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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113화 (113/432)

113화 - 제23장. 천마신교(天魔神敎)로의 여정 (1)

“장 형, 괜찮소?”

멍하니 그늘에 앉아 있던 양자성에게 후대선이 다가와 상대를 물었다.

“무척 덥구려, 물 좀 있소?”

후대선이 갖고 있던 물통을 그에게 주었다.

“소금을 타서 조금 짭짤할게요. 너무 많이 마시면 더 힘드니 좀만 드시오.”

양자성은 마개를 열고 물을 입안으로 부었다. 뜨끈한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갈증 해소는 조금 되는 것 같은데 양지의 바닥이나 마실 물이나 뜨겁게 달궈져 있어서 더위를 식혀 주지는 못했다.

“고맙소.”

양자성은 세 모금 정도 마시고는 마개를 닫아 다시 후대선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입맛을 다시면서 전방을 바라보았다. 어느 샌가부터 길은 완만한 내리막길을 형성하면서 시야가 광활하게 트여 있었다. 좌우로 멀리 시선을 던지면 상당히 높은 산맥이 둘러싸여 있었는데 눈앞의 개활지가 분지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지대가 점점 낮아지니 느낌이 묘한 데가 있었다.

반가운 것은 그동안 황량한 사막지대만 보다가 드디어 목초지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초록의 생기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멀리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 듯했다.

양자성이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저기 가면 좀 나을 거 같은데 서둘러 갑시다.”

후대선이 피식 웃었다.

“참고로 내려갈수록 훨씬 더울 거요. 지금보다 더.”

“으윽!”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이 대륙에서 가장 낮은 곳이 바로 저 토로번(吐魯蕃)이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서 무척 습하고 또 열기가 갇혀 있으니 발바닥이 뜨끈뜨끈할 거요.”

“지금도 뜨겁소.”

“그래도 저기에 가면 제법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고 지역민들이 포도(葡萄)도 재배하니 한 번 맛보면 참 좋을 것이오.”

“포도? 그게 무엇이오.”

“이 땅에서만 맛볼 수 있는 아주 맛있는 과일이오.”

“그거 기대가 되는구려.”

두 사람은 바위 그늘에서 나와 말라비틀어진 사막 풀을 뜯고 있던 낙타(駱駝)에 올라탔다. 등에 혹이 하나 또는 두 개가 달린 이 희한하게 생긴 이 동물은 사막을 건너기에 탁월한 수단이었다.

이럇!

계속되는 더위는 지칠 만했지만, 그래도 달리는 낙타 위에서 맞는 바람은 얼굴까지 가리는 천 자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어와 땀을 식혀 주고 있었다.

양자성은 거의 일주일 넘게 사막을 달리고 있었다. 타클라마칸 사막(塔克拉瑪干沙漠)을 건너기 위해 서쪽으로 향해야 했던 상인단과는 헤어지고 후대선과 같이 낙타와 물자를 그들에게 구매하여 북서로 여정을 시작했었다.

사실상 개발된 길이라는 것 없이 지형과 방향만으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양자성은 약간의 두려움을 가진 채 후대선을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후대선이 꽤 친절했고 믿음을 가질만한 인물이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목초지에 가까워지면서 양자성은 정말 오랜만에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주름 가득한 중장년의 남녀들이 포도밭에서 열매들을 수확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반대편으로는 파오들이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도 보였다. 중간중간 행상인들이나 무기를 소지한 자들도 보여 처음엔 경계했으나 그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장 형, 이거 한 번 먹어 보시구려.”

후대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과일을 수확하는 아낙에게 가서 돈을 주고 포도 두 송이를 구해 온 것이었다.

“오오!”

후대선은 양자성의 손에 한 송이를 쥐여주었다.

“들고 잡숴 보시구려.”

동전만 한 크기의 열매들이 줄기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는데 그 껍질이 적색과 자색 중간쯤 섞여 물기를 품고 영롱하게 빛나 시선을 자극했다. 아주 약하게 과실의 향이 콧속에 스며드는데 절로 침샘을 자극했다.

포도알 한 개를 따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니 새콤달콤한 향미가 혀끝을 간지럽혔다.

“오호호! 이거 맛있습니다.”

