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제23장. 천마신교(天魔神敎)로의 여정 (3)
“하아, 그나저나 여기까지 오니 고약한 냄새들이 더 나는구만.”
주백자는 달리 반선이라 불렀다.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심안(心眼)의 경지에 이르러 그 본성을 간파하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그의 하해(河海)와 같이 끝을 모르는 내공의 깊이와 연결되어 상대가 가진 기운의 성질을 훤히 볼 수 있었다.
마도의 근원을 찾기 위해 서장을 돌고 다시 북으로 올라와 사막을 건너 신강을 뒤지는 동안 드문드문 마기를 품은 자들을 보아 왔었다. 그러나 이곳 교하토성 안에는 더 많은 마기를 가진 자들이 감지되면서 마치 악취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여기도 본거지는 아닌데…… 종교라는 것들이 무슨 변변찮은 사원(寺院)도 없고 말이야. 기도도 시늉만 하고, 불교나 회회교, 도교 모두 혼재하고 있으니 골치가 아프군.”
겉보기에 그는 벌러덩 누워 책이나 보는 둥 마는 둥 하듯이 보이겠지만, 심안과 기감으로 주변 상황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조용한 연못에 조약돌 하나가 떨어지면 거길 중심으로 파문이 일어나듯이 하필 그가 도착한 여기에 뜻밖에도 양자성이 등장한 건 그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서역만리(西域萬里) 타지에서 중원의 명성 있는 자를 마주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지. 더군다나 수많은 마인의 행적이 교차하는 이곳에.’
양자성은 다른 가까운 토옥(土屋)보다는 더 큰 관청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붉고 다소 평평한 기와로 쌓은 지붕이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는데 병사와 관리들이 출입문을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다.
앞서 만난 상인의 말대로 관청 뒤쪽으로 향한 그는 평시에 개방되어있는 투기장으로 향했다.
지면의 깎아지른 끄트머리에 서서 지하에 거대한 원형으로 파놓은 투기장은 꽤 웅장한 모습이었다. 사패소룡비무제 때 비무를 치렀던 경기장보다 조금 작긴 했지만, 날뛰기엔 충분한 공간이었다.
양자성의 눈길은 군중 속에서도 무장을 한 사람들에게 집중하여 살피고 있었다.
관청에 속한 병사도 있었고 무림인 보듯이 저마다의 복색을 갖추고 허리나 등에 칼을 찬 자들도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자도 있었지만, 제법 기도가 느껴지는 자도 있었다. 그런 자들이 눈길에 유독 많이 잡히는 것은 자신처럼 투기장에 관한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날파리들.’
후대선의 말에 따르면 투기장에서 잘 싸운다고 하더라도 선관자가 항상 사람을 뽑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4, 50대의 장년층 무사가 선발된 경우는 정말 압도적인 강함을 보여 줬을 때의 일이었고, 보통은 20대임에도 불구하고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들이 선발되는 주 계층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후대선을 제외하면 천마신교로 향할 명확한 길이 보이지 않는 시점에서 선관자야말로 가장 확실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이겠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투기장을 훑어본 양자성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는 시장으로 가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후에 성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포도밭에서 한 송이를 슬쩍 서리하여 강가에 앉아서 후식으로 즐겼다. 그리고 옷을 대충 벗어 놓고 속옷만 입고 강에 뛰어들었다.
뜨겁고 건조한 기후답게 강물도 뜨뜻미지근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몸의 긴장을 풀어주는 느낌이 있었다. 가볍게 헤엄도 치면서 잠시 생각을 비운 그는 입고 온 옷들도 모두 물에 적셔 땀 냄새를 닦아내고는 밖으로 나와 다시 입었다.
후우-!
뜨거운 증기가 양자성의 몸을 중심으로 뿜어져 나왔다. 내공을 이용해 단숨에 옷을 말려 버린 양자성은 좀 더 개운한 느낌을 안고 토성으로 다시 돌아갔다.
태양은 거의 저물어 어둠을 아슬아슬하게 밝히고 있었는데 토성 남문의 오르막을 모두 올라갈 무렵에는 눈에 띄게 어두워져 갔다.
