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제22장. 군자숙녀(君子淑女) (5)
“……하아!”
잠시 표독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야율균은은 눈을 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다소 풀어진 표정으로 진도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신 오라버니의 죽음에 대해 아직 난 널 용서할 수 없어. 그러나 야율재를 죽이고 흑풍대를 전멸시킨 데에 대한 원한은 없다. 야율재 밑에서 난 자유롭지 않았고 자신의 지위를 위한 도구로 쓰려 했으니 ……죽어도 싼 놈이야. 그런 의미에서 난 너에게 빚을 졌어. 전장의 어느 누가 그를 죽일 수 있겠어?”
야율균은의 말은 이곳에 온 모두에게 정말 뜻밖의 것이었다. 그러면서 야율재가 휘두른 힘의 권력과 폭정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봤을 때, 혈족마저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이유까지 제공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야율균은에게 진도건은 호불호를 가르기에 정말 모호한 사람이었다.
야율신을 죽인 자였기 때문에 철천지원수임이 틀림없는데 야율재를 죽임으로써 그녀에게 자유로울 기회를 주었다. 또 야율신의 죽음을 전언으로 들었던 것과 달리 야율재의 죽음은 두 눈으로 보면서 시각적으로 각인이 되었다. 어떤 죽음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움을 주는 것이었다.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보았을 때 다가오는 그 원통함은 강렬하지만, 하루만 지나도 그것은 과거가 되고 한두 달이 흐르면 기억 속 공간에서도 흐릿해지는 법이다. 누군가는 복수의 불길이 계속 피어나도록 장작을 넣기도 하겠지만, 복잡하게 변하는 현실이라는 연속성은 그 불길에 넣는 장작을 차단하고 물을 붓기도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전쟁은 이제 지긋지긋해. 명령도 듣기 싫고. 강호 무림은 자유롭다며? 날 이 지경에 이르게 했으니 넌 날 거기까지 인도할 책임이 있어.”
“전쟁은 지긋지긋하다며?”
“그래도 배운 게 칼 밥인데 전장보다 거기가 낫지 않겠어?”
“마교로는 돌아가지 않는 건가?”
“나의 무공이 그들의 것이지만, 아무렴 상관없어. 난 거란인이지 마교인이 아니야.”
진도건은 시선을 돌려 천서은과 조태상, 영은성 등을 돌아보았다.
전장에서의 긴장감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 야율균은의 이야기는 그들에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적대적 관계였음을 생각해 봤을 때 믿을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진도건은 다시 야율균은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풀어주시죠.”
“진 대협.”
“제게 이런 얘기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침묵하며 왔다는 건, 원한의 화살이 여러분은 겨누고 있지 않다는 소리일 겁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가까이 두면 불온한 생각을 했을 때 언제든 제압할 수 있으니 염려도 덜 수 있을 겁니다.”
“손만 묶어 두는 게 어떻습니까?”
진도건의 말을 듣고 있던 영은성이 제안을 올렸다. 그는 야율균은이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최현걸과 함께 직접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이제는 마상에서 싸우지 않고 두 발을 모두 쓸 수 있으니 상황은 다르겠지만, 위협적인 인상이 남아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진도건은 생각이 달랐다.
“패장에 대해 자비를 베푸는 건 승장이 선택할 미덕일 텐데 자유를 주겠다고 하고 족쇄를 달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걸 채운다 한들 위협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두려움을 품으면 맹수의 눈에는 노리기 쉬운 먹잇감이 되는 법이지.”
진도건은 야율재와의 대결로 흑풍명천마공의 특성을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게다가 명마의 마정까지 흡수하면서 마성의 형성이 등골에 머물러 형성되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기실 무공을 완전히 폐하지 않는다면 족쇄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야율균은의 마공은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야율재와 같이 느닷없는 곳에서 마기를 형성하여 공격할 재주는 안 되었다.
“그럼 풀어주겠습니다.”
조태상이 품에서 족쇄의 열쇠를 꺼냈다. 그러자 진도건이 그의 열쇠 쥔 손을 잡았다.
“푸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조태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도건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하이고! 살면서 본 세상 모든 여자 중에 저 사람만큼 무서운 여자는 없었는데!”