그간의 고된 여정이 처음 맛보는 과실의 달콤함으로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먹은 건 푸석푸석한 곡물과 육포, 가끔 사냥으로 기름진 고기를 먹곤 했지만, 달달한 과일을 손에 넣기에는 중원의 겨울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양자성은 한 알씩 떼어 입에 넣고 천천히 씹으면서 그 맛을 음미했다. 혓바닥으로 걸러지는 씨들을 후두두 뱉어내는 재미도 있었다. 그 소소한 행복감이 마치 술에 취한 듯 시야를 좁혀 포도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후대선은 왼손을 허리 뒤로 가져갔다. 그리고 주먹을 쥔 채로 넷째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접고는 엄지와 새끼를 폈다. 그리고는 다시 검지와 중지를 가지고 허리를 세 번 건드렸다.

[알겠다.]

귀로 전음이 흘러들어 왔지만, 후대선은 표정 하나 변화 없이 왼손을 거두어 포도알 하나를 떼고는 입에 넣었다.

포도알에 정신이 팔리는 사이에 낙타는 계속 포도밭을 따라 북서로 이동하고 있었다. 양자성의 손에 들린 포도송이도 절반 넘게 먹으면서 그 녹색의 가지들이 민낯을 드러낼 때쯤이었다.

“저곳이 화염산이오.”

후대선의 말에 양자성이 고개를 들어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붉은 사암(砂巖)의 언덕이 시선의 더 먼 쪽으로 길게 솟아 있었는데 후대선이 가리키는 방향은 바로 그 끝 지점이었다.

아직 그의 시선에는 왜 이름이 화염산인지 모를 수준의 언덕이 길게 이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낙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 언덕의 협곡을 한 차례 시야에서 지나친 이후로는 그 이름의 의미를 조금씩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붉은 언덕들이 적갈색의 토사 색과 유사했다면 화염산은 정상에 가까울수록 더욱 붉은 적토의 색깔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용암이 녹아 흘러내리면서 생긴 경사면의 일렁이는 듯한 지형의 특색은 어쩐지 불길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정상을 올려다보았을 때, 거대한 증기류가 일렁이는 모습만 보아도 그 정상의 열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화염산.

염황문의 순례지.

그 달콤함에 정신마저 팔릴 정도였던 양자성도 손을 움직이는 걸 멈추고 멍하니 화염산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름의 무게감을 새삼 다시 깨달으며 자신이 여기까지 여정을 이어온 목적을 되새겼다.

“이제 산을 오르는 것이오?”

후대선이 피식 웃었다.

“먼 길 고생해서 왔는데 오늘 밤은 푹 자야지요. 좀만 더 가면, 이 언덕과 화염산 사이의 협곡을 따라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곳에 쉴 수 있는 파오들이 많소이다. 장 형도 거기서 쉬고 움직이시는 게 어떻소?”

“흐음.”

양자성은 잠시 생각했다.

후대선의 도움으로 신강을 가로질러 왔으니 사실상 천마신교의 근거 지역까지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황량한 사막, 붉은 언덕, 포도밭 등 천마신교와는 하등 상관없는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오로지 후대선만이 천마신교의 본거지나 교주에게 접근할 단서를 쥐고 있었다.

“그렇게 합시다.”

“하핫! 잘 생각했소.”

두 사람은 낙타를 몰고 더 앞으로 나아갔다.

곧 그의 말대로 언덕이 다시 한번 깎아지르듯 경사가 떨어지면서 화염산 사이의 협곡을 따라 흐르는 강이 나타났다. 무성한 수초와 나무들이 강을 따라 줄지어 서 있고 그 아래 파오들이 세워져 있었다. 행상인과 회족, 한족의 거주민들이 다니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은 낙타에서 내려 고삐를 쥐고 끌고 가면서 강가의 숲으로 진입했다.

강가에 앉아서 낚시 중인 노인, 빨래하는 아낙네, 헤엄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날이 둥그렇게 휜 칼날을 허리에 찬 색목인(色目人)도 보였고 회족 무사들도 보였다.

“이곳은 강가를 기준으로 북서 목초지로 가면 토로번 분지 최대의 오아시스 거주민 지역이 나오고 토성(土城)도 있소이다. 반대로 강을 따라 올라가면 화염산 반대편에도 거주지가 있고 천불동(千佛洞)이라는 곳도 구경할 수 있소이다.”

“오……아시스?”

“아, 그러니까 사막 한가운데 생긴 담수호(淡水湖) 같은 건데 우리말로 녹주(綠洲)라고도 하오.”

“오아……시스. 입에 좀 붙여야겠소.”

양자성은 어색해하면서 후대선의 뒤를 따라갔다.