성벽을 따라 설치된 화로에도 위병들이 지나다니면서 하나둘 불을 붙였고 그 밝기를 의존하여 초저녁에도 시장과 공방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의 모습을 구경하면서 천천히 산책하던 양자성의 발길은 사휴관으로 다시 이끌었다.
끼익!
요란하게 방문이 열리면서 양자성이 숙실로 들어섰다.
1층 침상 위에 누운 채 여전히 책을 보고 있는 주백자를 힐끔 쳐다보고는 2층 침상 위로 올라가 검을 구석에 밀어 놓고 누웠다.
“오래도 싸돌아다니는구나.”
“……방 안에선 조용히 하자는 거 아니었소?”
“노부가 아직 안 자고 있지 않으냐?”
“책이나 보시구려.”
양자성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옆으로 틀어 누웠다.
콩콩!
침상 바닥의 울림에 양자성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주백자가 발끝으로 양자성이 누운 침상 바닥을 두들긴 것이었다.
“이 노친네가 죽고 싶은가…….”
“승질 내지 말고 잠깐 말동무 좀 해줘 봐, 싸가지 없는 녀석아.”
양자성이 화가 가득한 얼굴로 침상 위에서 얼굴을 내밀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꾸 말끝마다 싸가……. 웁!”
툭!
얼굴을 내밀자마자 책 하나가 튀어 오르며 양자성의 얼굴을 때렸다. 아프진 않았지만, 피할 새도 없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의 얼굴을 툭 치고 다시 떨어진 책은 삐져나온 손 위에 가볍게 안착했다.
“킬킬킬!”
주백자는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양자성의 눈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양자성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어지더니 다시 침상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범상치 않은 노인네구나!’
수치심은 금방 잊어버렸다. 아무리 지근거리라고 해도 책을 던지는 걸 피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아 버렸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수일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여긴 뭐하러 왔느냐, 싸가지.”
“알아서 뭐 한다고 그러시오.”
“오호? 말동무가 돼주겠다는 거구나. 클클! 진즉 그럴 것이지.”
주백자의 웃음소리에 양자성은 기분이 나빴으나 참기로 했다. 주백자의 정체가 뭔지 모르고 또 굳이 여기서 말썽을 피워 봐야 자신에게 하등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뭐하러 왔느냐?”
“그냥 여행 중이오.”
“곱상하게 생겨서 여행은 무슨. 칼은 뭐하러 차고 다니느냐?”
“내 한 몸 지킬 무기는 있어야 하지 않겠소?”
“클클! 실력은 되고?”
“안 되면 이리 다니겠소?”
“실력에 자신 있는 모양이니 투기장에 나갈 생각이로구나.”
“…….”
양자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백자는 들으라는 듯이 더욱 크게 웃었다.
“크하핫! 이놈아, 정곡을 찔렀지?”
양자성은 주백자의 정체에 대해 경계하면서도 그의 방정맞은 웃음소리와 말투에 마치 천진난만한 기분도 느껴지고 있어서 어떻게 판단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싸가지야, 힘이 갖고 싶다고 독약을 먹어서야 되겠느냐? 독으로 약을 지어도 결국은 독이니라.”
“……이독제독(以毒制毒)도 한 방법이 될진데, 무조건 나쁘다 할 수 있소이까?”
“아흔아홉 번을 사람 죽이는 데 쓰다가 운 좋게 한 번을 사람 살리는 데 쓰였다고 해서 그걸 약이라 부르지는 않는 법이다.”
“……싸가지 말고 이름을 부르시오, 차라리.”
“장성일? 이름이 이상해서 싫어, 싸가지가 편해.”
“주인백이 더 이상하외다.”
“클클클! 틀린 말은 아니군!”
주백자의 시원스러운 대답과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양자성은 기분이 이상해졌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엇하나 명확한 단어나 진실을 꺼낸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영감은 뭐하러 여기에 오셨소.”
“노부야말로 여행 중이지, 이놈아.”
“얼마나 여행 중이시오?”
“몇 년 됐지.”
“연세가 어찌 되시오?”
“노인에게 나이 묻는 거 실례인 거 모르느냐? 싸가지없는 거 자꾸 티 내지 말거라.”
“……크흠! 연세가 많으신 거 같은데 몇 년간 이런 땡볕 아래에서 여행했다면 피부가 많이 상할 텐데 생각보다 멀끔해 보이시오.”