“뭐?”
최현걸이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탄식했다. 그러나 야율균은이 매섭게 쏘아보면서 급히 그 손으로 눈을 가렸다.
진도건은 그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야율균은에게 다가가 앉았다.
찰칵!
야율균은은 발목의 족쇄가 풀리며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사라지자 발바닥으로 다른 쪽 발목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새삼 새로운 걸 보는 듯한 시선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풀어 줄지는 몰랐는데.”
“나와 약속 하나 하지.”
진도건은 그녀의 손목 족쇄를 붙들었다.
“날 공격하는 건 어떤 경우라도 받아주겠다. 그러나 너의 목표는 나로 한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난 널 절대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애꿎은 사람들을 죽이려 한다면 절대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흥! 대범한 척은. ……그렇게 하겠다.”
찰칵!
족쇄가 풀리며 손목의 억압도 풀리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 자유를 실감하는 야율균은의 표정에는 복잡한 회한의 감정이 스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진도건을 보았다가 그의 옆에 있는 천서은을 흘끔 쳐다보았다.
“널 공격하지도 기습하지도 않을 거야. 그랬다간 네 여자에게 타 죽을 거 같거든.”
“반드시 그렇게 될 거에요.”
천서은이 질세라 한 마디 더하니 야율균은은 코웃음을 치며 무리를 뚫고 바깥으로 나갔다.
눈 부신 햇살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깨끗한 공기를 폐부에 담아내고 자유의 바람이 심장을 관통하여 지나가니 전에 없던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만끽하는 듯 그녀는 한껏 기지개를 켰다.
다소 다른 문화의 의복과 생김새를 하고 있었지만, 자유를 느끼는 야율균은의 그런 뒷모습은 모여 있는 남자들이나 천서은에게도 꽤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서은이 진도건의 귀를 가린 채 속삭였다.
“한눈팔면 내 손에 죽어요.”
두 사람 뒤에 있었던 영은성은 무심코 그 속삭임을 듣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의 시선을 느낀 천서은이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영은성은 어색하게 웃었는데, 문득 진도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들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모웅의 대장간이었다.
땅땅땅! 치익-!
망치를 두드리는 힘찬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대장간의 열기는 스무 걸음이나 남은 거리에서도 느껴졌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열기가 더 강하게 느껴져 온몸이 후끈거렸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도착하자 모웅은 망치질을 멈추고 현철 막대를 다시 화로에 넣었다. 그리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검을 만들고 계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아직은 밀도를 높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소문으로만 듣던 현철을 처음 다루는 거라 꽤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필생의 역작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고 있으니 기대해 주셔도 좋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모웅은 사람들을 대장간 한쪽의 전열대로 안내했다. 그곳엔 여러 가지 군사용 병장기들이 있었는데 조태번이 무예를 익히면서 언월도를 고르기까지 그에게 적합한 무기들을 시험 삼아 만들어 본 것들이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군용 무기들이지만, 이쪽은 강호에서 사용한다는 검들을 몇 자루 구해 놓았습니다. 적합한 형태를 고르시고 길이와 폭을 정해 주시면 그대로 제작해드리겠습니다.”
진도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서은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검이 좋을지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꼼꼼하게 따져가며 모웅에게 설명하고 있을 때, 자유를 되찾은 야율균은은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대장간 한쪽 기둥에 기댄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대장간 안쪽에 닿았다. 검을 제작하기 위해 반 토막을 낸 현철참마도가 기대어져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한때 초원을 호령했던 전신의 무기가 제 주인을 잃고 누군가의 무기를 만들어 주기 위한 광물 취급을 받는 것을 보면서 인생이 무상(人生無常)하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율재의 현철대도. 달리 사람과 말을 단칼에 가른다는 현철참마도라는 이명을 가진 이 무기 아래에 쓰러진 목숨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본다면 절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검에 묻은 원념들이여, 저 불꽃이 위령(慰靈)의 화로가 되어 부디 구천(九泉)을 건너시오.’
야율균은은 눈을 감은 채 불꽃에 타오르는 넋을 위로했다.
