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제22장. 군자숙녀(君子淑女)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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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장에서의 일상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야율균은을 포함한 모두가 대청에 모여 함께 식사했고 끝나면 각자의 일을 보았다.
특히 조태상 일가족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비무나 무공을 전수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조태번은 진도건을 통해 풍운십육창식을 재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풍운십육창식은 무게중심의 이동과 더불어 정교하게 힘을 조절해야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기에 단순히 초식의 자세들을 반복한다고 한들 그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았다. 조태번은 강한 근력과 순발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만큼 정교한 조절은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다.
진도건은 그에게 언월도를 받아 일반 창과 다른 무게중심을 터득하고 조태번에게 맞는 해법을 내놓았다. 그것으로 조태번이 언월도를 다루는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니 무림인들의 시선에서도 감탄이 나올 만큼의 움직임과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특히 야율균은의 시선에서 조태번의 그런 모습은 야율신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어서 멀찌감치 지켜볼 때면 가끔 추억에 젖기도 하였다.
‘저자는 대체…….’
그러면서도 놀라운 것은 진도건의 능력이었으니 상체를 드러내고 비무를 했을 때, 본 그의 육체는 그야말로 완벽한 탄력과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외공의 경지가 어느 수준인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녀는 진도건에게 비무를 청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와 충돌했을 때, 일격에 나가떨어진 일의 충격이 은연중 마음속에 공포감으로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의 비무들을 지켜보면서 적대하지 않기로 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거듭 드는 중이었다.
영은성과 최현걸이 진도건과 하는 것은 바로 초식에 관한 연구였다. 매화검법과 타구봉법은 각각 화산파와 개방 최고의 상승무공이라 할 수 있었는데 형식의 반복적인 연습과 이해를 요구하는 정파의 무공 특성상 경지를 이루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불규칙한 상황 속에서 적재적소에 다양한 형이 결집해 있는 초식들을 사용한다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오히려 기공을 활용한 단순화된 초식들이야말로 높은 내공 수준이라는 까다로운 조건 외에는 위력을 발휘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사파나 마도의 무공이 일정 경지까지는 성취가 빠르다는 말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로 ‘진도건과 사이가 가까워 수시로 비무를 할 수 있다’라는 건 또 한 명의 스승을 두는 것과 같은 가치가 있었다.
영은성과 최현걸이 번갈아 돌아가면서 진도건을 상대로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천서은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신이 진도건과 비무를 하면서 검을 익혀 온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도건의 힘은 압도적인 속도의 쾌검에서 나온다고 사람들이 보지만, 실제로는 느린 동작들을 제어하는 솜씨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게 그의 진가지.’
느린 속도와 달라지는 박자들을 정교하게 조정하면서 동작을 완성하는 것을, 진도건은 원류검결의 수련을 통해 일상적으로 행해오던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느림 속에 빠름을 숨길 수 있게 되면서 더욱 대비되는 속도감을 뿜어낼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
진도건이 가진 내공이 부족함에도 천무방 내 이혁성과 쾌검을 다툴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는데 과연 지금 두 사람의 차이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지 그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진도건은 두 사람이 초식을 수련하기에 좋은 속도를 상정하여 대응하면서 형을 익힐 수 있게 도와주었고, 더 빠른 속도 혹은 변칙적인 박자로 견제함으로써 응용력을 키워 주는 형식이었다.
짧은 나날들이었으나 영은성은 검초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해 갔고, 최현걸은 타구봉법에 대한 다음 단계의 초식을 익혀 나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저와 겨뤄 볼까요?”
천서은이 목검을 들고 걸어 나오자 진도건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미끄러지듯 몸을 낮춰 달려들며 천서은이 검을 휘두르자 진도건이 몸을 훌쩍 뒤로 날리면서 검을 흘려냈다. 실전을 치르듯 정말 빠른 움직임이었다.
천서은이 질세라 바짝 몸을 날릴 듯 솟구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꺼지듯 바닥을 쓸어내며 검격을 휘몰아치니 한순간에 전면과 측후방을 모두 그녀의 검격이 점유했다.
야천유운검 무무풍랑(舞霧風浪).
휘몰아치는 검격의 풍랑이 하단을 쓸어낼 때 진도건의 검격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천서은의 검을 쳐 냈다. 동시에 파도를 타듯 공중에서 기우뚱거리는 듯하더니 천서은을 향해 내리꽂으며 검을 휘둘렀다.