“독약을 탐하더니 이젠 방중술(房中術)도 탐내느냐?”
“방중술은 무슨. 여행 다니는 거 맞냐고 다시 묻는 것이오.”
“맞지 그럼. 싸가지가 없으니 사람에 대한 믿음도 없나 보구만.”
“그럼 여긴 무슨 일이오?”
“내 말 따라 하느냐?”
“가는 게 있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할 거 아니오?”
“버르장머리 없긴. 세상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여행하는 것이니라.”
“……인제 보니 미친 영감이었군.”
“진실을 말해도 믿지 못하는 걸 보니 그릇이 요강만 한 놈이로구나.”
“잠이나 자시오.”
양자성이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려 잠이나 자거라. 클클클!”
낄낄거리는 웃음을 끝으로 주백자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양자성은 묘한 긴장감으로 혹시 다시 말을 걸까 싶긴 했었지만, 정말 계속 침묵이 이어지자 한결 편한 마음으로 침상에 몸을 맡겼다.
창으로 들어오던 햇빛은 달빛으로 바뀌어 방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실내에 감돌면서 한낮의 더위도 점점 식어갔다.
양자성은 까맣게 그늘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잠이 슬그머니 다가오는 중이었다.
양자성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누웠던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귀는 천천히 열리는 방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얼마나 잤지? 세 시진 정도 되었나?’
힐끔 침대 밖 어둠을 바라보자 사람 그림자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양자성은 그 그림자가 바로 주백자임을 깨달았다.
덜컥.
문이 닫히고 잠시 기다린 양자성은 침상 위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창을 통해 밤하늘에 달의 기울기를 확인했다.
‘자시부터 한 시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새벽의 은밀한 주백자의 움직임은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지난 저녁에서의 대화로 그의 정체나 진의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이는 모습은 의심을 증폭하게 할 만했다.
양자성은 그의 뒤를 쫓아가 보기로 생각했다.
‘어쩌면 주인백도 교도일 지도 모르지.’
양자성은 조용히 방과 사휴관을 나왔다. 새벽의 찬바람을 피부로 느낌과 동시에 절벽 지상부에서의 조용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영감의 것이다.’
그는 발소리와 숨소리를 죽인 채 조용히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걸었다. 계단으로 드리워진 그늘 뒤에 숨은 양자성은 거의 다 올라가서는 멈춰선 채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민 채 주변을 살폈다.
‘없다.’
지상엔 아무도 없었다. 분명 고개를 내밀기 직전까지 느껴졌던 한 사람의 인기척이 고개를 내미는 순간 스스로 착각했다 의심할 정도로 촛불 꺼지듯 사라져 버렸다.
성벽 위의 요망대 정도에서나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을 빼면 사실상 지상을 걸어 다니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양자성은 지상으로 올라와 토옥 그늘 밑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인근을 훑고 지나갔다.
그를 감지한 병사들은 없을 정도로 그의 움직임은 상당히 은밀했다. 특별히 귀식대법 등을 익히지 않았어도 그의 기를 운용하여 호흡을 제어하고 기척을 죽이는 솜씨는 상당히 뛰어났다. 스승과 사숙들 몰래 검림을 빠져나와 기루(妓樓)에 놀러 간 경험 덕이었다.
남문부터 관청 부근까지 일대를 모두 뒤져 본 양자성에게 수확이란 사막의 추위와 침묵뿐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다시 사휴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영감을 놓칠 줄이야……. 내가 착각한 건가?’
사휴관으로 들어와 2층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어쩌면 잠결에 다른 사람의 인기척을 느끼고 착각한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기억을 의심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었다.
양자성은 멍한 기분을 안고 숙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끼이익…….
마찰음이 거슬릴 정도의 소음이긴 했지만, 잠을 깨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문이 열리면서 방 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자 발을 옮기지 못하고 몸이 굳어져 버렸다.
작은 구멍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주백자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백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싸가지야, 내가 잘 때는 돌아다니지 말랬지? 너 때문에 잠에서 깨지 않았느냐?”
짜증 섞인 주백자의 목소리에 양자성은 그 자리에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툴툴거리면서 침상에 다시 몸을 누이는 주백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양자성은 머리가 띵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