성이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미 손은 검에 가져간 상황이었다.
아직 뽑지 않은 채 사위를 경계하였지만, 접근하는 기척 같은 것은 없었다. 이제 그의 시선엔 경계심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영업비밀을 얘기해 줄 수는 없지. 하지만, 난 자네를 어찌할 생각 같은 것은 없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자네를 기다렸고, 자네가 원하는 걸 어쩌면 내가 안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얘기하고 싶은 마음뿐이니.”
“이런…… 차라리 내 가명으로 불렀다면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건 틀렸네. 서로 속이려 든다면 어찌 상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양자성은 잠시 고민했다.
선관자의 평안한 표정과 침착한 말들은 검을 뽑으려는 자신을 앞에 두고 지나치게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는 이전의 호언장담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문득 크게 다가왔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보다 불신이 더 앞서기 시작한 것이었다.
‘제길…… 이거 체면 구기는군.’
양자성은 검에서 오른손을 거두고 바로 섰다. 그는 조용히 심호흡하면서 신중한 눈으로 선관자를 쳐다보았다.
“내가 가져야 할 용기는 무엇이오?”
“강정학의 제자 양자성이 천하의 기재라는 것은 변방의 늙은이도 주워들어 알고 있지만, 내가 더 높이 사는 것은 힘을 추구하기 위해 이 머나먼 타지까지 기꺼이 떠나 버린 바로 그 결기일세. 재능과 뜻이 조화를 이룬 사람은 그 잠재성도 무궁무진한 법이지. 그렇기에 자네는 구주마종보다는 본류에 더 어울린다고 보네. 어떤가? 날 따라와 보겠는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어디로 가는지 정확하게 얘기해 줄 수 있소?”
선관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천마신교의 태상교주님을 뵈러 갈 것이네.”
거리낄 것 없이 바로 대답하는 선관자의 말에 양자성은 적잖이 놀랐다. 그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빨리 뛰기 시작했다.
‘태상교주라는 말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이야. 뭐지? 나에게서 무엇을 바라는 거지?’
쉬이 판단할 수 있을 만한 가벼운 이름이 아니었기에 양자성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넉살 좋게 웃음 짓는 선관자의 얼굴이 얄미울 지경이었다.
“뜻밖에 놀라운 소리군. 이건…… 당신의 의무에 따른 것이요, 아니면 태상교주의 의중이 들어간 일이오?”
“예리한 질문을 하는군. 둘 다라고 볼 수 있네. 그분의 자네에 관한 관심은 잠깐이었지만, 그 대신 내게 판단을 일임하시었네. 그리고 난 태상교주님의 안목을 지금 인정하는 중이고.”
“…하하, 이것 참…….”
“힘을 갈구하는 사람 관점에서 솔깃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그렇다면 시간을 주겠네. 생각이 정리되거든 이곳에 오게나. 물론 떠나도 붙잡지 않겠네.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좋소. 생각해 보겠소.”
선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떠나도 좋다는 손짓을 하고는 손을 모은 채 차분히 눈을 감았다.
양자성은 잠시 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선관자를 흘겨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심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교주에게 닿을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참가한 투기장이었는데 태상교주로 닿을 줄이야.’
관청을 떠나는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과 고민을 한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휴관의 방으로 돌아온 그는 ‘주인백’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 왠지 그와 얘기나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양자성은 1층 침상에 걸터앉아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결국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른 아침에 깨어날 때까지 ‘주인백’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 볕이 닿지 않아 아직 어둠이 어설프게 걷어진 밖으로 나온 양자성은 잠시 교하토성 성벽에서 동이 트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반 시진을 망부석처럼 선 채로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관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양자성은 성주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관청 중앙 복도 반대편에서 뒷짐을 진 채 벽에 걸린 불화(佛畫)를 바라보던 선관자를 발견했다.
그는 선관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열 걸음 떨어진 거리쯤에서 멈춰서서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았나?”
선관자의 물음에 양자성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태상교주를 뵈러 가겠소이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결의가 분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