진도건과 천서은이 설명한 내용은 모웅의 손에 의해 양피지 위로 그 형상의 도안이 그려졌다. 결론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장검의 형상을 고스란히 따르되 검신의 폭을 좀 더 얇게 가져갔다. 애초에 함께 검을 익혀 온 시간이 있다 보니 두 사람의 취향이 크게 다르지 않아 같은 형상으로 결정한 것이다.
“검신에 새길 이름도 정해 주십시오.”
“아버지가 도건에게 준 검명이 생각나네요.”
“탈명검?”
“명검도 아닌데 그런 이름을 새겨 놓았으니. 게다가 너무 섬뜩하잖아요. 전 좀 더 기품있는 이름이 좋아요. 기왕이면 도건의 검과 짝을 이룰 수 있는…….”
“제가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조태번이 손을 들며 말했다.
천서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청할게요.”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연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 낭자께서는 천무방의 공녀이시고, 진 대협은 전장에서 느꼈던 칼 같은 인상이 천 낭자를 만나 그 기풍에 물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의 모습이 강호에 둘도 없길 바라는 마음이 있으니 군자검(君子劍), 숙녀검(淑女劍)으로 명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하하! 태번아, 네가 무예만 관심을 두는 줄 알았는데 제법 문장을 펼 줄 아는구나.”
“형님, 제 나이가 몇입니까?”
“어떻습니까? 저는 동생보다 더 나은 제안을 할 자신이 없습니다.”
조태상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도건과 천서은을 보며 말했다.
“전 마음에 들어요. 도건은 어때요?”
천서은은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했다. 듣기에 연인 남녀의 표상을 일컫는 느낌이기도 하고 또 탈명검처럼 섬뜩한 느낌보다 검명에 품위가 느껴지는 게, 듣자마자 마음을 휘어잡는 느낌이었다.
진도건은 천서은의 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서은이 마음에 든다면 나도 좋아.”
“그럼 그걸로 할게요. 조 장군께 너무 감사드려요. 모 장인께도요.”
“그럼 군자숙녀를 검명으로 하여 제작하겠습니다.”
모웅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도건도 천서은처럼 마음에 드는 검명이라고 느껴졌다.
혈마 폭주 사태 이후로 다시 깨어났을 때, 진도건은 3년간 자신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좀 더 냉혈한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것은 과거 자신의 모습과 괴리가 있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자아를 재구축하는 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었다.
야율재와 대결 이후, 혈마를 다시 마주하고 어쩔 수 없이 수용하였을 때 진도건은 자신의 이름에 혈마라는 이름이 덧씌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기에 처음에 천서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도망치듯이 전장을 뛰쳐나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자아의 중심은 엄연히 진도건에게 있었고 심연에 물들어 있던 그를 천서은이 사랑으로써 꺼내 준 것이었다. 그 이후로 진도건은 완전히 달라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긍정적인 사고로 머릿속을 채워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새롭게 받을 검의 이름을 ‘군자(君子)’라고 짓는 일은 그의 자아에 새로운 상징성을 부여하는 일이 되었다. 또한 ‘숙녀(淑女)’를 대변하는 천서은에 대한 애정과 존경과 책임을 더하게 되니 그것으로도 감동이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진도건은 조태번의 손을 잡고 감사를 표시했다. 손을 타고 전해지는 진심을 어찌 느끼지 못할 수 있을까.
조태상도 뿌듯한 눈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 야율균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조태상과 눈이 마주치자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조태상은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할 말 있어?”
야율균은의 냉담한 말투를 조태상은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당신이 떠나는 날, 쌍곡도를 돌려주겠소. 우리가 돌아온 날 모웅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그 쌍도를 손질하는 일이었소.”
관심 없는 척하던 야율균은이 놀란 눈으로 조태상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표정 변화가 컸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조태상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처형을 막고 오늘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말을 잘 들어준 데다가 그녀의 무기까지 관리해주었다는 정성을 보인 것이었다.
문득 진도건이 얘기한 ‘승장의 미덕’이 떠올랐다. 야율재를 쫓아다니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고맙다.”
“천만의 말씀이오.”
망설임 끝에 화답하는 야율균은의 처지를 이해한다는 듯 조태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