‘공중을……!’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다. 마치 허공답보를 펼치는 듯한 공중에서의 발놀림과 자세 변화를 믿을 수가 없었다.
따다닥!
무시무시한 속도만큼이나 목검들의 충돌하는 위력도 위협적이어서 일반인이라면 그 속에서 즉사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검격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를 짓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복잡한 감정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두 사람의 한 차원 높은 무공의 경지도 그러하지만, 두 사람의 합에는 서로의 실력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 깔린 것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그 격렬함에도 한 폭의 검무를 어울려 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였다.
“이제 막 연인이 되었다고 하기엔 오랜 사이인 것 같네.”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떨어진 채로 벽에 등을 기댄 채 지켜보던 야율균은이 적지 않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5, 6년을 진 대협이 천 낭자의 호위무사 겸 검술 스승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야율균은의 마지막 대답은 영은성의 귀에 넋두리처럼 들렸다.
가까운 혈족을 모두 잃은 자의 외로움이 느껴지면서 그녀의 처지에 동정이 갔다. 그러나 그의 짐작도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론 그녀도 새로운 인연을 원하는 마음이 닫혔던 봉우리가 꽃잎을 열 듯 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을 강제하는 족쇄는 모두 사라졌다. 강호 무림이라는 초원보다 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유라는 미지의 공간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함께 가졌다.
‘자유, 행복 그리고 새로운 연인……. 과연 그런 게 내게 있을까?’
야율균은은 묘한 손 떨림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한 쌍의 백학이 날개를 펼치며 춤을 추듯 어울리는 진도건과 천서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자신을 천서은에게 투영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상대하는 진도건 대신 어떤 사람이 거기에 있을지 상상을 하게 되었다.
‘남자, 신랑…….’
혈기 넘치는 초원의 여인으로서 그녀는 마음에 드는 신랑감을 원했다. 어떤 듬직하고 멋진 남자와 인연이 되어 만날 수 있을지 머릿속에 그려 보면서 슬쩍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신랑감이라는 생각 때문에 연결된 것일까? 죽은 한굴렬의 추레한 얼굴이 눈 감은 어둠 위로 순간 떠 오르자 그녀의 눈이 번쩍 뜨여지며 인상을 콱 구겼다.
“쳇!”
야율균은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연무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느닷없는 상황에 모두의 시선이 바깥바람을 몰고 들어오는 열린 문으로 향했다. 진도건과 천서은도 비무를 멈춘 채 잠시 야율균은이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천서은은 배시시 웃으며 진도건과 눈을 맞추더니 그의 품에 폭 안겼다. 그리곤 왼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수고했어요.”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훌쩍 흘러갔다.
무인들은 수련에 전념하면서 나름의 성취를 맛보았고, 조씨 가문의 가족들도 간만에 활력이 흐르는 이 기운들을 느끼면서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야율균은의 해방이 불안감을 안겼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가끔 시선을 끄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조용한 시간을 보내면서 금방 사람들을 안도케 했다.
약속의 시간이 다가오면서 다시 강호로 나서야 할 다섯 사람은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모두 다시 모웅의 대장간에 모였다.
마침내 두 사람에게 줄 군자검과 숙녀검이 완성된 것이었다.
“우와……!”
실물을 본 영은성이 옆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군자검과 숙녀검은 모두 현철로 만들어 검신이 모두 검었다. 햇빛을 받아 은은한 묵광(墨光)의 윤기가 검신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특히 검신의 정중앙을 따라 반 치 정도 되는 폭만큼의 직선으로 강철을 입혔는데 그것이 하얗게 빛나며 착시를 주는 느낌이 있어 묘했다. 검신의 호수 가까운 부분에는 각각 ‘군자’, ‘숙녀’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었다.
손을 보호할 호수 부분은 단순하게 납작한 오각형의 형태로 하여 현철로 만들어 검에 용접하고 손잡이는 하얀 가죽으로 감싸 깔끔하게 마감하였다. 손잡이 끝 고리에는 붉은 수실을 달았으니, 마치 진도건의 적발을 연상시키는 듯하였다.