이미 이곳에 온 경험이 있던 후대선은 지인으로 보이는 노인을 찾아내어 그의 파오에서 쉴 수 있게 도움을 요청했다. 투만이라는 이름의 노인은 회골족 출신으로 이곳을 지나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파오 내에 침상을 내어주고 받는 돈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파오 안에 짐을 풀고 강으로 들어가 땀에 젖은 몸도 깨끗하게 씻었다. 입고 온 옷들은 투만에게 빨래를 부탁하면서 쉴 수 있는 회족 양식의 의복을 받아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양자성은 되도록 자연스럽게 움직이면서 곁눈질로 주변 환경을 살펴보았다. 감시의 시선이나 수상한 기척이 있는지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경계하는 것보다는 의심스러운 모습들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후대선처럼 천마신교식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없군.’

바닥에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하는 회회교의 모습은 가끔 보이긴 했지만, 후대선처럼 한쪽 무릎만 꿇은 채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서 생각보다 일반인들에게 그들의 교리가 퍼지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이미 후대선은 많은 정보를 계속 전달하고 있었다. 일반인이라고 생각했던 투만도 천마신교의 감시자였으니 이미 전서를 작성하여 지나가는 행상인에게 전달한 상황이었다.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치밀하게 양자성의 일거수일투족이 천마신교의 손에 기록되고 있었다.

밤이 되면서 바람이 점점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낮밤의 일교차가 매우 컸는데 특히 이 토로번 분지 지역은 바깥 지역보다 훨씬 더운 곳이었기에 양자성도 추위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불을 지펴드리겠습니다.”

투만은 파오 중앙의 화로에 숯을 넣어 파오 내 온도를 높였다. 연기는 천막 중앙의 구멍까지 관을 세워 그곳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난 내일 아침 화염산에 올라 한나절은 계속 수행할 예정인데, 장 형은 어찌하시겠소?”

침상에 누운 후대선이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반대쪽 침상에 누운 양자성을 보았다.

“글쎄요. 후 형의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긴 한데 실례가 되겠지요?”

“잠깐이야 괜찮지만, 염황문에서 이 순례식을 관리하는 원로 고수들이 주기적으로 화염산에 올라가 순찰하면서 방해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산시키곤 한다오. 아마 오래 못 보실 것이오.”

“그렇소? 원로 고수라면 무공이 대단하겠구려.”

“상당하지요. 아마 서너 분이 번갈아 움직이실 건데, 다른 곳도 아닌 화염산 위에서라면 양 형의 실력이 뛰어나도 당해내기 어려울 것이오.”

양자성은 강정학과 염황신마와의 대결에서 그가 일으켰던 화염 지대를 떠올렸다. 지금의 이 사막지대 위에서 그만한 화염 지대를 만든다면 그곳이 바로 불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텐데 화염산 위라면 상상하기에 끔찍했다.

“후 형의 사문에 민폐를 끼치면 안 되지요. 나는 나대로 여행을 계속해 보겠소이다.”

“어디로 가실 예정이오?”

“사람들이 어디로 가면 많소이까?”

“화염산 아래 목초지를 따라 계속 가면 토로번 중심지가 나올 것이오. 거기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서쪽으로 좀 더 가면 토산 절벽을 깎아 만든 교하토성(交河土城)이 있소이다. 그곳은 신강 지역 무사들의 집합소이자 다민족들이 모여 사는 교역 도시를 갖춘 천혜의 요새인데 거기에 한 번 가 보시는 게 어떻소?”

“듣기에 뭔가 대단한 곳 같소이다.”

“토암을 깎아 모든 도시의 건물과 장벽을 세웠으니 성벽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이오. 특히 장 형처럼 호걸들이 혹할만한 하나가 그곳에 존재하오.”

“그게 무엇이오?”

“투기장(鬪技場)이오.”

“투기장?”

“그렇소. 투기장에서 치열하게 싸워 이기는 자, 큰 상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소. 무엇보다 승리자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들이 보이면 선관자(禪觀子)의 간택을 받을 수도 있소이다.”

“선관자? 간택은 무슨 의미요?”

“선관자. 그들은 대 천마신교에서 신교의 전사를 선발하기 위해 재능 있는 무사들을 관찰하는 자요. 그들의 눈에 들 수 있다면 적성을 심사받은 후에 구주마종 가운데 한 곳의 마공을 사사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다오. 바로 이 몸처럼.”

후대선이 엄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키면서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양자성의 눈빛에 그 어느 때보다 총기가 감돌았다. 지쳐가는 여정의 피로를 씻어내 줄 가장 흥미로운 단어가 드디어 후대선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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