두 자루 검 옆에는 검은 검신과 대비되게 하얀 가죽으로 겉을 장식한 검집이 놓여 있었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각각 군자검과 숙녀검을 들어 그 무게와 다듬어진 칼날을 살펴보았다. 보통의 강철보다 밀도가 훨씬 높기에 그만큼 무게도 묵직했다. 찬찬히 살피던 천서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모웅을 바라보았다.
“천하에 둘도 없는 명검인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와 보시지요.”
모웅은 두 사람을 인도하여 대장간에서 나와 숲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무릎 높이의 묵직한 바위가 놓인 곳 앞에 섰다. 그리고 손으로 바위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현철을 정련하여 만든 검은 바위도 쪼갤 수 있는 경도를 가진다고 하였는데 저도 궁금합니다. 시금석(試金石) 삼아서 이 바위로 시험해 보시지요.”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웅은 옆으로 멀찍이 비켜섰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먼저 해요.”
“그럴까?”
진도건은 먼저 걸어 나와 바위 앞이 섰다. 그리고 다소 비스듬히 검을 겨누었다가 완력만 담은 채 힘껏 내리쳤다.
쩌엉!
일격에 바위가 쪼개지며 군자검이 부르르 떨었다. 그날을 살펴보는데 멀쩡하게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번엔 천서은과 자리를 교대했다. 그녀는 진도건이 벤 자리를 교차하여 지나가도록 검을 휘둘렀다.
쩌엉!
두 사람 각각의 일격으로 바위는 4등분이 나버렸다. 숙녀검도 검날이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 그 예기와 경도가 얼마나 굳건한지 느낄 수 있었다.
“모 장인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제가 현철을 다룰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은 두 분 덕분이 크지 않습니까? 부디 잘 사용해 주시고 많은 의로운 일도 그 검들로 행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모웅이 정중하게 포권으로서 예를 갖추자 두 사람도 정중하게 답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태번이 씩 웃었다.
“영감님, 그럼 이제 제 언월도도 다시 만들어 주셔야죠. 언제 만들어 주실 겁니까?”
“아이고! 둘째 장주님, 이 몸도 한 이틀은 쉴 수 있게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하하하! 그건 물론이지요.”
모웅의 곡소리에 조태번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태상은 대장간에 들어가 선반 아래를 뒤지는 듯하더니 두꺼운 천 뭉치를 꺼내어 가져왔다. 그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 뭉치를 풀어내니 그 안에서 두 자루 거무튀튀한 만곡도가 나왔다.
바로 현철로 제작한 야율균은의 만곡도였다.
“이것도 돌려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평범한 곳에 있었네.”
“허허, 그렇습니다.”
“흥!”
야율균은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자신의 애도를 잠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도집을 연결한 요대(腰帶) 채로 들어 허리에 착용하였다. 오랜 애도를 허리에 달아놓으니 그동안 느꼈던 묘한 공허감이 충족되는 듯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셨군요.”
“그렇습니다. 덕분에 평안한 휴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절도사께 감사드립니다.”
조태상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진도건도 손을 내밀어 맞잡으니 두 사람의 나이 차이가 20년 가까이 났지만, 조강선에게서 비롯된 인연의 끈끈함이 마치 서로를 형제처럼 느끼게 하였다.
“헤어지기 아쉽습니다. 우리의 인연이 이걸로 끝이 아니길 바랍니다.”
“물론입니다.”
서쪽 전장이 해결되지 않았으니 조만간 금 황실의 부름이 있을 것이고 조태상은 어쩌면 그때 다시 진도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진도건은 다른 사람과도 모두 인사했다. 송 부인에게도 인사를 건네며 가까이서 울먹이는 서혜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보고 싶을 거예요, 아저씨.”
“글공부도 하면서 씩씩하게 지내고, 명이와도 사이좋게 지내라.”
“흐앙!”
서혜가 울면서 안기자 진도건은 잠시 그녀를 다독여 주었다.
진도건과 천서은 모두 준비된 행낭을 매었다. 영은성과 최현걸, 야율균은 모두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조가장 밖으로 나와 다섯 사람을 마중했다.
짧은 만남에 비해 작별의 시간은 얼마나 길어질까,
다행히 만남의 깊이가 절대 얕지 않으니 마음의 뭉클함도 따라오는 것일 터.
북쪽으로 달아났던 진풍(進風)이 이제 다시 중원의 중심을 향해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